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9년 경성파노라마 사진으로
    바라보는 서울 서대문 밖 동네 풍경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국제적이고 혼종적인 모습
        2019년 12월 10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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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근현대 도시이야기 칼럼 코너

    1929년 촬영된 경성파노라마 사진은 인왕산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서울의 서쪽 지역을 보여준다. 사진 속 풍경은 독립문에서 서대문(돈의문)을 지나 경성역으로 이어지며, 사진의 전체를 의주로(현재의 통일로)가 관통하고 있다. 의주로는 사진의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인 지점에서 신문로(현재의 새문안로)와 교차하고 있으며, 인왕산 자락에서 서소문(소의문)이 있던 위치까지는 한양 성곽 역시 이어지고 있다. 독립문과 남대문은 보이나 서대문과 서소문은 철거되어 없으며, 서대문이 있던 위치에서는 서울 성곽 역시 잠시 끊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 파노라마 사진은 죽첨정 언덕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지역은 조선시대 성밖지역인 반송정 일대로 교북정, 행촌정, 홍파정, 천연정, 교남정, 송월정, 냉천정, 평동정, 죽첨정 1,2정목, 미근정, 의주통 1,2정목, 합정, 합청정, 중림정, 봉래정, 서계정, 남대문통5정목, 고시정 일대 정도이다.

    그림1 . 경성파노라마사진(1929)에서 보이는 서대문 밖 일대의 풍경과 1927년 경성시가도

    독립문 일대

    사진의 좌측 끝에는 1897년 건립된 독립문과 편창제사방직주식회사를 발견할 수 있다. 편창제가방직주식회사가 위치한 행촌동 209번지에는 1911년 송병준이 설립한 한성잠업전습소가 위치하였는데, 1915년부터는 은사수산제사소겸제사장(恩賜授產所及京城製絲塲)으로 사용하다가 (1924년부터는 관영으로 운영) 1927년 일본의 제사회사인 편창제사방직회사가 인수하여 운영하였던 것으로(매일신보 19270720), 사진 속 높은 굴뚝이 보이는 건물은 1916년에 준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신보 19161201)

    한편, 독립문이 있는 교북정에서 홍파정을 거쳐 영국성서공회가 있는 송월동 일대까지 이르는 의주로 동측 영역은 의주로 주변의 일부 2층 가옥과 딜쿠샤, 일본하리스토정교회유지재단, 영국성서공회 등의 몇 개의 서양식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서 보이듯, 1906~07년경 이 일대는 영국성서공회 건물과 인근 서양식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일부 기와집과 다수의 초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약 20년 후인 1929년 파노라마 사진에서도 이 일대에는 역시 초가가 대부분인 것을 알 수 있으나, 임야였던 성벽 아래 언덕 부분까지 가옥들이 건립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1932년 기상측후소가 들어서는 송월동 1,2번지에는 토막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사진에서 잘 확인되지는 않지만 독립문의 서측 교북동 4번지에는 1921년 설립된 경성의 주택구제회에서 조선인 빈민들을 위해 1922년 준공한 한옥인 교북동 간편주택이 있었다.

    그림2. 1900년대 인왕산 산자락에서 영국성서공회가 있는 송월동 일대까지의 풍경. (출처: 1906~07 헤르만 산더 사진)

    그림3 . 독립문~송월동 일대의 풍경과 주요 시설들 (1929 경성파노라마 위 표시)

    그림4 . 송월동-홍파동 일대의 풍경과 주요 시설들 (1929 경성파노라마 위 표시)

    한편, 성벽 주변인 송월동과 홍파동 언덕 위에는 딜쿠샤와 홍난파 가옥 등 서양인 주택들이 건립되어 있으며, 영국성서공회 및 하리스토스정교회유지재단 (러시아정교회) 건물이 그 아래편으로 위치하였다. 이 일대에는 주로 조선인들이 거주하였는데, 1934년 인구통계를 보면 교북동에는 조선인 인구가 2,201명인데 반해 일본인 인구는 0명, 홍파동 역시 조선인 인구가 2,202명인데 반해 일본인 인구는 11명으로 일본인 인구가 매우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송월동의 경우에도 크게 상황은 다르지 않아 조선인 인구 1,183명에 일본인 인구 132명의 비율을 보였다.

    * 홍난파가옥은 1930년에 독일인 선교사가 건축한 주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진 속 위치와 건물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홍난파 가옥이 그 이전, 즉 1929년 경에 이미 건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천연정, 냉천정, 교남정, 평동정 일대

    의주로 건너 서측에는 각종 학교들이 위치하였다. 천연동 언덕 위에는 경기중군영 자리에 1922년 건립된 향상여자실업학교(향상회관) 및 제생원 맹아부, 죽첨보통학교 등을 발견할 수 있다. 1913년 설치된 시각청각장애학생 교육기관인 제생원 맹아부는 사진에서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지만 사진의 좌측 아래 부분에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향상여자실업학교 동측에 위치한 1929년 8월 30일 개교한 죽첨보통학교의 경우, 운동장은 보이지만, 학교 건물은 나무에 가려서인지 보이지 않는다. 이 일대는 이 기관들이 들어서기 전 서묘(숭의묘), 서지, 경기중군영이 있던 자리로 죽첨보통학교의 경우 1929년 서지(西池)를 매립하고 건립하였다.

    그림5 서지(西池)가 있던 천연동 일대

    한편 천연동의 남측인 냉천동 언덕에는 협성신학교가 들어섰다. 협성신학교는 1907년 남·북 감리교가 연합으로 설립한 학교로, 1910년 현재의 위치인 냉천동 31번지 부지와 와가 6개동을 구입하여 임시교사로 사용하였다. 현재도 감리교신학대학 안에는 3층 벽돌조 양옥건물인 기숙사였던 건물인 탁사기념관과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2층 벽돌조 양옥건물이 남아 100년이 넘은 학교의 오랜 시간을 보여준다. 한편 붉은 벽돌조의 서양식 건축물인 캠블 기념관(1915년 3층 건물로 신축, 화재로 소실 후 1921년 4층 건물로 재건)이 있던 자리에는 1959년 화재로 인한 소실 이후 건축가 김정수가 1960년에 건축한 연석 마감의 청암기념관이 있다.

    그림6. 천연동, 냉천동 일대의 풍경과 주요 시설들 (1929 경성파노라마 위 표시)

    천연동 건너편인 의주로 동측은 20세기 초반에는 독일영사관, 구세군회관 등이 들어서며 서양인 시설들이 자리잡았으나, 일제강점 이후에는 점차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되어 갔다. 1906년 설치된 평동 26번지의 독일총영사관은 1929년 현재 조선식산은행의 합숙소인 청운료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영사관 앞 평동 13번지 일대에는 조선총독부 산림과 기사였던 와타나베 다메키치(渡邊爲吉), 조선총독부 영선과 기수였던 아이자와 게이지(相澤啓治) 등이 소유한 일식 주택들이 다수 위치하였다. 한편 적십자병원 및 옛 경기감영 동측인 평동 76번지는 1908년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의 본영으로, 이 곳에는 1910년 구세군 성경대학(1912년 사관학교로 개칭)이 설치되었으나 1928년 정동에 구세군회관을 신축하며 이전하였다.

    1934년 인구통계를 보면, 천연동, 냉천동 일대가 대부분 조선인인구였던 것에 반해 평동 일대는 조선인 1041명, 일본인 433명으로 약 2:1의 비율을 보인다. 전체적인 풍경에 있어서도 일식 가옥들이 다수 건립되어 있어 교북동, 홍파동, 송월동 일대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그림7 . 평동 일대의 풍경과 주요 시설들 (1929 경성파노라마 위 표시)

    ▲의주로&신문로 교차로

    의주로와 신문로가 교차하는 지역은 이 일대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로, 서대문일대의 주요 공공시설 및 상업시설 등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1933년 6월 24일 동아일보기사 <신록의 대경성부감기(11)> 에서는 이 일대를 감영앞거리라 하며 ‘감영 앞거리는 서쪽의 진고개랄 만큼 와글와글 복잡하다’라 하고 있어 여전히 이 일대를 감영앞이라 일컫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일대가 진고개(혼마치) 만큼이나 번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8 . 경기감영도 속 경기감영의 모습

    그림9 . 1900년대 초반 사거리 모습 (출처: 1906~07 헤르만 산더 사진)

    그림10 . 1929 파노라마 사진 중 사거리 부분

    경기감영이 있던 죽첨정1정목 90번지는 한성부, 경성감옥 등으로 사용되다가 조선적십자병원, 서대문경찰서, 서대문우편국 등의 공공시설로 사용되었으며, 남측 맞은 편에는 조선금융협회, 동양극장 등이 들어섰다. 의주로 건너편인 죽첨정 2정목의 코너에는 1934년 서대문우편국이 신축되었으며, 그 뒤편으로는 죽첨정공설시탄채소시장과 공설질옥이 들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시탄채소시장은 주로 조선인 거주지에 설치된 것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땔나무와 채소를 판매하는 시장을 설치한 것이었으며, 공설질옥은 총독부가 감독하는 전당포로 죽첨정 공설질옥은 1931년 설치된 것이었다.

    한편, 죽첨정2정목 남측에는 삼본제작소를 비롯한 회사와 제작소 등이 있었으며, 죽첨정2정목에서 서대문까지 이르는 신문로와 의주로 일대에는 사진에서 보이듯이 2층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1906~07년 경의 사진에서는 한성부와 스테이션 호텔 등을 발견할 수 있으나, 이외에는 대부분 단층 기와집과 초가집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대문 사거리 일대에만 단층 상점가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나, 1929년 사진에서는 사거리 부분에는 대부분 2층 이상의 중층 건물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 번화한 거리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11 . 서대문 사거리 일대의 풍경과 주요 시설들 (1929 경성파노라마 위 표시)

    그림12 . 죽첨정 일대의 풍경과 주요 시설들 (1929 경성파노라마 위 표시)

    이 일대는 일본인 인구비율이 높은 편으로, 1934년 죽첨정1정목의 경우 조선인 505명, 일본인 244명, 외국인 43명, 죽첨정2정목의 경우에는 조선인 1,040명, 일본인 546명, 외국인 52명이 거주하고 있어 조선인:일본인의 비율이 약 2:1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외국인의 비율도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다.

    국제적이자 혼종적인 서대문 밖 동네의 모습

    도성으로 나가는 마포로와 의주로가 위치한 돈의문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이자 국제적 성격이 강한 곳이었다. 이는 개항 이후에도 이어져 정동 일대에는 서양공사관들이 들어서고 서양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되었으며, 1900년 서대문정거장 설치 이후에는 이 일대의 필지들을 서양인들이 매입하고 영사관을 비롯한 종교 교육시설 등으로 사용하였다. 경희궁 있던 자리에는 경성중학교,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곳에는 서대문소학교, 서지가 있던 곳에는 죽첨정보통학교, 그리고 미근정에는 미동보통학교가 들어섰다.

    한편, 특수한 성격의 교육시설이라 할 수 있는 남산본원사에서 교화기관으로 설립한 향상회관을 근간으로 하는 향상실업학교 및 시각청각장애학생을 교육하는 제생원 맹아부가 천연정 언덕에 위치하였고, 종교 관련 교육시설인 구세군 성경대학, 한국인 성서훈련원, 감리교 협성신학교, 피어선 성경학교 등이 분포하였다. 일제 강점 이후 서양인들의 소유였던 필지 중 일부는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성격은 남아 다수의 종교, 교육시설들이 존재하였다.

    이 일대에 서양인 시설들이 다수 자리잡게 된 것은, 이 일대가 조선시대부터 의주로가 있어 조선시대 사신들이 왕래하며 외부와의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곳이었던데다가, 서양인 공사관들이 대부분 위치한 정동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또한 1901년 서대문정거장의 설치로 교통이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서대문사거리 주변을 제외하고는 1930년대에도 대부분 조선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시 서양인들, 특히 기독교 관련 시설들이 자리잡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서대문사거리 일대와 의주로 주변에는 1929년 현재 이미 서대문 밖의 중심지역으로서 경찰서, 우체국, 병원 등 공공시설들이 위치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도로개수사업이 진행되며 근대적 가로의 분위기를 갖추게 되었다. 가로 주변으로는 번화한 상점가가 형성되는 한편, 조선인들의 주거지에는 공설시장들이 설치되었다. 현저동, 송월동 일대의 언덕 위에는 가난한 조선인들이 사는 토막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대문 밖 동네는 서양인들과 기독교, 일본인들의 주택과 상점, 조선인들의 주거지가 혼재되어 있는 매우 혼종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는 곳이었다. 지금도 이 곳에는 적십자병원, 우체국, 경찰국, 감리교신학대학 등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공설시장으로 시작한 영천시장과 주변의 도시형 한옥들, 의주로 주변의 2층 상점건축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1920년대 말 서대문일대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

    참고문헌

    1. 陳內六助, 『京城府管內地籍目錄, 1917年 大正六年』,  京城共同株式會社, 1917

    2. 陳內六助, 『京城府管內地籍目錄, 1927年 昭和二年』,  京城共同株式會社, 1927

    3. 和田重義, 『大京城都市大觀』, 朝鮮新聞社, 1937

    4. 서울역사박물관, 『대경성부대관』, 서울역사박물관, 2015(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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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각정동직업별호구조서』,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2017(1934)

    7. 서울역사편찬원 편저, 『(국역)경성도시계획조사서』, 서울역사편찬원, 2016(1927)

    8. 이고은, 『돈의문밖 교남동 도시조직 변화에 관한 연구』 ,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학위논문, 2014

    9. 이왕무, 「「漢城遠望圖」에 묘사된 19세기 후반 한양 도성 西郊의 풍경」, 『장서각』 36, 2016, pp.104-123

    10. history.go.kr

    11. seoul.go.kr

    필자소개
    인천대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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