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52시간 상한제 1년 유예
"저임금·미조직 노동자에게 고통 전가"
"노동존중 아닌 노동혐오"···정의당, 장관 고발 예정
    2019년 12월 11일 04:09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정부가 내년 1월부터 주52시간 상한제를 시행하는 5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에 계도기간 1년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사업주가 주52시간을 넘겨 일을 시켜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노동시간단축 정책을 중소기업에 적용하는 것을 1년간 미루겠다는 뜻이다. 노동계는 법적대응을 시사하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유예기간 2년, 중소기업 90% 이상 준비 완료에도…
재계 요구 따라 300인 미만 사업장 ‘장시간 노동 유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11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한 브리핑에서 내년 1월부터 주 52시간제 적용 대상인 50~299인 기업에 대해 1년의 계도기간을 일괄 부여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중소기업은 앞으로 1년간 주52시간을 초과해 일을 시켜도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게 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노동조건의 양극화까지 더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작년 3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은 법정 노동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제한하고 이를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시행하도록 했다. 300인 이상 대기업은 작년 7월부터 주 52시간 상한제 시행에 들어갔다. 50~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은 내년 1월부터 주 52시간 상한제를 적용해 근로기준법 개정 후 올해 말까지 21개월간 준비 기간을 부여했다. 그러나 정부가 1년의 계도기간을 또 다시 주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노동시간단축 정책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됐다.

특별연장근로 인가 범위도 확대하기로 했다. 특별연장근로는 노동부의 인가를 받아 주 52시간 초과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서, 현재는 재해·재난 및 이에 준하는 사고 수습에 한해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노동부의 인가를 받아 쓸 수 있었다.

노동부는 ▲인명 보호 및 안전 확보 ▲시설·설비장애·고장 등 돌발상황 긴급 대처 ▲통상적이지 않은 업무량 대폭 증가 ▲노동부가 국가 경쟁력 강화와 국민 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연구개발 등으로 인가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업무량 증가, 연구개발 등의 사유로 인한 장시간 노동이 이어질 경우에 한해 근로일 종료 후 다음 근로일 개시 전까지 11시간 연속 휴식 부여, 특별연장근로 도중 또는 종료 후 연장 시간만큼 연속 휴식시간 부여 등의 건강권 보호조치 방안을 마련했다.

계도기간 부여와 특별연장근로 인가 범위 확대는 경영계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다. 정부는 주52시간 상한제 시행 의사를 밝힌 직후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추진했으나,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자 행정조치를 통해 이를 강행한 셈이다.

노동부는 중소기업의 준비 미흡으로 이 같은 행정조치를 시행하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노동부의 지난 9월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사업장 중 93% 사업장에서 노동시간 단축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극소수 기업의 준비 미흡을 이유로 중소기업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악하겠다고 발표한 셈이다.

민주노총 “작은 사업장, 저임금‧미조직 노동자에 고통 전가”
한국노총 “문재인 정부, 적폐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노동시간단축 등을 통한 중소기업 노동자의 노동조건 향상을 기대했던 노동계는 이날 정부의 발표에 “재벌과 보수정치 세력 아우성에 굴복한 장시간 노동체제 구태 유지 선언”이라고 규정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오전 11시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장의 구조적 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와 국회 본연의 책임은 외면하고 작은 규모 사업장과 저임금‧미조직 노동자에게 고스란히 희생과 고통을 전가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사진=곽노충

이날 회견에 참석한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은 최근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일하다가 과로사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례를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이 노동자는 물량이 없다는 한 달은 무급휴직, 한 달은 공장에서 일하는 불안정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노동자가 무급휴직 한 달 동안 쉴 수 있겠나.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다른 일을 하고 또 다시 한 달 동안 공장에서 일하며 과로사한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이런 정책을 발표한 정부는 노동존중이 아닌 노동혐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질타했다.

한국노총은 문재인 정부를 박근혜 정부와 비교하며 “적폐”라고 표현했다. 한국노총은 이날 긴급 기자회견에서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을 산산조각 내는 명백한 ‘노동시간 단축 포기선언’”이라며 “노동시간 단축의 무력화를 획책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적폐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모든 이가 누려야 할 인간다운 삶이 경제상황을 이유로 영세한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고통이 집중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며 “특히 포괄임금제, 유연근로시간제 등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소규모 사업장에 특별연장근로 인가 확대는 ‘재앙’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지금 상황은 난 2016년 한국노총이 ‘915 노사정 사회적 합의 파탄선언’을 했던 그 모습 그대로”라며 “당시에도 사회적 합의 이후 정부여당이 이른바 ‘2대 지침’ 발표 등 합의내용과 전혀 다른 정책을 추진했다. 한국노총은 이러한 역사의 반복을 원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양대노총과 일부 정치권, 법적 대응 시사
민주노총·정의당 이재갑 장관 퇴진 요구

노동계 등은 근로기준법을 위반하는 시행령 추진, 국회의 입법권 침해 등을 지적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법적 대응과 이재갑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대한민국 헌법은 인간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법률로써만 노동조건 기준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장시간 노동을 위해서는 법에도 없는 조치를 강행했다”며 “헌법을 위반하고 자의적인 권력을 남용한 것으로 법적,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법률원 김세희 변호사는 “시행규칙만으로 근로시간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것은 헌법과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며 “만약 정부가 위법한 내용들을 인지하고도 시행규칙으로 특별연장근로 허가 사유를 개정한다면 서울행정법원에 근로기준법 시행규칙 제9조에 대한 취소 소송 및 집행정지 신청, 헌법소원을 동시 제기해서 그 위법성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노총도 “법률적 대응태세를 갖추어 둔 상태”라며 “제도의 목적과 취지를 왜곡하고 있는 정부의 근로기준법 시행규칙 개정안 입법예고 그 즉시, 헌법소원 및 행정소송 준비절차에 돌입할 것이며, 개정 시행규칙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개별 특별연장근로의 인가처분에 대한 취소소송 또한 불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의당은 이재갑 장관을 직권남용,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할 예정이다. 정의당은 “계도기간 1년 유예, 특별연장근로 인가 대상 확대를 골자로 한 이번 보완대책은 법률이 정한 주52시간 상한제 시행시기를 법률을 집행해야 하는 고용노동부가 직무를 유기해 법집행을 임의로 유예했다. 이는 국회의 입법권을 심대하게 침해한 직권남용으로 심각한 불법행위이자 명백한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김종민 정의당 부대표는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정부의 이번 발표는 ‘기업프렌들리’만 듣겠다는 선언으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시행령 정치를 부활시킨 것”이라며 “이번 정부 대책에 대해 정의당은 강하게 규탄한다”고 말했다.

김 부대표는 “노동부장관은 헌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제1의 임무”라며 “정의당은 52시간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거듭된 후퇴에 대해 비판 몇 마디로 넘어갈 생각이 없다. 고용노동부 장관 사퇴와 직무유기에 대한 법적 고발 등 단호한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필자소개
유하라
레디앙 취재기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