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시바우의 놀라운 수사법과 여야 해석 싸움
        2006년 08월 14일 06: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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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주의 시대에 정치는 종종 해석학이 되곤 한다. 보스의 ‘의중’이 정치적 판단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보스의 ‘의중’은 대개 ‘말씀’으로 주어진다. ‘말씀’의 뜻을 깊이 헤아려 처신하는 건 권위주의 시대의 가장 유력한 정치적 생존법이다. 이들에게 보스의 ‘말씀’이란 종교에서 말하는 ‘계시’와도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계시’는 구체적으로 오지 않는다. 구체적인 건 ‘계시’가 아닌 까닭이다. ‘계시’는 항상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는 해석의 놀이가 된다. 그리고 ‘해석의 권위’는 ‘정치적 권위’로 전환된다. 물론 이 모든 건 보스와의 거리(종종 물리적 거리)에 달려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도부는 14일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를 번갈아 면담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전시 작통권 환수 문제가 주요 의제였다. 양당은 공히 버시바우 대사의 ‘말씀’을 통해 미국의 ‘의중’이 자신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확인받고자 했다.

    열린우리당 우상호 대변인 표현대로 하면 "한국과 미국이 철저히 같은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 또 상당 부분 높은 수준의 합의를 하고 있다는 점, 또 적어도 이 문제를 추진하는 데 있어 한미동맹의 균열도 없으며, 더 이상의 안보공백에 대한 우려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이날 오전 "한미 안보문제에 있어 당과 미국간 안보협의 대화채널도 운영해야 한다"는 말로 미국과의 ‘거리’를 좁히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버시바우 대사와의 이날 면담은 그 일환이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이날 연쇄 면담에서 ‘계시자’의 역할에 더 없이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열린우리당에는 열린우리당이 원하는 ‘말씀’을, 한나라당에는 한나라당이 원하는 ‘말씀’을 남겼다. 미국의 ‘의중’을 둘러싼 해석의 놀이가 앞으로도 지겹게 되풀이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버시바우 대사는 여당 지도부와 만나, 전시작통권 이양 시기와 관련해 "(2009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면서 "확정된 것은 아니고 양국간 적절한 협의를 통해 ‘안전하고도 위험이 없도록'(smooth and no risk)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우상호 대변인은 이 발언을 두고 "버시바우 대사가 여야 지도자를 만나 일각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쟁점에 대해 해명한 것"이라며 "사실상 전작권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해석’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의 면담에서는 "안전한 이양이 되어야 하고, 이양에 따른 위험이 최소화되어야 하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하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접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금 작통권과 관련해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작통권의 조기 환수가 과연 ‘안전’하고, ‘신중’하며, 순수 군사안보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가다. 버시바우 대사는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 말도 않으면서 양자를 두루 만족시키는 신기의 수사를 구사했다. 남는 것은 그의 발언을 둘러싼 또 다른 해석의 놀이일 뿐. 

    ‘말씀’의 뜻을 헤아려 처신하는 것이 권위주의 시대의 가장 유력한 정치적 생존법이었다고 했지만, 결국 그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항상 ‘말씀’을 내리는 보스였다. 거대 양당의 지도부가 경쟁하듯 버시바우 대사를 만나는 모습을 보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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