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정보관 김용장 소동,
    한국 언론 최악 오보사건
    [기고] "광주의 진실은 거짓에 근거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2019년 12월 02일 10: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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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미 501 정보단 소속의 군사정보관이었다는 김용장 씨의 증언이 올해 상반기 언론을 비롯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전두환의 광주행과 그가 광주 진압 명령을 내렸다는 증언에 대해 사람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결정적 진전이 이뤄졌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광주항쟁 르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최초 영문판 번역자였던 필자는 이에 대한 강한 우려를 제기한다. 김용장 씨의 직위 자체와 그 직위의 신뢰성에 근거한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제기였다. 이미 필자는 올 상반기에 국내 언론에 두 차례 이에 대한 기고를 한 바 있다. 필자는 김용장 씨가 군사정보관이 아니라 미군 계약직 군속 통역관이었으며, 광주항쟁에 대한 정보를 취합 분석 보고할 지위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정보관이었다는 그의 주장에 근거한 증언들도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잘못되고 과장되고 변질된 증언이 광주항쟁과 광주학살 진상규명의 핵심고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려를 담아서 기고 글을 레디앙에 보내왔다. 이미 한국 언론에 기고한 내용들을 기초로 하고 상당히 보완하여 미군 501 정보단의 군사정보관이라는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군사정보관을 둘러싼 논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의 증언이 한국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던 이유도 그가 미군 관련 일을 하는 개인이 아니라 광주항쟁에 대한 정보를 취합 정리 분석 보고하는 미군 ‘군사정보관’이라는 직위가 그가 말하는 증언의 (그리고 그가 제기하는 근거자료가 있다면 그 자료의) 무게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레디앙은 필자의 주장에 충분히 제기되고 또 답해야 할 가치를 가진다는 판단에 기고 글을 게재한다. 다소 긴 글이지만 나누지 않고 게재한다. 김용장 씨 등 누구든지 반론 글을 보낸다면 기꺼이 지면을 제공할 생각이다. <편집자>

    * 군사정보전문관(MIS. 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이라는 용어는 미군들 중 특히 군사정보와 관련된 훈련(장교의 경우는 관련 석사과정을 마쳐야 됨) 과정을 마친 장교와 사병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해군, 공군, 육군, 해병대에 근무할 수 있는데, 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 소속 정보전문가라고 한다면 이런 훈련과정을 마치고, 군이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통신정보(SigInt)와 현대에 들어서 고도화된 복합된 통신 기구와 전자장비 등을 통한 정보를 취합하여 군사정책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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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과 5월 사이, 스스로를 미군 군사정보관(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 MIS)라고 주장하며, 5.18 관련 온갖 증언으로 한국의 헤드라인을 장악했던 김용장. 나는 두 차례의 경향신문 기고문을 통해, 그가 군사정보관이 아닌, 미군 정보부대 501 정보단의 민간 군속 통역에 불과하고, 80년 5월 당시, 그가 속한 501 정보단의 524 임시대대-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국방정보국(DIA) 계통을 거치는 공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할 위치나 권한은 없었다고 폭로했다.

    그 후, 8월, MBC <PD수첩> 박건식 책임PD는 한 기고문(관련 글)에서, 김용장과 학교 동문 이자, 당시 광주 파견 국군 보안사 요원이었던 허장환이 김용장의 메가톤급 폭로를 <PD수첩>을 통해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김용장의 증언을 꼼꼼히 점검한 <PD수첩>은 그의 증언이 신빙성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김용장에 대한 박건식의 결론을 인용해 보자.

    “김용장 씨가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기안품의를 올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직 김용장 씨는 당시의 정보원에 관한 내용이나, 당시의 보고서 내용이나 군사정보관 관련 신분 자료들을 어느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박건식의 기고문은 김용장과 그의 친구이자, 당시 광주 파견 보안사 요원 허장환을 사실상, “거짓 제보자”로 규정했다. 거짓제보자에게 속지 않으려면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게 글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개월간 내가 행한 취재의 결과는, 김용장과 허장환을 세상을 데리고 나온, 한국 국민 사이에서 신뢰도가 가장 높다는 종편 채널과 이에 협력한 제법 알려진 518 연구자 하나는 거짓 제보자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속아준 것을 넘어,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거짓 신분과 증언을 덮으려 했다는 것이다.

    방송 출연 중인 김용장 씨(방송화면 캡처)

    김용장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김용장은 3월 14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로 통해, 세상에 등장했다. 광주항쟁이 여전히 열정적 주제인 모든 이에게 남태평양 피지에서 찾아낸 한국인 미군 군사정보관의 등장은 정말 흥미롭고 흥분된 순간이었다. 정작, 김용장은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던, 계속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일 수 없는 증언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일성은 80년 당시, 광주에 미 국무성 직원이 없었고, 자신의 부대가 미국의 유일한 정보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광주에는 국무성 소속 미 문화원이 있었고, 항쟁 전후에 몇몇 보고를 본국으로 보낸 기록이 있다.

    김용장은 공수부대가 물푸레나무를 깎아 만든 10kg에 달하는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했고, 그 진압봉 하나를 구해, “본부”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나무로 된 진압봉이 10kg이 될 수 없고, 그 무거운 진압봉을 제 아무리 특수부대원이라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없다. 김용장이 킬로그램을 미군이 사용하는 도량형인 파운드라고 착각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10 파운드 몽둥이라면, 4.54kg 정도. 항우장사가 아니라면, 맘대로 휘두를 수 없는 무게였다.

    증언이 사실도 이치도 맞지 않기에, 나는 그가 한바탕 소동 이후 곧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2주 쯤 후에, 5.18 기념재단 비상임 연구자 A에게 문자가 왔다. 4월 중순에 자신과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5.18 취재 차 미국에 가니, 동행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5.18 당시 주한대사관 무관이자 DIA 요원 제임스 영(James Young) 그리고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태평양 담당 도널드 그레그 (Donald Gregg)를 만나, 김용장 관련 증언을 취합한다는 게 취재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또한 좀 생뚱맞게, 3년 전 작고한 당시 기독병원 미국인 원목이자, 광주 미군 공군기지 영내 교회 부목사의 부인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김용장의 증언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부탁을 완곡히 거절했으나, A의 요구대로, 목사 부인과 그레그의 연락처를 공유했다.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민간방송의 시청률 높은 시사프로그램이 김용장을 접지 않는 이상, 그의 증언의 파동은 커질 것이다. 생각이 이렇게 다다르자, 나는 김용장의 신분과 증언을 간단히 조사해 보기로 결심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김용장의 상위 조직인 INSCOM과 DIA를 정보 공개 요구(FOIA)를 통한 증거 확보였다. 다양한 FOIA 경험이 있는 노동전문 저널리스트인 나의 친구 크리스 브룩(Chris Brook)은 FOIA 전문으로 하는 탐사저널리스트들의 커뮤니티를 소개해줬다. 그 커뮤니티를 통해, INSCOM과 DIA 정보공개 요청에 필요한 요령과 유의점을 숙지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냉전 체제 하에서는 미국 국적이 아니면, MIS가 될 수 없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미 공개된 <DIA의 정보보고서 교본>(DIA Style Manual for Intelligence Production)과 INSCOM의 80년 연례보고서(Annual Historical Review)도 구해 볼 수 있었다.

    연례보고서와 이미 공개된 80년 5월 당시 DIA 문건을 세밀히 검토해도, 한국인 MIS의 흔적은 없었다. 대북 감청첩보가 주임무인 501정보단의 당시 총인원은 196명 중 직접고용한 민간인은 2명. 그러한 특기자들이 한국인일 가능성은 희박했고, 그 둘 중 하나가 한국인이라도 당시 본부가 있는 서빙고가 아닌 지방도시 소규모 공군기지에 배치될 확률은 더더욱 희박했다.

    3월 14일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공개한 501정보단 표창은 김용장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라는 것을 적시하고 있었다. 김용장이 501정보단에서 일했다면, 정황을 봤을 때, 미국인 상관의 언어 수발을 들며. 그의 지시에 따라, 지역 정보를 취합하는 영구 계약직 군속통역일 거라고 추정한 나는 그의 증언과 신분에 의문을 제기하는 간단한 메모를 작성했다. 물론 그가 군속이나 통역이라는 추정은 어디까지나 추정이므로 메모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 메모를 INSCOM의 80년 연례보고서와 함께 5.18의 진상을 추적하는 기자들과 의원 보좌관들에게 보냈다. “미국 군사정보관의 5.18 증언”이라는 엄중성에 비춰, 광주항쟁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만이라도 팩트 체킹과 후속취재를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INSCOM의 80년 연례보고서 표지 부분

    FOIA

    몇몇 지인과 A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의 미국 취재 상황은 살펴볼 수 있었다. A는 페이스북을 통해, JTBC의 요청으로 그레그와 인터뷰 약속을 취소했다고 말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용장은 그가 광주항쟁 기간 중, 작성한 40건의 보고서 중 5건이 백악관에 올라갔고, 그중 3건을 당시 대통령 지미 카터가 읽었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5건의 보고서는 전두환의 80년 5월21일 광주 방문, 헬기사격 그리고 계엄군 성추행/성폭력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몇 년간 5.18 진상 조사의 가장 중요한 이슈 전부를 담고 있었다는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그레그를 꼭 인터뷰를 해야 했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아시아 책임자 그레그가 그런 민감한 보고가 지역에서 접수되면, 제일 먼저 열람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문지기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5.18 연구자 A와 JTBC취재진이 모를 리 없다.

    더군다나, 그레그는 80년 당시, 백악관의 5.18 정보 취합과 분위기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인사다. 카터는 5.18 관련 한국 언론의 수차례 인터뷰 요청을 완고히 거절하고 있다. 그레그의 상사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그의 수하 마이클 옥센버그(Michael Oksenberg)는 각각 2017년과 2001년 작고했다.

    JTBC의 일방적 인터뷰 취소 이유를 따로 묻지 않았다. 그러나 A는 2017년 유엔 5.18 학술 컨퍼런스에 그레그를 초청했을 때 일었던 논란을 언급하며, CIA 출신이자, 80년 당시 무력진압을 지지한 미국의 안보 관리를 인터뷰하는 것을 취재진이 부담스러워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CIA의 그레그 인터뷰가 부담스럽다면, CIA보다 더 끔찍한 일을 많이 한 국방정보부 DIA 소속 제임스 영 무관을 취재하는 논리가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후,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취재진이 김용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를 아냐고 묻자, 제임스 영은 모르겠다고 대답한 것은 물론, 김용장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지인이 전해줬다.

    MIS는 꽤 비중 있는 직책이다. 김용장이 정말 MIS라면, DIA 한국 책임자가 한국인으로서 그 직책까지 오른 자를 모를 리 없고, 기억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미국 취재의 목적이 김용장 관련 팩트체크인지, 그를 MIS로 세우려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후 며칠 후, 목사 부인에게서 이메일 왔다. JTBC 취재진이 김용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가 501부대 MIS인데, 알아보겠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 부인은 그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김용장은 JTBC에게 스스로는 제임스 영과 서로 알고 있고, 목사 부부와는 교류하는 사이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온갖 루머와 억측이 난무하는 5.18 진상규명 국면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JTBC의 김용장 세우기 식 보도의 여파가 걱정됐다. 아니 두려웠다. 그래서 INSCOM 김용장의 신분과 그가 썼다는 보고서를 공식 확인하기 위해 INSCOM에 정보공개 요청을 보냈다.

    첫 번째 기고문

    시간은 어느덧 흘러, 5월이 왔다. 광주의 지인이 두 가지 소식을 알려왔다. 먼저 5.18기념재단과 민주당 박광온 의원이 5.18을 맞아 피지에 사는 김용장을 초청해 서울과 광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망월동 국립묘지의 51.8 기념식에도 참석케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광주MBC가 허장환을 길잡이 삼아, 피지 현지로 국장급 인사를 보내, 김용장을 단독 인터뷰를 하려 했으나, 김용장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어 사흘 전에 전격 취소했다는 소식이었다. 광주MBC 기자는 허장환이 김용장 만나러 가는 길잡이 조건으로 지방 방송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요구를 했으나 받아 주기로 결정해 놓고도, 피지 현지 인터뷰를 취소한 이유는 김용장 증언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확인해줬다.

    기념재단의 김용장 초청을 무마할 힘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A에게 INSCOM 80년 연례보고서와 메모를 보내며, 김용장의 언론 노출을 줄여야 한다는 내 의견을 5.18재단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A에게 메모 내용을 설명하며, 김용장이 민간인 신분이고, 연례보고서가 적시한 두 명의 민간인 고용인 중 하나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고, 그는 수긍했다. 또한 미국 무관이자 DIA요원이 제임스 영이 김용장을 몰랐다고 말한 것을 확인해줬다. 그러나 그는 김용장의 언론 노출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못박았다.

    김용장은 5월 13일 국회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전국의 헤드라인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드러난 사실과 간단히 비교해 봐도 그의 많은 거짓은 드러날 수 있었다. 그의 허위주장은 이미 6월 2일자 경향 기고문에서 어지간히 다뤘기에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겠다. 대부분은 언론들은 미 육군 MIS라며 김용장의 거짓을 고스란히 베껴내고 있었다. 한국인의 중요한 소통수단, 페이스북과 트위터도 들끓었다. 그러던 중, 메모를 받은 의원 보좌관 한 명에게 연락이 왔다. 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직접 참석할 것이며, 기념사 중, 김용장과 허장환을 간접적으로 언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급해졌다. 대통령의 말은 곧 역사이기 때문이다. 김용장이 다른 곳도 아닌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5.18 역사의 일부로 등극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가 대통령 연설에 언급되고, 그후 그가 가짜 제보자라는 확증이 나온다면, 문재인 정부는 물론, 5.18 진상규명 노력은 수치스런 타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확증은 없었다. INSCOM은 김용장이 작성했다는 보고서는커녕, 501 광주 파견대가 작성한 보고서 일체를 찾을 수 없으니, DIA와 태평양사령부에 정보공개를 요청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 후 두 기관에 정보 요청을 했지만, DIA의 확답은 받지 못했고, 태평양사령부는 그런 기록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만 받아 놓은 상태였다.

    필자에게 보낸 DIA 회신

    속된 말로 “한 방”이 없으니, 기사를 써 달라고 기자들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급하게 쓴 글이 5월 16일에 실린 “미 ‘육군 정보요원’ 김용장이 답해야 할 의문들이였다. 그야말로 의문만 제기한 글이었다. 여하튼 기고문 탓인지 모르겠지만,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김용장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김용장은 유족 바로 뒷자리, 둘째 열에 앉아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오마이뉴스가 찍은 사진 속에 유족과 악수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한 줄 뒤에서 바라보는 김용장과 허장환 모습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첫 기고문이 경향 누리집에 올라가자마자, 링크를 A에게 보내줬다. 내가 살고 있는 뉴욕의 새벽 4시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내게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쌍욕 사이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은 왜 제임스 영이 김용장을 모르겠다고 한 사실을 기고문에 썼냐는 것이었다. 스스로는 나를 믿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말을 퍼뜨렸냐는 투였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그에게 확인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욕설을 중단하라고 말했다. A는 또 다시 한 차례 욕설을 퍼붓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 후, 한 시간도 안 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허위사실 유포를 이유로 기고문을 내려 달라는 항의를 해왔다는 소식이 카카오톡으로 날아왔다. 이유 중 하나, 김용장이 미 문화원 원장 제임스 밀러(James Miller)와 교류하는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한바탕 욕설을 듣고 읽는 문자라서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미 문화원 원장과 교류한 “미군 MIS 김용장”은 문화원이 국무부 소속인 것을 몰랐다는 건가? 김용장은 당시 국무성 직원이 광주에는 없다고 말해오지 않았나? 미군 MIS라는 자가, 가장 신뢰도 최고라는 방송사의 탐사보도 팀이, 명망 있는 5.18 연구자가 미국 문화원의 임무 중에 하나가 지역 정보 수집해 국무성 정보 기능에 보고하는 것이라는 것도 몰랐다는 건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짜증나는 항의였다. 차라리 이 문제는 김용장 스스로가 답하는 게 좋겠다. 5월 13일 국회기자회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0년 미국은 두 개의 채널로 정보를 수집했다. 하나는 미 국무성이고, 다른 하나는 미 국방성이었다. 1980년 5월 당시, 국무성 직원이나 CIA 요원은 광주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몇 차례의 전화통화

    A의 새벽 욕설과 JTBC의 어쭙잖은 항의의 이유는 5월 17일에 방영된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 날 방영분은 교묘한 자막과 나레이션만 보자면, 제임스 영이 김용장을 안다고 했는지 모른다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DIA 한국 책임자 제임스 영은 광주에서 근무하는 김용장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가 보고했다고 주장하는 충격적 증언들 중 하나 쯤은 보고서에서 읽었다면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5월 17일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방영분은 제임스 영이 김용장이 썼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는지, 그가 김용장의 주장의 사실 여부를 취재진에게 확인해 줬는지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제임스 영은 사실상, MIS 김용장의 존재를 줄곧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광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501정보단-INSCOM-DIA를 잇는 공식 채널이 아닌, 광주 출신 한국 장교로부터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의 중요한 발언은 임의적 번역자막 속에서 왜곡됐다. 제임스 영에 따르면, 대사관도 항쟁 당시에는 단편적 보고(snippet)만을 받았으며, 당시 501정보단이 기지 내에서 머물고 있었다고 말했다. 광주공군 기지가 외부출입이 금지된 상태(lockdown)였다는 것이다. 항쟁 기간 중, 광주기지 미군과 군속들의 외부출입을 금지한 것은, 당시 공군기지 책임자 로버트 커스터(Robert Custer)가 2년 전 나와 전화 통화에서 확인해준 몇 가지 사실 중의 하나였고, 80년 당시 외신보도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상태에서도 501정보요원 정도라면, 더욱 열심히 외부에 나가 시위 상황들을 정찰,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제임스 영은 당시 501 광주 파견대가 현장보고(spot report)를 보냈다고 말했다. 현장보고와 정보/정찰보고는 다른 개념으로 서로 혼용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미군 매뉴얼은 명기하고 있다. 현장보고는 작전이나 부대 운용에 영향을 끼친 일이 발생하면 하는 보고이고, 정보보고는 그야말로 정보 활동에 의거해 작성하는 보고이다. 김용장 또한, 그가 실제로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은 광주 기지에 머물렀다던 편의대 외에는 없었다. 헬기 사격부터 5월 21일 전두환 광주방문까지 그의 모든 증언은 그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한국인 정보원들이 전해준 정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의외의 수확은 있었다. 김용장이 민간군속으로서 받은 표창장이 잠시 화면에 비쳤고, 그 표창장은 김용장이 MIS가 아닌, 3개 통역직의 하나인 랭귀지 스페셜리스트(language specialist)라고 적시하고 있었다. 표창장을 수여한 501정보여단의 사령관 이름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용장의 은퇴 직전, 직책과 최고상관을 알았으니, INSCOM에게는 김용장의 고용 여부를 그리고 은퇴한 사령관인 웨인 홀(Wayne Hall)과 INSCOM 모두에게는 현지 고용 통역이 MIS가 될 수 있는 여부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정리하면, 501정보단에 초급 민간 통역직인 I/T로 1974년에 취업한 김용장이 1980년 MIS가 되기 위해서는, 불과 6년 동안, 미국시민권을 취득하고, 정보와 언어 사이의 보직을 겸하거나 옮겨 다니며, 초특급 진급을 거듭하며, 계약직 군속이 아닌 정식 민간인 직원이 되어야 한다. 그 실현 가능성이 가히 초인적으로 희박하더라도, 나는 확인해야 했다.

    우선 INSCOM에 김용장의 고용기록을 묻는 정보공개 요청을 보냈다. 사실, FOIA 중 가장 빈번한 종류가 민간인이 전직 정보요원의 고용기록을 묻는 것이다. 사기와 이력 과장 같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미국 정보기관은 적어도 퇴직 후 일정 기간이 지난 직원들의 고용 여부만은 확인해 주고 있다. 물론 정식직원에게만 해당되는 제도이다.

    예상대로, INSCOM은 신속히 답변을 보내왔다. 5월 20일 서신에서 김용장의 고용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밝혔다. 결국 김용장은 현지 고용 군속에 불과했던 것이다. INSCOM 공보국에 80년 당시, 정보-언어 사이의 보직 이동이나 겸직이 가능한지, 민간인 군속이 MIS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공식입장만 들으면 됐다. 그 내용을 정리하여 공보국에 이메일로 보냈다.

    그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예상치 못한 전화 한 통이 왔다. INSCOM 정보공개 디렉터 마이클 히튼(Michael Heaton)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며, 비보도를 전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을 했다. 서로 하고픈 질문을 했고, 각자 할 수 있는 대답만 했다. 통화 말미에, 공보국이 내가 보낸 문의에 신속히 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히튼은 모든 INSCOM의 언론 발표는 정보공개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며, 되도록 빨리 처리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은퇴 후, 정보관련 서적을 몇 권 집필한 웨인 홀 사령관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를 해 취재 이유를 설명하고, 질문을 이메일로 보내겠으니, 답변해 달라고 부탁했다. 80-90년대 거쳐 팽창을 거듭한 501정보단은 정보여단이 됐고, 주변 정보 연대를 포함한 수천명의 인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김용장을 기억할 가능성은 없었다. 이메일 답변이 오지 않아, 전화를 다시 걸었다. 역시 그는 스스로 준 표창장조차 기억할 수 없다고 말했다. 501여단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당신 부하들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일반적 질문만 대답해 달라’라고 읍소하며, 랭귀지 스페셜리스트와 MIS 보직 이동과 가능성을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입을 열어, ‘두 보직의 차이를 잠시 설명하다, 곧 멈췄다. 말해서는 자신에게 득이 될게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보직 이동과 겸직이 가능한가? 그것만 확인해 달라”라고 재차 물었다. 그는 픽 웃으며, “이미 설명했다. 이런 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INSCOM 공보국에서 언어 통역과 군사정보는 분야와 보직이 다를 뿐만 아니라,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다. 그들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는 답변이 왔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취합한 사실과 답변은 확실했지만, 한국의 헤드라인을 석 달 동안 장악한 김용장 가짜뉴스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결국 김용장만이 모든 것을 확인해 줄 수 있었다. 어렵사리 김용장의 전화번호를 구해, 5월 31일 그와 통화했다.

    통화에서 김용장은 미국 국적을 한 번도 취득한 적이 없고, 90년대 말 이민 간 뉴질랜드에서 그 곳 국적을 취득한 것과, 민간인 군속으로 광주 기지에서 계속 근무했다고 밝혔다. 김용장이 민간인 직원이었다면, 퇴직 후 평생 연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전화 통화에서 그는 계약직 군속답게 일시불 퇴직금을 받았고, 연금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 줬다.

    김용장에게 DIA의 <정보보고서 교본>을 기반으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대답 대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사무실코드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INSCOM에서 언어/정보 사이의 보직 이동/진급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는 말을 하자, 김용장은 501 부대가 필요에 따라, 통역(I/T), 언어전문가(linguist), 또는 군사정보관(MIS)이라는 명칭을 번갈아 쓸 수 있게 해줬다고 말했다. 김용장은 같은 답변을 한겨레의 6월 5일자 인터뷰에서 반복한다.

    기실, 김용장의 위의 답변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가 상관의 지시로 영외 정보를 수집할 때, 다양한 직책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01정보단 내부에서는 언어-정보 직책으로는 이동이 불가한 것이다.

    결국, 80년 5월 당시, 501 정보단에 입단한 지 6년 만에 국적을 갈아타고, 진급을 계속하며, 직책을 가로질러 MIS 자리를 꿰찬 한국인은 없었다. 김용장은 언제나 민간 군속 통역이었다. 실제로, 김용장의 표창장에 따르면, 그는 언어직의 민간인 최고직인 랭귀지 스페셜리스트에 1995년에 임명됐고, 이듬해에 은퇴했다.

    두 번째 기고문 그 이후

    김용장의 발언까지 확보하자, 6월 2일자 경향신문의 두 번째 기고문을 첫 문장을 김용장이 MIS가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쓸 수 있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글을 읽었으나, 첫 기고문과는 달리,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별 다른 반응 없이 침묵했다. 김용장을 초청한 단체도, 불러온 국회의원도 모두 해명이나 사과는 없었다. 그렇다고 김용장을 적극적으로 감싸 돌지도 않았다.

    격렬한 반응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국회 앞에서 5.18 왜곡 처벌을 요구하며 농성하는 5.18 역사왜곡 처벌농성단이 경향신문에 줄기차게 항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농성단 대변인인 김용만은 2017년, 미국인 교수 조지 카치아피카스와 내가 광주의 한 인터넷신문에서 벌린 논쟁 중, 카치아피카스의 글만 페북에서 인용하며, 나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내 글에 어떠한 반론도 받겠으나, 카치아피카스의 허위 주장에 대한 나의 반론도 공정히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김용만의 반론이 6월 9일자 경향신문에 실렸다. 제목은 “설갑수는 5.18에 대해 전두환과 미국의 대변인을 하려는가” 내게 모욕을 줄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역시, 나의 부탁과는 달리, 카치아피카스에 대한 나의 반론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또한 김용장을 군사정보관이라고 부르지 않고 “501정보여단” 소속이라고만 표현했다. 김용만에게 다시 전화를 해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어차피 의견 글이므로, 사실만을 쓸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김용만에게 그의 글에서 김용장을 MIS로 지칭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그가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용만은 그것을 자기 실력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다소 어이없는 답변에 껄껄 웃으며 전화를 끊었지만, 속상했다. 김용장 소동의 최대 피해자는 농성단과 같은 5.18 유가족과 희생자들이다. 나는 안다 그들이 밝히지 못한 5.18의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얼마나 갈구하는지. 갑자기 모든 의문을 한꺼번에 답한 꿈같은 증인 김용장이 홀연히 나타났을 때 그들이 느꼈던 기대를. 그리고 이해한다 그 희망을 파괴하려는 듯한 사람에게 그들이 느낄 분노를. 그러나 진상규명에 거짓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와 카치아피카스의 실랑이야 검색하면 모두 드러나니,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김용만 글에서 두 가지 오류는 지적해야겠다. 먼저 그의 주장과는 달리, 항쟁 내내 외국인 소개계획은 없었다. 소개(疏開)라 함은 공권력에 의한 강제적 철수이다. 일정지역에 소개 계획이 시행되면, 공권력의 명령과 도움으로 민간인은 무조건 그 지역을 떠나야 한다. 외국인의 강제적 철수는 광주항쟁 10일 동안, 미국 정부이건 한국 계엄군이건 실행된 적이 없다. 또한, 김용만은 김용장이 쓴 보고서를 그의 상관이 자신의 고유코드로 전송한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민간인 수하의 보고서를 상관의 전용코드로 전송하도록 허용하는 정보기관은 적어도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장 어이없는 반응은 여전히 A의 몫이었다. 나는 김용장 오보를 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책임을 져야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언론비평사이트 <미디어 오늘>의 한 기자에게 추가 취재를 부탁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에게 신속하게 답장이 왔다. A가 INSCOM 80년 연례보고서를 인용하며, 민간인 전임자 둘 중의 하나가 김용장일 거라는 주장을 확인했고, 자신을 그 말을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까지 가서 무관 제임스 영이 김용장을 모른다고 확인한 A가 내가 준 자료를 가지고, 서로가 동의한 부분을 그렇게 왜곡한 것이다. 그 이메일을 끝으로, <미디어 오늘> 기자는 나와 연락을 단절해 버렸다.

    그렇게 주장했던 A는 정작 5월 18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제임스 영 무관이 김용장을 모른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또한 JTBC에게 그 부분에 대한 수정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정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료까지 왜곡 인용하며 JTBC<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와 협조했고, 옹호했던 A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거리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두 차례의 기고문 이후, 한겨레의 6월 5일자 기사, 그리고 8월 박건식 PD의 기고문은 김용장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나의 취재 결과를 뒷받침해줬다. 정작,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와 취재를 도운 5.18 연구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8월,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김용장을 증언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5.18 기념재단의 5.18언론상을 수상했고, 그 5.18 연구자는 5.18 진상규명특별법에 의거 금년 말까지 구성될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실무 연구를 맡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그가 간여할 5.18 국가 공식보고서는 3년 후에 나온다.

    사람은 실수를 하고, 언론은 오보를 한다. 그러나 실수가 의도된 것이라면, 오보가 기획된 것이라면 책임져야 할 잘못인 것이다. 그 잘못이 한 나라의 현대사 중 가장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하는 일이라면, 그 책임은 중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사과와 해명이 없다면,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시사프로그램으로서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이와 연관한 5.18 연구자는 광주항쟁의 모든 공식적 연구에서 영원히 배제되어야 한다. 그들의 용단을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필자소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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