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레미 코빈의 도전·좌절
    ‘낙관하지 않는 희망’ 필요
    에밀리 쏜베리의 당선 소감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2019년 12월 14일 06: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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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선거의 전후 맥락, 정치적 의미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자의 지난 9월 기고 글 “영국 존슨 총리의 극우 행보와 노동당 좌파 코빈 대표의 노선과 고민”을 함께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편집자>.

    * * *

    ‘실망스럽다’라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상황도 없을 것 같다. 녹색산업혁명(green industrial revolution)을 기치로 내걸고 금융위기 이후 추진된 긴축정책을 끝내겠다는,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역전 불가능한 방식으로 노동하는 대중을 위한 방향으로 권력과 부의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좌파’ 노동당의 도전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투표율과 투표 참여자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세부자료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 자세한 ‘분석’을 시도하기에는 이르지만 보수당이 과반을 훨씬 넘는 안정적인 다수의석을 확보한 것, 그리고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과 존 맥도넬(John MacDonnell)의 사회주의 노선에는 심각한 타격이 가해질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역전 불가능한 방식으로 노동하는 대중을 위한 방향으로 권력과 부를 전환”한다는 것은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신노동당이 폐지한 그 유명한 ‘당헌 4조’의 핵심내용이다. 노동당 좌파 그룹의 떠오르는 샛별 중에 한명인 레베카 롱 베일리(Rebecca Long Bailey)가 선거운동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노동당 좌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리고 여전히 강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토니 벤(Tony Benn)이 남긴 “희망은 미래를 향한 연료이지만 공포는 당신을 가두는 감옥”이라는 말과 함께.

    노동당 정치인들이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린 것도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정권(1997-2010)에서 였다. 여기에 보수당-자민당 연정(2010-2015)의 긴축 기조가 더해지면서 영국의 복지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선거 기간 내내 쟁점이 되었던 영국 사회복지의 최후의 보루인 전국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의 투자 부족은 상징적인 사례였을 뿐이다. 코빈이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유한 나라’의 어린이 빈곤과 노숙자 문제는 창피한 수준이다. 주택 문제도 심각하다. 노동조합은 지난 40년 동안 공격받았고 노동자들의 권리는 유명무실화되었다. 노동자들의 일할 권리를 무력화하는 ‘제로-아우어 계약’(zero-hour contract)이 만연하고 있다.

    2017년 선거공약집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하여>, 그리고 2019년 공약집 <지금이 변화를 위한 진짜 기회다>는 이런 현실을 역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2019년 공약은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을 정책에 반영하여 민영화된 6개의 발전기업과 버스노선을 국유화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유럽과 북미의 급진파들이 제시하고 있는 녹색뉴딜을 ‘녹색산업혁명’으로 제시한 것이다. 당연히 재생에너지, 특히 육상풍력과 해상풍력, 그리고 태양광을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적극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녹색당이 지적한 것처럼 약점이 없지는 않다. 항공교통 확장과 도로건설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며 특히 원자력 문제에 대해서는 현상유지를 선택했다.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 박스안은 보리스 존슨 보수당 대표

    희망은 패배했다. 그 패배와 좌절의 원인은?

    여기까지는 노동당 좌파의 ‘아름다운’ 도전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2015년 당수로 선출되고 당내 우파의원단의 불신임을 압도적인 당원들의 지지로 돌파하고 모두가 참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2017년 선거에서 선전하면서 1980년대 초 이후로는 자취를 감췄던 노동당 좌파의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이 끝난 후 <가디언>의 컬럼니스트 오언 존스(Owen Jones)가 희망 섞인 어조로 표현했듯이 코빈의 진정성(sincerity)은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코빈에게는 마지막 도전이었을 2019년 총선은 실패로 끝났다. 266석은 203석 수준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국내 언론에서는 브렉시트를 둘러싼 쟁점만을 소개했지만 이번 총선은 영국을 넘어 녹색사회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시험대였다. 그리고 분명 타리크 알리(Tariq Ali)가 ‘극단적 중도’라고 조롱했던 신자유주의적 중도파 노선은 파산선고를 했고 금융위기의 책임을 긴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떠넘기는 우파 정부에 대한 염증도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조건이 아니었는가? 거기다가 보수당 총리인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은 거짓말만 늘어놓는 정치인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유권자들의 정서였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를 꼭 닮은 그런 정치인으로 인식되었다. 유럽인들의 정서에서 ‘트럼프’라는 이름은 조롱거리 이상이 아니다.

    우선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브렉시트 그 자체다. 보수당의 선거 구호는 ‘브렉시트 완수’(Get Brexit done)였다. 52대 48로 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 이후 마련된 여러 차례의 협상안은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전임 총리 테레사 메이(Theresa May)가 퇴진하게 된 이유도 이런 교착상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에 포함되어 있는 각 지역(통합왕국 즉 United Kingdom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포함하고 있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데다가 보수당은 협상 없는 브렉시트까지 불사하겠다는 강경파와 이에 저항하는 온건파의 내홍으로 몸살을 앓았다. 노동당 의원단 내에서는 소위 하드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소위 붉은 장벽(Red Wall)이라고 불리는 노동당의 핵심 지역구들의 다수가 브렉시트를 선택한 곳들이었다.

    코빈에게는 골치 아픈 과제가 던져졌다. 과거 산업지대였던 중부지방의 노동당 거점 지역의 탈퇴파들과 대도시 지역 잔류파 노동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곤란한 상황을 당내 우파들의 가만둘 리가 없었다. 부당수 톰 왓슨(Tom Watson) 등이 앞장서서 제2국민투표 입장을 명확히 하라는 압박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그럴 때마다 언론은 노동당의 ‘내분’을 머리기사로 뽑으면서 코빈의 정치력 부재를 부각시켰다. 좌파 성향의 <가디언>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수당과 우파 언론의 공격은 더 집요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코빈에게 던져진 질문은 브렉시트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가였다. 이미 ‘탈퇴’와 ‘잔류’의 두 가지 선택지만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영국을 다시 통합하겠다는 코빈의 말은 비겁한 기회주의로 받아들여졌다. 지금 영국인들에게 가장 민감한 주제인 사회정책과 경제정책, ‘녹색산업혁명’과 ‘보편적 공적서비스’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당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주목 받는 순간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오직 막대한 투자재원 마련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부정적인 시각에서였다. 정부 예산을 마치 일반 가정처럼 생각하고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보수적 시각에 익숙해져 있는 유권자들에게 정치권과 언론의 공격은 코빈-맥도넬 팀의 정부지출 확장 계획은 존슨의 말처럼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하게 했다. 오직 숫자의 비교만 있었다.

    노동당의 사회주의 노선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코빈 개인에 대한 공격이었다. <인디펜던트>에 기고된 한 매체 분석 칼럼은 언론이 코빈을 다루는 태도에 대해서 분석하면서 통상적으로 정치인들이 당의 대표나 총리가 되었을 때 주어지는 언론과 정치인 사이의 허니문 기간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언론은 워치독(watchdog)이어야 하지만 코빈에게만은 어택독(attackdog)이었다고 했다. 좌파 정치인들에게 흠집을 내고 ‘정신 나간’ 사람들로 만드는데 발군의 실력을 갖춘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역량을 다시 한 번 검증된 것이다. 토니 벤, 켄 리빙스턴, 아서 스카길은 대표적 희생양이었다.

    그 밑바탕에는 영국판 레드컴플렉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국 정치에서 극단주의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코빈은 신페인당의 게리 아담스(Gerry Adams)처럼 여왕을 존중하지 않고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빨갱이라는, 그래서 헌정질서 안에 수용될 수 없는 극단주의자는 주문을 계속 외워댔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코빈의 맞상대인 ‘트럼프스러운’ 존슨의 정치성향을 조롱하면서 기존 정치권의 ‘합리성’ 범주 바깥에 위치시킨 후 슬쩍 여기에 코빈을 끼워 넣는 프레임도 한몫했다. 언론의 프레임은 역사상 처음으로 주요 정당의 대표들이 ‘인기 없음’(unpopularity)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코빈에게는 빨갱이 이미지에 브렉스트에 대해 입장이 없는 비겁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여기에 존슨과 한 묶음으로 묶여 인기 없음 경쟁을 하고 있는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코빈은 잘 알려진 평화주의였다. 당연히 중동문제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지자였고 반시온니즘(anti-Zionism)을 고수해왔다. 극우적인 시오니스트 집단에서 이걸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이미 코빈의 연관 검색어는 ‘테러리즘’과 ‘테러리스트’였다. 코빈의 대표가 된 이후에 당내 반대유주의(anti-semitism)가 횡행하고 당은 여기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있다는 대대적인 공세가 진행된다. 급기야 이들은 선거 막판에 ‘코빈 아니면 누구든 괜찮다’(anyone but Corbyn)이라는 구호까지 들고 나왔다.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총선 패배의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 정치는 냉혹한 것이며 처음부터 코빈과 노동당 좌파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상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동당의 사회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코빈은 다음 총선까지 대표직을 수행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총선 결과를 평가할 때까지는 직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내 우파들은 벌써부터 즉각 사퇴를 주장하고 있다. 코빈 이전으로 당을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항상 주장해온 대로 온건파만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내 좌파 의원들도 이런 우파의 공격을 우려하면서 사전 차단에 나서고 있다. 결코 코빈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코빈의 지지자이자 차기 대표 후보군에 포함되어 있는 에밀리 쏜베리(Emily Thornberry)의 당선 소감은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The real fight has to begin now)였다. 앞으로 5년 보수당이 긴축을 조금 완화한다고 해도 큰 기조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유럽을 벗어나 트럼프의 미국을 가까워지면서 영국정치를 지배해왔던 소위 대서양주의(Antlanticism)가 노골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유럽연합 안에 있으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환경기준, 노동기준, 인권기준은 악화될 것이다.

    이미 철 지난 시장맹신주의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해진 사회안전망을 악화시키고 브렉시트를 통해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했던 백인노동자들을 더욱 좌절에 빠트릴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16살짜리 어린 소녀가 환기시킨 바대로 현행의 자본주의체제는 인류의 생존자체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발표한 <99퍼센트를 위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은 생태주의에 근거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결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주의를 표방해야 하며, 그 내용은 반자본주의일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올여름 발간한 <On Fire>는 내용적으로 생태주의-페미니즘-사회주의의 동맹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미국과 동맹한 존슨의 보수당 정부의 정책이 불러올 불만이 결합할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하는 것이 쏜베리가 말한 ‘진짜 싸움’이어야 한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영국만의 싸움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애슐리 도슨(Ashley Dawson)의 주장처럼 기후변화 위기가 아닌 ‘멸종’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한 싸움인 것이다. 이 생존이 걸린 싸움의 대상은 바로 ‘자본주의’다. 시장맹신주의자들이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증거로 사회주의는 불가능한 한때의 꿈이었다고 주장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지난 40년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시장맹신주의가 인간을, 자연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처참하게 파괴했는지 강려한 경험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인류가 생존할 길은 없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비판적 정신이 도출해 낸 최소한의 합의다. 이러한 비판적 정신의 합의가 시장의 논리에 맞게 길러진 우리들의 몸과 무의식에 강한 마찰을 일으키고 여기로부터 체험적으로 생겨나는 불만과 좌절을 정치적 에너지로 끌어 내오는 싸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영국 총선의 결과는 우울하다. 하지만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어쩌면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2015년 출간한 책의 제목처럼 ‘낙관하지 않는 희망’(Hope without Optimism)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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