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노동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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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21일 10: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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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논쟁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예의와 하고자 하는 말에 대한 서로의 논점이 어느 정도 유사한 평면 위에 서야 한다. <레디앙>의 이재영 기획위원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면서 논점을 이탈하지 않도록 조심하고자 한다.

1. 모든 시도를 푸리에 이후의 일탈로 볼 수 있나?

   
▲중앙일보 8월 11일자에 실린 ‘박원순 변호사의 희망찾기’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리든 혹은 자율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든 시장적 질서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떠한 시도들은 종교에 근거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시도들이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가톨릭 농민회 이후에 많은 시도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지식인 혹은 엘리트 중심의 접근이기도 했고, 일부는 그런 것들과 별로 상관없이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들도 있다.

이 시도들이 모두 일탈에 불과하다고만 얘기한다고 하면, 사실은 스탈린주의의 시도에 대한 평가도 같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21세기, 세계화 국면에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가를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는 긴장과 여유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소위 시민단체에서 ‘시범케이스’를 찾고, 이런 시범케이스를 확대하겠다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돈을 받아서 관변단체와 시민단체 사이에서 위험한 선을 타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다소 극단적인 혹은 일탈적일 수도 있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그 가치를 일거에 의심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2. 한국 사회에서의 생태운동과 생명운동 그리고 무정부주의

박원순 변호사가 지역을 살린다고 거론한 몇 개의 사례들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약간의 기반을, 그리고 생태주의와 지역주의가 혼합된 다소 복잡한 시도들이 약간은 과도하게 성공사례로 부풀려져 있고, 그런 면에서 이런 ‘맹아’가 존재한다고 희망이라고 지적하고,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에서 이러한 종류의 연구를 더 하겠다고 광고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히 나는 불편하다. 조금 심하게 얘기하면, 연구소인가 아니면 흥행기획사인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실험들이 딛고 있는 운동들의 맥락을 일탈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철학적 실험들의 질문은 그보다는 깊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과연 생태주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하여간 생태주의라는 이름으로 몇 개의 공동체와, 다른 삶에 관한 양식에 대한 질문들이 부분적으로 시작된 것이 사실이다.

보통은 생협이라고 부르는 생활협동조합의 경우는 한살림과 같은 단체는 생명, 때로는 생명평화라는 기치 위에 서 있고, 일부는 ‘협동’이라는 기치에 조금 더 방점을 딛고 실제로 조직 활동을 하고 있으며, 많은 시민들이 조합원으로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 좁혀서 계산하면 20만명을 잡고, 조금 넓게 계산하면 3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활동을 하고 있는 곳들도 있다.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시도들은 분명히 무정부주의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엮어서 중앙에서 활동의 성과물을 추렴해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박원순 변호사의 최근 행보에 대해서 내가 불편해하고, 세련된 중앙주의의 옷으로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의 지역의 성과를 가져가는 듯해서 그렇게 점잖은 운동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진행되는 지역에서의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와 나름대로의 성과들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므로 자본과 노동의 양 축만으로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환원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생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3. ‘조합’과 ‘지역’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나 역시 풀뿌리라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거나 이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과장하고 싶지 않고, 유기농업이 일거에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지역에서 기초의원이 시민운동 활동가에서 배출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COOPs’라고 표현되는 조합들과 노동조합이 아닌 많은 지역단체들이 실제로 유럽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중립지역들 그리고 생활인들이 움직이는 지역에서부터 하나씩 문제와 의제가 제기되고, 의견이 만들어지는 상향식 의사결정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지역에서 제기되는 논의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은 물론이고 많은 중앙 단체들이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의 대안’은 찾아지지도 않을 것이고 만들어지기도 어렵지만, 수많은 대안들이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면서도 현재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풀 수 없고 해소되지 않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일탈’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른 목표 혹은 다른 문제의식 속에 서 있는 것이라는 더 넓은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이재영의 표현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민중’이 진보라는 이름 위에 서 있기 어렵고, ‘지역의 시민’들이 노동의 가치를 높이 들기는 천부당만부당이다. ‘일탈’이라는 이름을 여기에 붙여주는 것보다는 왜 지금의 좌파들이 지역에서 그리고 ‘국부적인 문제’에 대해서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다음을 향한 접근이 끊어져 있는지를 살펴보는 반성과 되돌아봄이 더 필요하다.

‘자본’이라는 질문으로 지금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눈을 더 크게 떠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가 요즘 하는 일은 중앙에서 지역에 대한 ‘운동성과 가로채기’에 조금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례와 시도들을 일탈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국토생태’라는 질문을 해보자. 더 많은 생산의 성과로 적절한 공해저감 설비를 달아주고, 더 많은 기술에 의존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생태주의라는 질문이 성립하는 것이다. 생활인들이 그리고 농촌지역에서 답답해서 하나씩 움직이는 것들이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훨씬 더 넓고 깊은 애정으로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운동에는 더 전위적인 시도가 있기도 하고, 더 대중적인 시도가 있기도 하다. 자본으로부터 일거에 문제를 풀고, 한 번에 해방되기 위한 몇 번의 시도들이 좌절된 이후에 생겨난 이런 새로운 흐름들에는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어려운 삶의 질문 그리고 사회의 근원에 대한 질문들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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