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등도 잘한 거야"
    좌절하고 힘겨워하는 이들에 격려를
    [왼쪽에서 본 F1] e스포츠, 미나르디와 윌리암스
        2019년 11월 28일 11: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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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칼럼을 작성하면서 특별히 F1도 정치도 아닌 e스포츠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2019년 11월은 한국의 e스포츠 팬들에게 유난히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국내 e스포츠 팬의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2019 월드 챔피언십에서 2년 연속 한국 팀의 결승 진출이 좌절됐고, 3년 연속 전 경기 승리로 무패 우승을 차지했던 오버워치 월드컵에서는 세 차례나 패배하며 처음으로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선수들은 물론 더 좋은 성적을 기대했던 팬들은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하기는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둔 선수들에게 적지 않은 e스포츠 팬들이 도를 넘은 비난을 하는 것은 아쉽습니다. 선수들이 일부러 나쁜 성적을 거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경쟁하는데 ‘당연한 우승’을 바라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경기력 문제를 지적하고 이런저런 논쟁이 펼쳐지는 것은 환영하지만, 절대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에 신경이 쓰입니다.

    물론 e스포츠를 포함해 스포츠와 대회, 챔피언십, 경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벤트에서는 누가 1등을 하는지에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아이의 학교 운동회에서도 1등이 누구인지를 정하고 두 팀이 붙어도 승자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승부를 펼치고, 승자를 가리고, 여러 명이 레이스를 펼쳐서 1등을 위해 경쟁해야 재밌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과 가위바위보 한 번을 해도 일단 이기려고 하는 것이어야 재밌으니까요.

    단순히 재미를 위해, 서로 웃으면서 승자의 손을 들어주고 1등을 축하할 수 있는 경쟁이라면 누구도 뭐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스포츠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선을 넘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을 넘는 것이 꼭 스포츠에서만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커집니다.

    많은 팬들의 사람을 받았지만 21년 동안 F1 하위권을 맴돌았던 미나르디

    금메달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인지 필자와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때면 종종 이런 질문을 듣습니다.

    “저 팀은 1등을 못 할 게 뻔한데 왜 계속 나오는 건가요?”

    올림픽 TV 중계에서 한국 선수가 메달을 딸 것 같은 종목으로만 화면을 넘기는 것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당연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문인지 필자가 F1 그랑프리의 TV 생중계 해설에서 했던 얘기 중 가장 많은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던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였습니다.

    “선수들은 단 한 명이라도 앞지르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순위로 레이스를 마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7위는 6위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13위는 12위를 바짝 뒤쫓습니다. 우승컵을 드는 것도 중요하고, 3위 안에 들어 시상대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가능한 최고의 성적을 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세상의 지배자가 아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생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부익부 빈익빈이 심각한 F1에서도 간혹 신데렐라와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1985년 F1에 출전하기 시작한 미나르디라는 팀은 2005시즌까지 모두 21시즌 동안 F1 그랑프리에 출전했지만, 단 한 번도 우승이나 시상대에 오른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챔피언십에 기록을 남기는 포인트 피니시도 단 21회에 불과합니다. 포인트 피니시가 가능한 순위의 경기를 평균 한 시즌에 한 번꼴로 기록한 셈이고 그중 열 시즌은 단 1포인트도 얻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만년 하위 팀이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르디는 장래가 촉망받는 많은 유능한 드라이버를 발굴해 F1 그랑프리 출전 기회를 주었고, 미나르디를 사랑한 이태리의 팬들은 재정 위기에 처했을 때 돈을 모아 팀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만년 하위 팀에 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미나르디는 2006년 레드불에 인수되어 토로로쏘로 이름을 바꿨고, 2년 뒤 토로로쏘는 F1 관계자와 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을 터뜨립니다.

    2007년부터 최하위권을 벗어나 하위권에 종종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토로로쏘는 2008 이태리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낸 세바스찬 베텔이 폴 포지션을 차지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베텔은 빗속에서 펼쳐진 레이스에서 끝내 우승을 차지하며 이태리 팀이 20년 넘게 밟아보지 못했던 시상대의 맨 윗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전문가도 예상하기 힘든 F1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만년 하위 팀 미나르디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토로로쏘가 한 번이라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다시 벌어지리라 기대하기 힘든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텔의 우승이 토로로쏘의 팬이나 과거 미나르디의 팬, 혹은 일반 F1 팬에게 더 특별하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신데렐라 스토리와 어려움을 겪고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을 맺은 것이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1등을 했다거나 결국은 승리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늘 패배해야만 의미가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쨌든 서열만이 의미 있다는 뉘앙스가 담기는 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며 2019시즌 최악의 성적을 거둔 윌리암스

    미나르디에서 토로로쏘로 이어지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반대쪽에는 훨씬 더 많은 팬을 거느린 윌리암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윌리암스는 1970년대 말 F1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해 1980년대와 1990년대 아홉 차례 컨스트럭터 챔피언(팀 챔피언) 타이틀과 일곱 차례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최고의 팀 중 하나입니다. 새로운 도전과 신기술이 높게 평가받는 F1에서 1980년대 이후 기술적으로 가장 혁신적이었던 윌리암스는 최고의 인기 팀이 되었고, 인기를 뛰어넘는 성적을 거두며 전통의 강팀 페라리, 맥라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조금씩 주춤하던 윌리암스의 전력은 2010년대 들어 급격히 추락했고, 2010년대 후반에는 최하위권 팀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2019시즌은 그 중 최악의 성적을 거둔 시즌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단 한 차례의 포인트 피니시로 1포인트를 획득하는데 그친 것은 윌리암스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입니다. 특히 그랑프리마다 다른 아홉 개 경쟁 팀이 비슷한 속도로 경쟁할 때 혼자 1초에서 1.5초가량 느린 랩 타임을 기록하며 뒤로 쳐지는 모습은 과거 최강의 팀으로 군림하던 윌리암스를 사랑했던 팬들에게는 너무 가슴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최근에 유입되어 오래전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F1 팬들로부터 다소 공격적인 질문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저 팀은 도대체 왜 F1에 출전하나요? 맨날 꼴찌인데 창피하지 않나요? 저 차는 왜 저렇게 느린가요? 이런 굴욕적인 질문에 답을 하는 동안 과거의 얘기가 나오면 흠칫 놀라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윌리암스의 몰락은 이례적이고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윌리암스는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윌리암스 F1 팀의 경쟁력을 어떻게든 회복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사람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서있는 다른 경쟁자들이 멈추지 않고 투자를 계속하고 있어 따라가는 쪽이 더 힘든 상황이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매 세션 19위와 20위에 머물러 10위 이상의 상위권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타임 시트에서 이름을 찾기 어려워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경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등만을 응원하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팬이라면 윌리암스의 팬으로 남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재 상황은 물론이고 가까운 미래에 크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바꿔서 얘기하면 지금 윌리암스를 응원하는 팬 중에는 과거의 영광에 취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순위와 서열에 모든 의미를 두기보다 혁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응원하는 팬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 스트리밍에서 댓글 창 등을 통해 자주 보고 듣게 되는 표현 중에 ‘2등도 잘한 거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바람직해 보이지만, 사람들이 저 표현을 사용할 때 담긴 뉘앙스가 꼭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1등을 못 했다고 비꼬는 의미를 담아 2등도 잘했다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종종 8등도 잘한 거야, 꼴찌도 잘한 거야와 같은 좋은 의미로 사용될만한 표현이 안 좋게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래 표현 그대로의 의미를 담은 ‘2등도 잘한 거야.’라는 표현은 그 의미대로 많이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2등뿐 아니라 12등도 잘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순위와 서열만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당장의 성과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현재의 모습이 비루해 보여도 서로 응원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 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스무 명이 참가하는 F1 그랑프리의 레이스에서 과거의 미나르디처럼, 2019시즌의 윌리암스처럼 20위에 머물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드라이버에게 ‘20위도 잘한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마치 현실에 좌절하고 힘겨워하는 내 옆자리의 사람을 격려하는 것처럼 말이죠.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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