• '다극화 경향'의 추진력
    [지구화시대 자본주의-‘후기 국독자론’] 제5장 다극화로 가는 세계②
        2019년 12월 18일 04: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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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극화로 가는 세계

    1) 다극화추세 (전회 연재)

    2) 다극화의 요인

    다음으로 탈냉전 이후 국제체제의 다극화 추세를 필연케 하는 요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현 시기 신 국제질서의 수립을 둘러싸고 단극 경향과 이에 대립되는 다극화 경향 간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 양자 간에는 또한 보이지 않는 내적 연관이 존재한다. 양자는 지구화시대의 경제일체화라는 공통의 시대적 배경 및 경제적 기초 하에서 출현한 서로 다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단극추세 경향을 낳는 배경은 곧 다극화를 추동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앞장에서도 서술하였듯이, 현 패권주의적 단극 추세를 추동하는 객관적 상황으로 새로운 과학기술혁명과 이에 기초한 지구화시대의 본격 개막을 들 수 있는데(제4장 2절), 이는 동시에 현 시기 다극화의 강력한 추진력이자 그 객관적 가능성으로써도 작용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지구화의 진행은 다극화에 더욱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첫째, 지구화는 초(Super)패권국가의 출현을 재촉하면서도 또한 패권국가가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는데 있어 상당한 제약조건으로도 작용한다. 둘째, 지구화는 패권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강대국들의 출현에 유리하며 또한 이를 촉진한다.

    먼저 첫 번째 측면부터 살펴보자면, 패권국가는 태생적으로 신흥 강대국의 부상을 전 방위로 견제하고 억제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패권국가는 정치군사적 수단과 경제적 수단을 사용하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지구화로 인해 각국 간의 상호침투와 상호의존성이 더욱 긴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만큼 그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고 있다. 우선 정치군사적 수단의 경우를 보면, 전통적으로 패권국가는 자국의 군사력 우위를 지키기 위해 타국보다도 국방비에 훨씬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 그러나 가공할 핵무기가 존재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관계에 있어, 강대국 간의 마찰이 발생하더라도 패권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근본적인 제약을 받는다. 설령 핵무기를 사용한 전면전이 아니고 재래식 무기에 의한 국지전을 상정한다 할지라도, 일단 강대국들이 직접 개입된 전쟁이 발생하게 되면 이것이 국제안보와 세계경제에 미치게 될 여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 때문에 패권국가는 현재 자신이 비교적 뚜렷한 우위를 점하는 군사 방면에 있어서의 충분한 역량발휘가 어려우며, 또 그 기회도 점점 더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1)

    결국 경제적 수단이 패권국가의 더 유력한 수단으로 남게 되는데, 이것 역시도 지금처럼 지구화로 인해 경제일체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별반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만약 경제적 수단 중 가장 강력하다 할 수 있는 ‘경제봉쇄’를 실시할 경우, 이는 곧 세계시장의 위축과 자국 투자자본의 손실을 동시에 초래함으로써 자국 경제 또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을 각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않은 실례로 1989년 천안문사태 직후의 대 중국 봉쇄를 들 수 있다. 미국은 당시 다른 서구 국가들과 함께 중국에 대한 노골적인 봉쇄조치를 실시하였지만, 그 효과는 잠시 뿐이었다. 이 조치는 당시 중국경제의 고도성장에는 일시적 제동을 거는 데 성공하였지만(2), 그 피해는 중국시장에 대한 의존을 더해가던 미국경제와 서구 독점자본 자신들에게도 돌아왔다. 그리하여 결국 두 해가 채 못가서 이들은 봉쇄조치를 스스로 철회해야만 하였다. 미국은 클린턴 정부 이래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소위 ‘접촉과 억제’라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양국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구화시대의 상호의존성의 강화는 강대국 간의 대규모 정치군사 및 경제적 충돌을 회피하게끔 만든다. 이 같은 충돌이 발생할 경우 서로 간의 손실과 상처만 깊어질 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 냉전시기와는 달리 적군과 아군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서로 혼재된 경우가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환경‧인구‧식량‧범죄‧테러 등 세계 각국이 함께 힘을 합해야만 풀 수 있는 지구적 차원의 공동과제들이 갈수록 쌓여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패권국가로 하여금 자신의 우세 중 특히 군사력 사용을 크게 제약시키는 요인이 된다.(3)

    두 번째로, 지구화가 어떻게 패권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강대국들의 출현을 촉진시키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지구화는 국제 분업을 촉진시켜 저개발 상태인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성장과 이로부터 신흥공업국의 출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서구 선진국들이 그간 주도해온 경제일체화는 비록 한 측면에선 개발도상국에 재난을 몰고 오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경제일체화는 동시에 인류가 이룩한 사회적 생산력의 일종의 진보적 표출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과정의 진척에 따라 세계 경제지도가 바뀌고, 일부 제조업이 개발도상국들로 이전되어 지구적 차원의 산업구조조정이 적극 추진되게 된다. 개발도상국들은 지구화 과정에의 적극적인 동참을 통해 여러 가지 이점을 얻고 자국 경제의 낙후성을 가급적 빨리 시일 내에 극복할 수 있다. 예컨대, 외자를 끌어들여 국내 경제건설 자금의 부족을 메울 수 있으며, 자국 내 결핍한 기타 자원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된다. 또 선진적인 기술과 관리경험을 도입하고, 이러한 지구적 교류를 통해 세계 각국과 민족의 첨단기술과 지식 및 우수한 문화를 배움으로써 각 방면의 능력을 갖춘 전문 인력들을 신속히 배양할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한 대만‧싱가포르‧홍콩의 소위 ‘아시아의 작은 4마리 용’으로 불리는 제1세대 신흥공업국들의 성장과정이 그 같은 과정을 거쳤으며, 또 제2세대 신흥 공업국으로 최근 부상한 브릭스 국가들도 이 같은 국제 분업과 선진국들로부터의 산업과 자본 이전의 혜택을 받았다. 이렇듯 브릭스 국가들이 현 시기 강력한 다극화의 추진역량으로서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 같은 지구화과정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2) 신 과학기술혁명 또한 다극화의 진전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신 과학기술혁명과 지구화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현 시기 지구화과정의 근저에는 과학기술혁명이 작용하고 있다. 즉, 현대과학기술은 국제간의 교류 거리를 축소시키고 국제관계 행위주체 간의 교류범위를 확대시켰으며, 그 교류빈도를 높임으로써 국제간의 상호의존 추세와 지구화를 진일보하게 촉진하였다. 또 최근 50년간 과학기술의 경제성장에 대한 공헌도는 급속히 상승해왔다. 선진국의 경우 20세기 50~60년대 그것은 30% 수준이었는데, 1970년대엔 50~70%로 상승하였으며, 1990년대엔 90%에 달하게 되었다.(4) 이처럼 과학기술은 오늘날 명실상부한 ‘제1의 생산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세계 각국은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자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전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이 같은 신 과학기술혁명은 분명 초 패권국가의 등장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최근 과학기술혁명의 대표적인 성과물인 인터넷 기술과 운송수단의 혁명은 전 지구적 분업을 촉진시키고 국제독점자본인 다국적기업의 글로벌 경영을 가능케 만들었으며, 또 국제 금융업자본이 각국 자본시장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기술적 조건을 제공하였다. 또한 최근의 과학기술혁명은 군사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와서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도 단 시간 내에 병력 투여가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직접 병력을 투여하지 않더라도 먼 거리에서 인공위성에 의해 유도되는 순항미사일을 통해 기존보다도 훨씬 정교한 타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지구적 차원의 패권국가가 되는데 있어 필수적인 군사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 과학기술혁명은 패권국가에 있어 양날의 칼이며, 더 많은 불리한 점도 동시에 갖고 있다. 현재의 과학기술혁명은 그 지식 경제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진행속도와 전파속도가 빠르고 개방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때문에 개별 자본과 국가 단위를 불문하고 각자의 영역에 있어 국제적인 경쟁 판도가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쟁은 격화하고 독점은 단기화 되는 현상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특징은 군사 분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첨단 군사기술의 변화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으며, 또 그 개발 및 구입비용이 대폭 상승하고 있다. 그리하여 첨단 군사기술의 이러한 빠른 변화 속도와 비싼 비용으로 말미암아 경쟁 국가들에 대한 절대적 군사우위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군사기술을 새롭게 혁신하여야만 하는 패권국가의 부담도 더불어 증가하게 되었다. <강대국의 성쇠>의 저자 폴 케네디는 현대의 무기기술의 발전양상은 나선식 상승을 보이며, 또 무기가격도 신종무기의 경우 모두 “그것이 대체하려는 원래 무기가격보다 3~5배가 비싸다.”(5)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듯 패권국가의 군사력 우위를 위한 유지비용이 커짐에 비해, 그 우위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과 효력은 앞서 본 것처럼 날로 악화되고 제한을 받는다. 예컨대 원자력‧레이저‧입자빔과 같은 무기들은 모두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계 주요 강대국 간에는 일종의 ‘공포속의 평화’를 계속할 수밖에 없으며, 군사력이 더 이상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일반적 수단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 과학기술은 국제관계에 있어 날로 중요한 변수로 되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국제관계에 있어 긴장완화와 협력 진전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면서 다극화의 진전에 기여하게 된다.

    유엔 회의 모습

    (3) 각국 주권의 강화는 다극화를 추진하는 빠트릴 수 없는 또 다른 중요 요인이다. 국제관계에 있어 평등주권 사상은 오래된 국제사회의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특히 종전 후 그간의 일체의 쌍무 간 조약과 협의에는 모두 이 같은 평등주권 원칙이 들어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 있어 국가주권의 강화는 단극경향과 패권주의의 횡행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유엔헌장>에서 규정한 국가주권 원칙을 옹호하는가 아니면 부정하는가는 이미 두 종류의 ‘신질서’ 간의 모순과 투쟁의 초점이 되었다.

    17세기에 근대 주권개념이 국제관계에서 최초로 등장한 이래, 주권의 강화는 인류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관통하는 일관된 역사적 추세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같은 주권의 강화는 먼저 국제사회에서 활동 중인 주권국가의 숫자가 크게 증가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유엔이 처음 성립할 무렵인 1945년만 하더라도 그 회원국은 51개에 불과하였는데, 2012년 말 현재 이 숫자는 193개로 증가하였다. 이 기간 새로 증가 된 회원국들은 1950~60년대에 서구의 구 식민체제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중남미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다음으로, 현대의 주권이 강화되는 추세는 이들 국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UN이나 WTO와 같은 다자간 국제기구가 대폭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국제기구는 소위 ‘다자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안정적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국제외교에 있어 민주화와 공개화 및 사무효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6) 특히 이 ‘다자간 외교’ 형식은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가 높지 못하고 강력한 언론매체를 갖지 못해 여론 주도력이 미약한 개발도상국들에 더 유리하다. 이들은 다자간 국제기구와 회의를 통해 중요한 국제사안 및 국제정세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해 국제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자국 권익을 옹호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된다. 예컨대, 오늘날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유엔을 다른 국가들과 교류하고 연대하는 중요한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때론 유엔의 연단을 이용하여 본국의 대외정책을 천명하고, 또 때로는 자기들끼리 연합하여 집단투표를 수행하면서 자국의 권익을 옹호하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같은 모습은 과거 소수 강대국 간의 밀실외교를 통해 국제사무를 처리하던 시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개발도상국들의 다자간 국제기구에서의 활발한 활동과 대조적으로, 이들 기구에서 패권국가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다. 현재의 유엔은 창립 초기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투표기계’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졌으며, 미국의 많은 주장과 제안이 유엔에서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예컨대 유엔의 명의를 빌린 이라크 출병이 불가능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심지어는 미국이 소수 내지는 외톨이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최근 들어 미국의 인권사항이 유엔의 관심사가 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어 미국 대표가 유엔 인권회의에서 낙선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은 그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국제기구의 발전은 다른 한편으론 각국 주권을 약화시키고 패권주의의 강화에 이용되기도 한다. 주권의 약화는 지구적 단일시장을 추진하는 현재 상황에서는 분명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비록 유엔과 같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제기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주권국가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해서만 운영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유엔은 자체 독자적인 군대나 재정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은 근본적인 제약을 받으며, 실제 운행과 집행에 있어선 여전히 주권국가의 협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의미에서도 당대의 다자간 국제기구의 발전은 주권의 강화라는 역사적 추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전의 기초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현 시기 다극화 추세와 그것을 필연케 하는 요인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현실을 보자면 냉전 종식 후 지금까지 미국의 초패권주의가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단극 경향이 그 주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로 과거의 전통이나 관성과 같은 ‘역사적 측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첫째, 양대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체제가 한쪽의 급속한 붕괴로 인해 종식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 돌연성으로 인해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미처 형성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 공백의 상당부분을 과거 냉전시기에 결성된 기존 국제기구나 동맹체제(예컨대 UN, IMF, GATT, NATO, 한미일 지역동맹 등)들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채울 수밖에 없는 실정인바, 이러한 것들은 전반적으로 미국과 서구 국가들의 기득권이 강하게 관철되는 것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도 단극 경향을 지지하는 세력은 구질서인 냉전체제 유산의 상속자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에 반해 현재 다극화의 주체인 개발도상국가와 사회주의국가는 그 빠른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꿀 만한 힘을 갖추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 경향이 잠시 주도권을 장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 시기 단극화와 다극화 두 경향이 명확히 충돌하고 있는 국제정세 하에서 단극경향은 다분히 ‘보수적’ 측면을 대변하며, 다극 경향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진보적’ 측면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양자는 같은 지구화라는 토양 속에서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극경향은 다극경향에 대해 전략적으로 방어적 입장에 서있다.

    여기서 다극화가 ‘개혁적’이라고 하는 것은, 냉전체제로부터 유래하는 현 국제질서에 대해 상당한 ‘개조’를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또 그것이 ‘진보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추진하는 주체들이 지금의 불공정하고 억압적인 ‘과도적 질서’에 대해 그 불합리한 요소들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면서, 평화와 공정을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음 절에서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인류역사가 지금까지 보여주는 바는 이 같은 진보와 보수 간의 대립에 있어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진보를 대변하는 세력이 승리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다극화의 필연성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게 갖도록 만든다. (계속)

    [본문 주석]

    1. 2016년 7월 국제중재법원에서 필리핀 아키노 정부가 제소한 영토문제에 대한 판결이 나올 즈음, 미국과 중국 간의 남중국해를 둘러싼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은 핵항공모함 두 척이 이끄는 함대를 인근지역에 파견하였으며, 그 중 한 척은 소위 ‘자유항행권리’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남중국해에 직접 진입하였다. 이렇듯 항공모함 두 척의 동시적인 작전상황은 흔치 않은 일이며, 원래 ‘준전시상태’ 라야 가동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력시위에 그쳤을 뿐 더 이상의 긴장고조는 없었다. 되돌아보면 두 나라는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시위를 통해 상대방에게 ‘간접적인’ 압력을 줄 뿐이었으며, 보다 주요하게는 주변국들에게 서로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또 당사국들은 이 같은 서로의 의중을 잘 읽고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 국제중재법원의 판결이 나왔고 그것이 중국에 대단히 불리한 결과이었지만(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막상 단호한 중국의 맞대응 의지 앞에 더 이상의 긴장고조를 자제하였다. 판결 직후 미국의 최고 해군사령관이 중국을 직접 방문하여 분위기를 전환시켰으며, 양국은 이후 목소리를 낮추면서 무력시위를 조용히 거두었다. 이 사례는 당대의 강대국 간에 있어 군사력이 어떻게 정치문제에서 사용되는지, 그리고 그 효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1989년과 1990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4.2%와 3.9%로 1980년대 들어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1년 중국 GDP성장률은 9.3%를 기록함으로써 다시 고도성장 추세를 회복했다. 최근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자국에 합병한 후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가 실시되고 있다. 비록 이 조치로 말미암아 러시아 경제가 일정한 타격을 받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대가로 유럽의 농산물 수출이 중단되고 또 러시아와 중국이 더욱 전략적으로 밀착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과연 서방의 러시아 경제제재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또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3. 카터 정부 하에서 국가안전보좌관을 지낸 브레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국의 지도력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곤란 가운데에는 국제정세 특징 자체의 변화로부터 기인한 것들이 포함된다. 과거와 비교할 때 권력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곧바로 큰 제약을 받는다. 핵무기의 존재는 전쟁을 정책수단이나 위협수단으로 삼는 효력을 대폭 삭감시켰다. 국가 간에 경제에 있어 상호의존 정도가 증대한 것은 경제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책략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게 만든다. 때문에 유라시아의 체스판에서 성공적으로 지역전략 역량을 운용하려면, 현재의 주요한 방법은 임기응변, 외교수단의 사용, 동맹관계의 건립, 선택적으로 신 성원을 동맹에 끌어들이기, 그리고 이와 함께 매우 교묘하게 자신의 정치적 자원들을 배합하는 것이다.”브레진스키,《거대한 체스판—미국의 일차적 지위와 지연정치(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31. 또 다음의 신문 투고 글도 흥미롭다. “중국이 현행 국제질서에 융합(도전이 아닌)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빠르게 궐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미국 간에 거역하기 힘든 상호의존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미국 내 각 이익집단 간의 정책취향을 크게 분화시켜 놓았다. 이들 각 이익집단이 중국의 빠른 발전에서 얻는 이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미국의 정치세력 간에 대 중국 정책상에 있어 일치점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그 결과 미국의 대 중국 정책은 일관된 전략적 구상을 오랫동안 결여하였으며, 조변석개한다.” 황징(黄靖),<포퓰리즘의 범람은 미국의 ‘방향상실’을 비춰준다>, 환국시보(环球时报), 2016년5월5일자. 저자 황징은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수이다.

    4. [중]왕빈,2003,《과학기술혁명과 사회발전(科技革命与社会发展)》,同济大学出版社, p172.

    5. 폴 카네기, 《강대국의 흥망성쇠(大国的兴衰)》하권,中信出版社, p224. 그는 첨단무기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첨단무기일수록, 제조하는 시간은 더욱 길며, 유지 보수하는 시간도 더 많이 들고, 장비의 중량은 더욱 크며 제조가격 역시 더욱 높고, 또 생산 수량은 줄어든다.”(p243) 현대 첨단무기가 이렇게 비싼 이유는 주요하게는, “무기가 불가피하게 날로 복잡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대 현대전투기의 부품은 10만 개에 달한다.”(p182) 그리하여 현대에 있어 선진적 무기기술의 이렇듯 지속적이고 빠른 발전은, 지금까지 애써 구축한 “현재의 무기체계를 아무 소용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아마도 어떤 무기체계를 갱신하는 데 소요되는 제조비용 역시도 더욱 비싸게 만든다.”(p229) 이러한 상황은 냉전 후기 미국과 소련의 중간에 끼인 프랑스와 같은 중간 역량의 핵전력 보유국을 매우 곤란한 처지로 만들었다. 예컨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선택에 부딪치게 되었다. 즉, 중요한 (핵무기나 첨단기술 관련된) “일부 무기계통의 연구를 완전히 중단하든가, 국민경제를 아예 군사화하든가”(p229)가 그것이다. 또 다른 예로, 최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있어 미국이 ‘항해자유권’을 빌미로 미국의 항공모함을 이곳에 파견해서 자주 순항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 국회의원에 대해, 미국의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잡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미군이 항공모함을 남중국해에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하려면, 한 개 항모전투 집단을 구축하는 비용만 하더라도 130억 달러에 이르고, 그 하루 행동비용은 650만 달러이다. 미국의 국가채무는 이미 19조 달러를 초과하였다. 누군가가 소위 ‘항해자유 행동’을 취하도록 주장할 경우, 과연 그가 미국 납세자들의 지지를 얻었는지 모르겠다.” 환구시보,2016년4월29일자에서 재인용.

    6. [中]蔡拓 等著,2005, 《国际关系学》,南开大学出版社, p193. 근래의 WTO의 협상과정을 보면, 이 같은 다자간 국제기구에 대해 서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태도가 확연히 다름을 잘 엿볼 수 있다. 예컨대, “개발도상국은 주요하게는 기제를 통해 선진국들의 실력에 대항하며, 이에 반해 선진국은 자신의 강력한 실력을 통해 집단적 기제에 대항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발도상국은 주요하게는 자신의 투표권(1국1표-주), 국제법에 의거한 평등한 국가권리를 쟁취하려고 하며, 선진국은 권력(현실역량-주)에 의거해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WTO체계의 전형적인 실례는 그 정책결정기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데, 개발도상국은 협상에 의한 만장일치의 모든 회원국의 권리를 강조함에 비해, 선진국들은 ‘그린 룸’ 회의(밀실회의-주)를 통해 개발도상국의 단결을 와해시켜 패권적 목적을 실현하려 한다.” [중]程大为, 2009, 《WTO(체계의 모순 분석(WTO体系的矛盾分析)》,中国人民大学出版社,pp132-133.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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