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경마’의 진짜 얼굴,
    연이은 자살과 무한경쟁
    '마사회–마주–조교사–기수–말 관리사’의 다단계 고용구조 바꿔야
        2019년 12월 11일 06: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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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경남경마공원이 2005년 개장 이후 벌써 7번째 비극을 이어가고 있다. 4명의 말 관리사와 3명의 기수가 목숨을 잃었다. “죽어서 나간 사람이 몇 명인데…도대체 뭐가 선진경마일까”라고 했던 고 문중원 씨의 생전 마지막 말처럼, 이 비극의 정점엔 ‘선진 경마’를 표방하는 한국마사회가 있다. (관련 기사 링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일하다가 숨진 7명의 말 관리사와 기수는 하나같이 마사회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드러냈다. 모두가 비슷한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마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기수와 말 관리사를 ‘갈아 넣어’ 무한경쟁을 강요했고 이를 ‘선진 경마’라고 이름 붙였다.

    사진=곽노충

    조교사 갑질, 생존권 쥔 마사회의 방조

    문중원 씨는 유서를 통해 모든 ‘권한’을 독점하면서도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마사회의 비정상을 드러냈다. 마사회는 마주가 조교사와 위탁계약을 맺고 조교사가 기수와 말 관리사를 관리하는 체계로 운영된다. ‘마사회–마주–조교사–기수–말 관리사’로 이어지는 다단계 고용구조인 셈이다. 예컨대 기수가 어떤 말을 탈지, 어떤 경기에 참여할지 등을 조교사가 정하고 경기 상금을 기수 등에게 배분하는 것도 조교사의 권한이다. 이 다단계 구조의 가장 아래에 있는 기수와 말 관리사는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강요당하고 조교사의 부당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생존권을 위협 받아야 했다.

    말 관리사와 기수에 대한 갑질 문제는 문 씨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공운수노조가 지난 4일부터 9일까지 부산경남·서울·제주경마공원의 전국 기수 총 125명 중 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조교사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기수가 부산경남경마공원은 70%에 가까웠고 서울경마공원은 70%가 넘었다.

    조교사의 부당한 지시의 내용은 대부분 “말의 능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 “다리가 안 좋은 말 출전”, “1군의 말을 늦게 들어오게 해 2군에 머물게 하는 것” 등이었다. 노조는 이러한 부당지시는 부당경마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짚었다.

    기수 대부분이 이러한 조교사의 이러한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없다고 답했는데, 만약 지시를 거부할 경우 말을 탈 기회를 축소·박탈당하거나 문제의 말을 배정해 기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보복행위 등이 벌어진다고 응답했다.

    다단계 구조의 가장 윗선에 있는 마사회는 기수면허 유지권, 조교사면허 취득권, 마방대부 심사권 등을 독점하며 사실상 모든 권한을 쥐고 있다. 조교사의 부당지시가 가능했던 것도 마사회가 다단계 고용구조를 유지하며 기수와 말 관리사의 임금, 처우 등을 모두 조교사 개인에게 떠맡겼기 때문이다. 조교사 갑질 행위는 사실상 마사회가 방관, 조장한 셈이다. 그럼에도 마사회는 문 씨의 사망 이후 “마사회 소속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유족과 노동조합과의 실질적 대화에 나서지 않고 있다.

    실태조사에 참여한 기수들 90%가 마사회가 기수와 조교사 운영, 마방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답했고, 기수면허 유지(76%)와 조교사 면허 취득(50.7%)에 대한 불이익으로 통제한다고 밝혔다.

    갑을관계 속 최저 생계비 미보장
    건강권 위협…병가율 일반산업의 5배
    특수고용노동자라 산업재해보험도 적용 안 돼

    기수의 수입은 기승료와 경주 출전 상금으로 구성된다. 마주에게 받는 위탁 관리비로 조교사가 지급한다. 기수의 수입은 일종의 고정급인 기승계약료 외에 나머지는 조교사에게 맡겨져 있는 구조다. 철저한 경쟁 위주의 수입체계로, 말 훈련 및 경주 출전을 하지 못하는 기수의 경우 월수입 최저액은 2017년 기준 150만원이다.

    실태조사에서도 전체 기수 90% 가까이가 “기승 계약료, 출전기승료, 상금 배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경쟁성 상금을 조정하고, 최저생계비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가장 많았다. 노조는 “기수의 낮은 수입이 조교사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수입 등의 지급 구조(기자회견 자료 캡처)

    기수들의 건강상태도 심각한 상태였다. 건강문제로 인한 결근일이 3일 이상인 경우가 50%가 넘었다. 일반 산업에서 건강 문제로 인해 3일 이상 결근한 비율은 10~15% 정도다. 특히 부산경남경마공원 기수 중에 건강문제로 인한 결근일이 다른 경마공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았고 장기간이었다. 특히 올해 10일 넘게 병가를 낸 비율이 50%를 넘었고 한 달을 초과하는 병가를 낸 경우도 20%에 가까웠다.

    노조는 “경마공원의 연간 재해율은 13.89%로 전국 평균 재해율 0.52%의 25배를 넘고 있다.이 재해율도 산재를 은폐하는 가운데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7년 말 관리사 관련 특별근로감독에서 5년간(2013~2017년) 응급센터를 통해 이송된 노동자(107명) 중 62건의 산업재해가 보고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몸이 아픈데도 나와서 근무해야 하는 경우인 ‘출석주의’도 하루 이상인 경우가 90%였다. 일반 산업의 경우 20~25% 정도다. 출석주의가 높을수록 근무자 간의 경쟁적 관계이며, 성과 위주의 조직임을 뜻한다.

    “문제는 선진경마, 선진으로 포장한 투전판”

    다단계 고용구조와 최저생계비 미보장, 건강권 위협 등은 모두 마사회가 표방하는 ‘선진 경마’의 진짜 얼굴인 무한 경쟁을 위해 이뤄진 일들이었다.

    문중원 씨의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공공운수노조는 11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문제는 ‘선진’이란 말로 포장한 투전판을 만드는 제도에 있다. 한국마사회는 지금 당장 ‘선진경마제도’를 폐기해야 한다”며 “문중원 열사의 죽음 앞에서도 성찰이 없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혜진 전국불안정철폐연대 상임활동가도 선진경마라는 이름을 붙인 무한경쟁체계의 폐해가 문 씨를 포함한 7명의 말 관리사와 기수의 죽음으로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김혜진 상임활동가는 2017년 박경근 열사 당시 말 관리사 고용구조개선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김 상임활동가는 “목숨을 끊은 기수와 말 관리사의 유서를 보라. 마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가득하다. 이들의 생명을 갈아 넣어 만든 제도를 마사회는 선진경마라고 부른다”며 “부당지시로 경마 비리를 까지 불러오는 등 경마의 공정성을 해치고 무리한 경주로 말의 폐사율도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마사회의 죽음을 향한 무한질주를 멈추기 위해 정부는 더 이상 마사회가 벌어들이는 돈에 현혹되지 말고 규제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 또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동자가 죽고 나서 바뀌는 것은 비극적이다. 하지만 죽었는데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존재 가치가 없다. 공공기관은 사회적 가치와 노동권을 존중하는 인권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공공기관은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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