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격려광고들, 지상(紙上) 촛불시위
    [역사의 한 페이지]1974~75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2019년 11월 27일 09: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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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실력 있는 화공(畫工)이 있었다. 그는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성주(城主)의 요청을 받고, 보이는 그대로의 성주의 모습을 그려 바쳤다. 그 화공이 그린 성주의 초상화는 이랬다.

    “칼만 가까이해도 쫙 벌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살이 쪄 오른 볼, 살에 밀려 거의 닫힐 위기에 몰려 있는 가느다란 눈, 뚱뚱한 몸집의 체면을 손상하기에 제격인 채신머리없이 달라붙은 염소수염, 몸집을 닮아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세상 넓은 줄만 아는 펑퍼짐하게 퍼져버린 코, 그 장대한 육신을 먹여 살리기에 안성맞춤인 두껍고도 큰 입, 어느 부분이든 실물과 꼭 같지 않은 데가 없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발산하고 있는 분위기는 여지없이 생생히 살아 있는 성주 그대로였다. 흡사 무더기 위처럼 어디선가 꾸역꾸역 괴어오르는 심술이라든가, 땀 냄새처럼 끈적끈적하게 묻어나는 것 같은 탐욕스러움은 영락없이 살아 움직이는 성주였다.”

    그림을 보고 화가 난 성주는 정직한 화공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실력 있는 다른 화공을 불러 자신의 초상화를 다시 그리게 했다. 이 화공의 그림에 대해 주변 신하들은 칭찬 일색이었다. 성주는 그 화공에게 후한 상금을 내렸다. 그가 그린 그림은 이랬다.

    “족자에 그려진 얼굴은 얼핏 보아서는 생판 딴사람이었다. 우선 삐져나오도록 살이 찌지 않은 게 그랬다. 그리고 눈도 서글서글했고, 입술도 미련스럽게 투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심술이나 탐욕스러움 대신 미풍 같은 미소가 번져나는 속에 한없이 인자하고 후덕한 기운을 훈훈하게 풍기고 있었다. 흡사 부처님이 의관 정제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지경이었다.”

    이 이야기는 조정래의 단편 소설 『어떤 솔거의 죽음』을 요약한 것이다. 197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얼핏 보면 화가와 그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민주주의의 암흑기였던 1970년대 유신시대 언론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은 언론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정권의 나팔수로 정권의 치적을 찬양해 주기만을 원했다. 언론 자유를 주장하고, 정부를 비판했던 언론들은 어김없이 보복과 탄압을 면치 못했다. 성주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그렸다가 죽음을 당했던 어느 화공의 이야기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1970년대 당시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번 글은 유신 시대의 신문과 언론에 대한 것이다.

    신문을 수집하는 컬렉터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5년 이맘 때 동아일보 6개월 치를 수집한 일이 있다.

    신문을 구독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한다고?

    옛 신문을 수집한다는 일이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인터넷 경매에 옛 신문이 나오는 경우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보통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한성순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아주 오래 전의 신문으로, 신문 자체가 희소하기 때문에 수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보도한 신문들이다. 예를 들면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인천상륙작전, 남북정상의 판문점 정상회담 등을 보도한 신문은 그 보도한 사건이 워낙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수집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일정 기간의 신문이 통째로 경매로 올라오는 경우도 가끔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수집가들 중에는 신문을 매일 매일 수집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중요한 사건을 보도한 ‘호외’만을 따로 수집하는 이들은 종종 봤지만, 매일 매일의 신문을 수집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양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개인 수집가들은 수집을 할 때 수집품을 보관할 공간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신문의 특성상 워낙 많은 양이 인쇄·배포되어 희소성도 떨어지므로 매일 매일 신문을 모으는 것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가성비’가 많이 떨어지는 일임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그 연유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2015년 11월 즈음 인터넷 경매에 누군가가 동아일보 몇 년 치를 올려놓았다. 1970년대 중반의 신문들로 한 달 단위로 묶은 것이었다. 주저 없이 1974년 12월부터 1975년 5월까지 총 6개월 치를 낙찰 받았다. 한 달 치 가격은 15000원이었으므로 9만원을 주고 40년 전 신문 6개월 치를 한번에 ‘구독’해 버린 셈이다. 필자에게도 6개월 치 신문 분량은 다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1974년 12월부터 1975년 5월까지의 특정 시기를 한정해서 동아일보를 수집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74년 12월부터 1975년 5월까지 대략 6개월 동안 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독특한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유신 체제하의 민주화운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매우 인상적이고 강렬한 운동이었다. 언론 자유를 위한 국민들의 ‘지상(紙上) 촛불 시위’로 비유하면 비교적 정확하겠다. 필자는 그 시기 매일 매일의 동아일보 지면의 광고를 통해 당대 민초들의 생생한 저항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진] 1974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하단에 3면에 걸쳐 백지광고를 실었다. (동아일보사)

    백지의 힘

    어떤 권력이든 찬양과 순종을 즐기는 반면 비판은 싫어한다. 유신시대 박정희 정부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미화와 찬양을 하는 언론은 보호와 혜택을 받았지만, 권력을 비판하고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통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기사 제목의 단어 하나하나도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다. 예를 들어 ‘연탄 값 인상’이라는 제목도 서민들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연탄 값 현실화’로 바꿔 내게 하는 식이었다.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드디어 이 권위와 통제에 맞서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동아일보를 불태우며 규탄한 시위를 벌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이야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으로 불리면서 보수를 대변하는 언론으로 그 존재감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그 시기 동아일보는 가장 신뢰받는 언론이었다. 이에 자괴감을 느낀 동아일보 기자들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제에 맞서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 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실천에 모든 노력에 다할 것을 선언”하였다.

    [사진] 1974년 10월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모습 (동아일보사)

    이에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동아일보 탄압에 나섰다. 동아일보의 돈줄을 죄는 방법, 즉 동아일보의 주요 광고주들을 협박하여 신문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12월 20일 한일약품이 갑자기 광고 계약을 해지하고, 광고 인쇄 동판을 회수해가는 것을 시작으로 대한생명보험, 럭키그룹 등 대기업들이 예약된 광고를 줄줄이 취소함으로써 25일 이후에는 큰 광고가 1건도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당시 광고 계약을 해지한 기업들이 내세운 명목상의 이유는 한결같이 ‘회사 사정’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유를 묻지 말아 달라’거나 ‘해약에 따른 금전적 불이익은 모두 감수할 테니 절대 우리 광고를 싣지 말아 달라’고 동아일보 측에 하소연하였다. 기업들은 정부에 미운 털이 박히기를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자체 광고로 버티던 동아일보는 결국 12월 26일 처음으로 광고해약 사태에 대한 우려의 기사와 함께 세 면의 하단 광고를 백지 상태로 내보내게 된다. 백지 광고는 계약된 광고가 취소됨에 따라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취소된 그 공간을 기사를 채우지 않고 백지 광고를 그대로 낸 것은 신문사 나름의 저항이기도 하였다. ‘백지 광고’라는 그 시각적 충격으로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격려광고 운동’이 곧 시작될 참이었다.

    그것은 ‘백지’가 보여준 힘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때로는 많은 말보다 차라리 침묵이 더 무서운 저항이 될 때가 있다. 침묵시위가 전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빽빽이 글을 채운 열 장의 대자보보다 단 한 장의 백지가 더 강한 울림을 주기도 한다. 다음 사건을 보자. 유신시대였던 1970년대 백지의 위력을 보여준 흥미로운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백지 광고와 함께 70년대 백지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일 것이다.

    1977년 상반기는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기 어려울 만큼 정국이 얼어붙어 있었다. 4월 19일에 일어난 연세대의 이른바 ‘백지 팸플릿’ 사건이 그런 사정을 잘 말해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내용은 간단하다. 4.19를 맞아 연세대 몇몇 학생들이 그냥 백지를 돌렸을 뿐이다. 굳이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할 수 있을 만큼 박 정권의 광기는 극을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백지 성명서는 각자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백지를 돌린 지 채 1분도 안 되어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에선 그 흰 백지에 뭐가 들었나 싶어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백지를 마이크로필름 쯤으로 아는 그 멍청이들의 눈에 그런다고 뭐가 보일 리가 있을까. 죄목은 씌워야겠고, 찾아낸 물증은 없고, 궁지에 몰린 멍청이들이 생각해낸 죄목은 참으로 기발하다. 이름하여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 결국 이 해괴 망칙한 죄목에 걸린 4명 중 김철기 씨는 제적되고 나머지는 정학을 맞았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중

    1970년대 유신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고, 펜이 있어도 제대로 쓸 수가 없는 시대. 백지 한 장이 저항이 되는 시대였다. 동아일보의 백지 광고가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 격려 광고로 동아를 응원하다

    정부의 광고 탄압으로 동아일보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1970년대 당시 언론사의 광고 수입이 전체 신문사 수입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동아일보는 1974년 12월 30일자 1면 광고란에 광고국장의 이름으로 격려광고를 모집하는 광고를 게재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 다음날인 1975년 1월 1일 ‘언론의 자유를 지키자’는 제목으로 1호 격려광고가 실린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한 시민’의 이름으로 실린 광고인데, 뒷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실은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던 바로 그 광고였다.

    [사진]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낸 광고로, 동아일보 격려 광고 1호로 기록되었다.

    언론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 없이는 인권도 사회정의도 학원과 종교의 자유도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국가안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자유는 민주국민의 혼이요, 모든 소망의 근원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 의무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동아일보의 백지광고란은 권력의 음모와 오만의 단적인 증거이며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활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위 김대중 광고의 내용)

    이후 동아일보에는 수많은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답지하였다.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내용,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 시국을 한탄하는 내용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짧고도 단호하게 “오! 자유” 세 자의 격려 광고를 실었다. 인천의 어떤 연탄장수는 “가난한 내가 동아의 곤경을 외면할 수 없어……”라고 적었다. ‘우국노인 최’는 당시의 시대상을 “꿀 먹은 벙어리세상.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놓은 세상. 날치기 세상”이라고 규정하였다.

    ‘평화시장 2층 文’이라고 밝힌 사람은 “요즘처럼 스스로가 저주스러울 때가 없다”라고 시국을 한탄하였다. 한 ‘익명의 광고인’은 당시 유행했던 구호 형식을 빌려 언론 자유를 외쳤다. “무찌르자! 공산당, 배격하자! 외래품, 수호하자! 언론자유”

    [사진] 1975년 동아일보에 실린 격려 광고들이다. 왼쪽 사진에는 ‘우국노인 최’의 이름으로 “꿀 먹은 벙어리세상.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놓은 세상. 날치기 세상”이라고 쓴 광고가 보이고, 오른쪽 사진에는 ‘인천에서 연탄장수’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내가 동아의 곤경을 외면할 수 없어……”라고 쓴 광고도 보인다.

    그리고 이어진 수없이 많은 민초들의 광고들.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백을 산다 – 밥집 아줌마”
    “점심을 먹지 않고 그 돈을 동아에 드린다 – 수영선수”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광고한다 –법대생”
    “나는 신사적인 한국인에게 감사한다 – 일본인 여행자 K”
    “이 작은 란이 도움이 된다면……. -결혼 비용을 절약한 신혼부부가”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 – 출판사 편집부 사원”

    이렇듯 당시 격려 광고는 ‘민주 탄환’이자 어둠을 밝히는 그 시대의 ‘촛불’이었으며, 그것들이 모인 광고란은 고스란히 그 시대의 광화문 촛불 광장이었다. 이러한 광고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어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낸 “투우사를 찾습니다”라는 광고였다.

    뜬금없이 웬 투우사?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상징 동물이 황소다. 그러므로 박정희 독재 정부와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빗대 황소와 맞설 투우사를 찾는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고1 학생의 풍자치고는 꽤나 놀랍지 않은가?

    [사진] 동아일보 격려 광고 중 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낸 “투우사를 찾습니다”는 내용의 광고가 오른쪽 위에 보인다.

    당시 정부는 이런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동아일보 격려광고 운동이 시작된 지 보름 정도 지난 후 일어난 ‘일 육군중위 광고사건’은 당시 권력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동아일보를 광고로 탄압하는 것도 모자라, 격려 광고에 대해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1975년 1월 14일 늦은 밤 육군 보안사에서 김인호 동아일보 광고국 국장, 이규영 광고 1부장, 이준범 광고부 사원 등 3명을 연행하였다. 이유는 이날 동아일보 5면에 실린 1단짜리 격려 광고에 하나 때문이었다. 아무 내용 없이 그냥 ‘一 陸軍 中尉’(일 육군 중위)’라고만 되어 있는 간단한 광고였다. 모든 군인이 정권을 지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와 군 당국은 현역 육군 장교가 동아일보를 후원하기 위해 성금을 냈다는 사실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안사는 연행한 신문사 광고국 관련자 3명에게 이 성금을 낸 육군 중위가 누군지를 강하게 추궁하였다. 그러나 광고국에서는 성금을 내는 사람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추궁을 한들 그 육군 중위가 누군지를 알아내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들이 계속 모른다고 하자, 보안사는 “그렇다면 광고를 낸 이가 군인이 아니라는 점만 진술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보안사에서 불러주는 대로 광고주가 현역 군인이 아니라는 내용의 진술서를 썼다.

    그 다음날 보안사는 육군 중위가 누군지를 알아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일 육군 중위’라는 격려 광고를 낸 의뢰인은 조사 결과 현역 군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군복 차림이 아닌 32∼35세 가량의 청년으로부터 광고 접수 사원이 1천원을 받고 신분을 확인하지 않은 채 게재한 것”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시민들의 격려 광고를 통한 저항이 확산되는 것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 격려 광고에 실린 ‘일 육군중위’ 광고로 보안사는 이 육군중위를 찾기 위해 동아일보 광고국 관련자 3명을 연행하여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격려광고는 1975년 5월까지 총 10352건이 실려 유신체제하의 언론 투쟁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의 뜨거운 성원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사주와 경영진은 매달 발생하는 1억원의 손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정부에 백기 투항!

    49명의 기자 해직, 84명의 기자에 대한 무기 정직 처분으로 몇 개월간의 광고해약 사태는 막을 내렸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결국 동아일보 기자들의 투쟁이었지 동아일보사와 사주의 투쟁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해직자가 중심이 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동아일보 측에 ‘동아일보 사주의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여기서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민주화의 추세 속에서 유신 시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문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1988년 2월까지 시민 27,223명이 낸 기금 50억 원을 자본금으로 하여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였다. 역사상 유례없는 국민주 방식의 신문사 창간이었다.

    촛불정부로 불리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언론의 자유는 이전보다 많이 향상되었다. 국경없는기자회(RSP)가 지난 4월 발표한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41위로 2016년 70위에서 3년 연속 상승했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다. 참고로 일본은 67위, 중국은 177위, 북한은 179위이다.

    한국은 노무현 정부이던 2006년 31위까지 올랐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2016년에 70위로 가파르게 떨어졌다. 그러다가 2016년에 63위, 2017년 43위를 거쳐 올해 41위로 상승한 것이다, 그 동안 YTN 해직 기자들이 다시 돌아왔고, 공정 방송을 위한 KBS와 MBC 기자들의 파업도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정부에 굴종하고, 블랙리스트를 등에 업고 편향보도에 앞장섰던 공영방송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진통을 겪는 요즘, 우리는 언론의 본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진실과 정의를 위해 보도해야 하는 언론, 그리고 언론이 자신의 나팔수가 돼주기를 바라는 권력. 비판은 고난과 핍박을 불러오지만, 굴종과 찬양은 당장의 달콤함을 선사한다. 늘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쉬우니, 참으로 무거운 이름이다. 언론!

    한편 정부의 언론 탄압과 통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언론 상황은 새로운 문제를 안고 있다. 가짜 뉴스로 대중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언론인들,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하지 않는 게으른 언론인들, 검찰이 흘려주는 피의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여 피의자의 최소한의 인권도 보호해주지 않는 무책임한 언론, 그래서 지금은 흔히 ‘기레기’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기자들.

    그들은 언론의 자유가 이만큼 신장된 지금 어떻게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할 것이며, 그들이 누리는 언론의 자유만큼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스스로 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수많은 격려광고와 촛불의 힘으로 쟁취한 언론 자유를 모욕하거나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사진] 왼쪽은 1975년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낸 이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보내준 기념 메달, 오른쪽은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국민 모금에 참여한 이에게 발급한 영수증이다.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는 언론 혼자의 노력으로만 만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 확대되어 왔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 자료 모두 박건호 소장)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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