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인가, 개혁인가?
    2006년 08월 16일 08: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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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중앙일보의 ‘박원순 변호사의 내 고장 희망찾기’는 아산 거산초등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거산초등학교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사로만 봐도 매우 훌륭한 시도인 듯 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런 학교에서 클 수 있기를….

그런데 결론이 이상하다.

   
▲ 중앙일보 8월 11일자에 실린 ‘박원순 변호사의 희망찾기’
 

“교사들이 한 곳에 5년만 있기로 돼 있어 곧 다른 학교로 떠나야 한다. 이들이 떠나면 거산초등학교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교원 인사, 교과 편성 등의 경직성을 풀어줘야 한다. 일반 학교에서도 일정한 교육목표를 달성하면 자율성을 확대해 나가고 허용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 그래서 농촌에서 도시로 간 아이들이 다시 농촌으로 밀려드는 날이 올 것을 꿈꿔 본다.”

거산초등학교와 같은 곳에 한시적인 예외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교원 인사와 교과 편성의 자율화’ 주장은 옳지 않다.

5년 재직 후에 학교를 옮기는 순환보직제는 교육에서의 도농 격차, 빈촌과 부촌의 격차를 줄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제도를 없애고 교원 인사를 자율화할 경우 유능한 교사들이 교육 환경 좋은 부자 동네로만 몰릴 것이 뻔하고, 도농과 빈부 간 교육 격차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또, 거산초등학교 교사들의 좋은 교육을 그곳에만 머물게 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교과 편성의 자율화 주장도 우려스럽다. 이는 보통교육·의무교육의 취지와 충돌할 수 있을 뿐더러, 입시교육에 악용될 것이 너무도 자명하다. 우수한 집단에 교과 편성의 자율권을 주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은 공교육 내용을 정하는 의사결정 과정을 사회화·민주화하는 것이다.

‘박원순의 희망’이, 교육 형평성에 반대하는 시장주의자들의 ‘자율화’ 주장과 같은 것은 우연일까? 나는 ‘박원순의 희망’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이 그런 주장으로 자연스레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박원순의 희망’이 소개한 사례는 ‘이탈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푸리에(Fourier)가 ‘가정적 농업적 생산자 협동조합’을 제창한 이후 200년 동안 수많은 실험과 도전이 있었음에도,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런 공동체들조차 지배적 사회와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다는 너무도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지배적 생산양식과 교류할 수밖에 없고, 그런 교류는 ‘이탈 공동체’의 대안적 생산양식을 지배적 생산양식으로 타락시킨다.

조금 더 복잡한 이유는 그런 소공동체들이 지배적 사회를 혁파하거나 개혁하려는 흐름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탈 공동체는 자신들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나 ‘자율’을 주장하게 된다. 이탈 공동체는 자신들의 우월함을 견지하기 위해 낙후된 사회 영역과의 ‘경쟁’을 선호한다. ‘박원순의 희망’이 소개하는 소공동체 사례에서 ‘자율성’과 ‘경쟁력’이 반복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독점자본주의 사회의 이탈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특질을 고수하기 위해 전사회적인 시장규제적 요소에 저항한다. 의료보험 전국민 강제 가입에 반대하는 의료생협, 대안학교라는 이름의 자립형 사립학교들이 바로 그런 예다.

다양한 도전과 실험은 널리 알려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양 웅변하는 것은 부도덕한 체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고, 도전과 실험에 익숙치 않은 압도적 다수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제도 변혁이 배제된 “스스로 만들어 가는 변화”가 다른 방식의 시장 포화와 다른 방식끼리의 시장 경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박원순의 희망’이 희망하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실천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변화”는 인류가 시작된 이래 가장 최선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인류사의 어느 시점, 어느 지점에서도 전인민이 그러했던 적은 없고, 결국은 각성된 소수의 선도적 실험으로 제한되기 마련이다. 참여가 보장된 자발적 소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참여가 아닌 탈출이다.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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