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의 개화와
    항일독립운동 이끈 수원종로교회
    [그림 한국교회] 창립 120년, 임면수 권사 기억해야
        2019년 11월 29일 01: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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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대림절(대강절, 강림절)이 다가왔습니다(올해는 12월 1일). ‘오다’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한 대림절(待臨節, Advent)은 성탄 전 4주간으로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절기로서,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창조절이란 교회력의 출발이니 교회적으로는 새해가 시작됩니다. 세상은 한 해를 마감할 때, 교회는 한 달 먼저 새해를 시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를 세상에 펼쳐 희망을 만들라는 뜻이 아닐까요?

    대림절에 온 교회가 항상 주목하는 인물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가복음 1:2-6)

    당시 예수보다 인기가 많았던 요한이 오로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려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조연을 자처하며 행동한 기록입니다. 그러니 대림절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도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경기도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임면수 권사를 대림절에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임 선생은 민족해방과 민중교육을 위해 재산을 다 포기하며 전적으로 헌신한 까닭입니다.

    1874년 수원 매향리에서 출생한 임면수 권사는 신문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상경하여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이듬해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상동교회의 ‘엡워스(Epworth) 청년회’에서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다가 전덕기 목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수원종로교회에 엡워스 청년회를 세우고, 과수원과 토지를 희사하여 수원에서 현대식 교육을 처음 도입한 삼일학당(현 삼일학교)을 건립하여 교감과 교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고, 항일운동단체인 신민회의 경기도 책임자를 지내다, 경술국치 이듬해 전 재산을 삼일학당에 기부하고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의 재정 조달을 위해 일했고, 1911년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며, 부인 전현석 여사와 함께 독립운동 기지로서 운영한 객주는 독립군의 중계연락소와 무기보관소 역할을 하였습니다. 부인 전 여사는 독립군 식사를 위해 하루 저녁 5-6끼의 밥을 지었으며, 당시 독립군으로서 전 여사의 밥을 안 먹어 본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장남도 만주에서 20여세에 독립투쟁에 가담하였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그도 1921년 밀정의 고발로 체포되어, 수감 중 고문으로 전신이 마비되면서 병보석으로 1년 만에 출옥합니다. 다시 수원으로 돌아와서 삼일학교를 운영했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나서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합니다. 2015년 수원지역 인사들이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당시 경기도 지역의 치열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토대는 수원종로교회였습니다. 수원에 전파된 기독교는 봉건사회에서 양반과 왕권에 의해 억눌렸던 농민과 상인, 천민과 여성들에게 인권과 자유, 평등의 사상을 심었고, 민중의 개화와 교육, 의료를 통해 가난과 무지를 깨우쳤고 독립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3.1혁명의 민족대표 33인의 최성모 목사, 민족대표 48인의 김세환 권사, 매일학교를 세웠고 평양을 중심으로 목회하고 진남포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룬 이하영 목사가 수원종로교회 출신인데, 임면수 권사도 이런 애국적인 신앙의 흐름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이근복

    자욱했던 안개가 걷혀 단풍이 아름답게 빛나던 가을날에 찾아간 수원종로교회는 화성행궁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수원화성의 화성행궁은 평소에는 수원부 관아로 쓰이다가 수원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대왕이 행차하면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세계문화유산답게 건물들은 우아하였고, 그룹으로 방문한 학생들과 은퇴한 분들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행궁 뒤 산에 올라 ‘미로한정’에 앉아 보니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았고 수원종로교회도 잘 보였습니다. 좀 내려가서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와 홍살문을 배경으로 교회사진을 찍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옛 숨결을 느껴보고자 했지만, 출입문이 다 잠겨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교회건물이 초라했고,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었고, 밖에 내놓은 주보는 4주전 것이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수원은 정조대왕이 유교를 바탕으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 도시인 까닭에, 어느 지역보다 복음 전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은 미감리회 스웨어러(W.C. Swearer) 선교사가 몇 차례 선교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였으나, 1899년 4월, 스크랜턴(W.B.Scranton) 선교사가 파송한 감리교인 서너 명이 수원 읍내로 이사와 정착하면서 신앙공동체로 형성되었습니다. 1901년 12월 인천 내리교회의 전도인 이명숙 권사가 오면서 신앙공동체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초가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이듬해 2월 남자 3명, 여자 4명을 등록시키면서 수원종로교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습니다.

    2년 만에 크게 성장하자 남녀 매일학교를 설치되어 운영하였는데, 이 학교가 근대 수원 교육의 효시가 된 삼일여학교(현 매향여학교)와 삼일남학교로 발전하여 청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서울 이남지역 선교에 산파역할을 한 수원종로교회는 올해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였고, 최근 2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강성률 목사는 “민족과 함께하는 수원종로교회”를 기치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척박한 시대에 수원의 빛이었던 수원종로교회가 대림절의 뜻을 새겨 비우고 진리와 구원, 생명과 평화의 예수의 길을 닦아간다면, 120년을 넘어 알찬 역사를 열어갈 것입니다.

    며칠 전 목회자 기독교고전읽기 모임에서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발제한 강치원 목사는 웨슬리의 이 말로 결론을 삼고 언급했습니다. 대림절에 새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총을 입었을 때 우리는 골방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으로 물러나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께 돌려드리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나 자신의 무(nothingness)로 다시 돌아갑니다. 마치 공허하고 어두운 공기가 태양의 빛으로 충만해질 수 있듯이, 당신에 의하여 그리고 당신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공허함 외에 무엇이 천지간에 당신 앞에 가장 완전한 피조물이겠습니까?’”(130-131쪽)

    “쌓아놓음이 아니라 비움에서 완전을 보는 웨슬리, 무에서 완전의 충만을 보는 웨슬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가 느껴진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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