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경성의 유곽에 대하여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식민도시와 유곽 형성과정에 대해
    2019년 11월 04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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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연재 글 링크

일제의 식민지도시를 연구한 하시야 히로시는 식민지도시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 유형은 일제에 의해 새로운 도시가 형성된 경우로, 부산 ․ 인천 ․ 원산 등이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 유형은 식민지도시화 이전에 전통적인 도시가 형성되어 있던 도시 안에 일본인사회가 형성되어 이중 구조를 가진 도시로, 서울 ․ 평양 등이 이에 해당된다. 세 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도시 주변부에 새롭게 일제가 신시가지를 건설해 기존의 거주민과 일본인이 잡거하지 않고 병존하는 도시로, 지금의 심양(예전에는 봉천으로 불렸으며, 만주국의 주요 도시였다)이 이에 해당한다. 더불어, 하시야는 일제 식민지도시의 상징으로 신사와 유곽에 주목하였다. 즉 일제가 건설한 식민지도시에는 신사와 유곽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유곽(遊廓)이란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업소들이 모여 있는 구역을 뜻한다. 유곽은 일본 메이지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치안과 풍기 단속을 이유로 성매매 여성들을 한곳에 모아 울타리를 치고 거주를 제한하면서 유곽이 만들어졌다. 유곽의 여성들은 포주가 관리하였는데, 포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여성들을 평생 동안 구속하면서 성매매업에 종사시켰다. 이러한 제도를 공창제(公娼制)라 한다.

그런데 메이지 정부 시기 국제사회로부터 공창제가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이에 공창제는 근대적으로 재편성되었다. 근대적 공창제의 특징 중 하나는 성매매 여성의 강제적 성병 검진이었다. 이는 일제가 식민지 건설과 관련된다. 식민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군대가 동원되었는데, 군인들이 성매매를 하다 성병에 걸려 전력에서 이탈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매매 여성에게 성병 검진을 강제하였던 것이다. 유곽 내로 여성의 거주를 제한하는 상황은 공창제의 근대적 재편 과정에서도 유지되었다.

한편,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에 일본인 남성과 일본인 군인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가 이루어졌다. 이에 일본 영사나 재조선 일본인의 자치집단인 거류민단은 법령을 제정하여 성매매 여성을 관리하는 한편 성매매업자로부터 세금을 거둬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유곽이 조선에도 도입되었다.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에 조성된 대표적인 유곽으로는 신정유곽(新町遊廓)과 도산유곽(桃山遊廓)을 들 수 있다. 신정유곽의 위치는 현재 서울 중구 묵정동 일대이며, 도산유곽의 위치는 현재 용산구 도원동 일대이다. 아래 글에서는 신정유곽과 도산유곽의 조성과정은 어땠는지, 왜 해당 지역에 유곽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일본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유곽에 다수의 조선인 남성들도 방문하는 등 유곽이 성행하면서 조선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유곽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유곽의 조선 유입

조선에서 가장 먼저 유곽이 조성된 곳은 부산이다. 1881년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 대좌부영업규칙, 예창기취체규칙 등을 제정하면서 유곽 영업을 허가했다(같은 시기 원산영사관에서도 동일한 규칙을 제정하였다). 이에 1902년 佐須土原(지금의 부산 부평동)에 유곽이 처음으로 건설되었다. 이곳은 당시 일본 거류지 외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이었다. 처음 영업을 시작한 사람은 우에노 야스타로(上野安太郞)로, 그는 안락정(安樂亭)이라는 대좌부(貸座敷)를 만들어 창기 11명을 두고 영업을 시작했다.

(대좌부란 한자 그대로 ‘방을 빌려주는 곳’을 뜻한다. 즉, 성매매를 하는 여성에게 포주가 장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성매매 업소를 대좌부라 하였다. 일본에서 공창제가 근대적으로 재편되면서 인신매매적 제도를 폐지하고 등록된 여성에 한해 성매매를 허가하였다. 이에 여성들은 ‘자유의지’로 성매매를 하였고, 이러한 여성들에게 포주가 장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포주에게 진 빚으로 인해 자유의지로 성매매를 하거나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매매를 공식적으로는 박정애에 따르면 대좌부라는 용어는 근대 일본의 공창제 확립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그 전에 쓰이던 유녀옥(遊女屋)이라는 용어가 창기를 구속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 스스로의 의지로 성매매를 하겠다는 창기에게 포주가 장소만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이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가 팽창하면서 佐須土原 유곽이 더 이상 일본거류지 외곽에 위치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佐須土原 외에 초량, 영도 일대에서도 성매매업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에 유곽의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고, 녹정(綠町, 지금의 부산 충무동)을 새로운 유곽 예정지로 선정하고 일본인 거류지의 대좌부가 이전하게 되었다. 결국 1912년 1월 녹정 유곽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서도 유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부산과는 달리, 처음에는 유곽 영업이 허가되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에서 인천에는 다른 국가들의 조계지가 있어 국가 체면상의 이유로 유곽 영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인천 영사는 1883년 인천 총 환자 수의 25%가 매독 환자이고 거류 부인의 80% 또는 90%가 매독을 앓고 있다는 내용의 병원 보고서를 외무성에 보내 성병 예방을 위해서는 유곽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유곽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도심 기반시설의 건설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1902년 12월 기정동(己井洞)에서 유곽 영업이 시작되었다. 유곽 이름은 부도유곽(敷島遊廓, 지금의 인천 신흥동)으로, 27헌(軒)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16개의 대좌부가 영업을 시작했다.

부산과 인천의 유곽 형성 과정을 보면, 유곽이 조성되는 과정은 서로 다르지만 유곽을 조성하려는 원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지역 모두 일본인 남성 인구 증가 ․ 재원 마련 ․ 성병 관리 등을 이유로 유곽을 만들고자 하였다. 즉, 개항 이후 일본인이 부산과 일본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유입 인구의 대다수는 일본인 남성 단신이었다. 여기에 청일전쟁 ․ 러일전쟁 등으로 일본 군인들의 유입도 증가하면서, 일본인 남성 ․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성매매를 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남성과 군인들이 성병에 걸리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군인의 경우 성병에 걸리면 전력에서 이탈되기 때문에 성병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한편, 재조선 일본인들의 자치단체였던 거류민단의 경우 성매매업자로부터 세금을 징수해 자금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위생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곽 조성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서울의 유곽 조성

서울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아래에서 유곽의 조성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유곽이 건설된 원인은 부산, 인천과 다르지 않다. 첫 번째 원인은 일본인 남성 인구의 증가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본군이 조선으로 들어왔고, 전쟁 경기로 이득을 얻으려는 상인들도 군대를 따라 들어왔다.『경성발달사』에 따르면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이 1903년 319명에서 1904년 907명으로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했는데, 특히 남성 유입인구가 171명에서 520명으로 3배 넘게 증가했다. 1904년 서울의 일본인 인구 또한 1903년 호수 902호에 인구 3,678명에서 1904년 호수 1,350호에 인구 6,323명으로 전년도보다 호수 448호에 인구 2,645명이 증가했다. 남성 인구의 경우 인구수 자체가 여성보다 1,500명 이상 많았고 전년도에 비해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일본인 남성 인구가 늘어나자 성매매 또한 증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성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러일전쟁 개전 초기인 1904년 2월~5월의 성병환자 발생 수가 다른 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 안전하게 성을 제공하여 성병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안전하게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두 번째 원인은 거류민단의 재정 때문이었다. 당시 거류민단은 1906년 법인화되기 전까지 자치기구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세금 징수가 강제적이지 않아 재원조달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에 유곽을 건설해 대좌부 영업자들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거나 영업세를 부과하여 지속적인 수입원을 창출하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구체적인 유곽 조성 과정을 살펴보자. 유곽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거류민단이었다. 1904년 5월 초순 요리옥조합 열 한 곳이 연합하여 영사관에 유곽 설치 허가를 요청했지만, 영사관은 인천의 경우처럼 ‘일본인 추업자(醜業者)를 이국인의 눈에 드러내는 것은 국욕(國辱)’이라는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거류민장 나카이 키타로(中井喜太郞)를 비롯한 민단 의원들이 도쿄의 외무성으로 가서 영사를 바꾸자는 주장까지 하는 등 민단은 적극적으로 유곽 설립을 추진했다.

유곽 설치 허가가 난 이후에도 장애물이 있었는데, 유곽 조성을 위한 토지매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잘 서술되어 있는 자료인『居留民之昔物語』를 보면, 1904년 6월 당시 민회의장 소가 츠토무(曾我勉)의 지명으로 나카무라 사이조(中村再造) ․ 와다 츠네이치(和田常市) ․ 야마구치 다베이(山口太兵衛) ․ 세키 긴타로(關繁太郞) 등 일본인 거류민 지도층 인사들이 유곽 토지매수위원으로 천거되었다. 이들은 예산 6천 원으로 3천 평 이상을 매수해야 했는데, 그것이 어려운 조건이었던 까닭에 모두 매수위원에서 사퇴했다. 이에 민장과 민회의장은 상의 끝에 기쿠타(菊田眞)를 새로운 매수위원으로 발탁했다. 기쿠타는 전권을 위임받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하고 매수에 착수했다.

그런데 유곽 조성 예정지의 토지를 가지고 있던 조동윤은 토지를 궁내부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외국인에게 절대 팔 수 없다고 거절했고, 해당 지역의 조선인들은 당시 실력자였던 조동윤을 두려워하여 토지 매수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기쿠타는 조동윤에게 일본군이 마구간을 만들기 위해 이 일대를 매수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용산처럼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지금 파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득하여 토지를 싼값에 매수했다. 기쿠타는 조동윤과 교섭 이후 다른 조선인들과도 교섭하였다. 그는 이 지역에 일본군의 마구간이 들어와도 도로 부지는 상당한 가격에 팔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거주민들은 예부터 도로 용지는 무상으로 사용했다며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기쿠타는 이곳을 일본의 유곽처럼 만들겠다며 도로 경계를 16칸(間)으로 정했고, 조선인들은 그렇게 되면 밭과 가옥의 대부분을 잃게 된다며 싼 가격으로 교섭에 응했다. 결론적으로 기쿠타는 총 8천3백 평을 4천4백 원에 매수하며 예상보다 싼 가격에 많은 토지를 얻게 되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1904년 10월 1일 서울의 첫 번째 유곽인 신정유곽이 영업을 시작하였다.

신정유곽의 모습(출처 : 中央情報鮮滿支社,『大京城寫眞帖』, 1937)

한편, 신정유곽보다 2년 늦은 1906년 용산에도 유곽이 조성되었다. 조성을 주도한 자는 하타 야에몬(畑彌右衛門)으로, 그는 당시 무연고 묘지가 많았던 도산(桃山)에 유곽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 지역은 복숭아나무가 많았기에 도산이라 불렸고, 유곽 명칭도 도산유곽이라 하였다. 1914년 시구개정으로 명칭이 미생정으로 바뀌면서 미생정유곽으로 불리기도 했다. 도산유곽은 신정유곽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신정유곽과 더불어 경성의 대표적인 유곽으로 자리 잡았다.

앞서 신정유곽 조성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언급했는데, 도산유곽 조성 과정에서도 마찰이 있었다. 도산유곽 주변 거주민들이 하타를 고소하는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하타가 유곽 조성 과정에서 묘지를 마음대로 파헤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이사청은 해당 터가 일본 군대의 위생을 위해 필요한 곳이므로 유곽을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으며, 도로에 장애가 되는 묘지는 협의를 통해 이전하고 이미 파헤친 분묘는 하타에게 배상하도록 하였다. 내부에서도 그 터가 군기창(軍器廠) 뒷산에 인접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상당한 이장 비용을 지급하더라도 백성들의 원망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서울의 유곽 조성 입지조건

앞서 서울에 신정유곽, 도산유곽의 조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신정유곽, 도산유곽은 왜 그 자리에 만들어졌던 것일까?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조선보다 먼저 유곽이 만들어졌던 일본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유곽은 ‘江戶문화의 2대 원천 중 하나이자 도시 구성의 일부분’이었지만, 동시에 ‘惡所라 불리며 사회로부터 격리’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유곽은 시가지 외곽에 건설되었고 울타리나 하천 등으로 다른 곳과 격리되었으며, 출입구가 하나로 제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유곽 중 하나인 에도(도쿄)의 요시와라(吉原) 유곽을 보면(그림 1), 앞서 설명했듯이 유곽 주변으로 울타리를 쳐서 주변과 격리시켰고 출입구도 하나로 제한하였다. 또한 처음에는 미개발지에 유곽을 조성하였지만 시가지가 유곽 근처까지 확장되면서 기존의 위치에서 시가지로부터 먼 곳으로 이전하였다.

요시하라유곽 평면도(출처 : 溫古堂,『新吉原畵報』, 1898)

요시와라 유곽의 사례를 통해, 유곽은 시가지에서 떨어진 곳에 조성하고 울타리나 자연지형으로 주변과 격리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정유곽, 도산유곽은 이러한 입지조건과 부합하는 장소에 조성되었을까? 아니면 ‘식민지’ 또는 ‘조선’, ‘서울’ 등의 변수로 인해 일본과는 다른 입지조건을 가진 곳에 조성되었을까?

먼저 신정유곽의 입지조건을 살펴보자. 첫째, 유곽 건설에 필요한 넓은 공지(空地)가 있었는지를 보아야 한다.『도성대지도』를 보면 신정유곽이 조성되었던 쌍림동 일대는 조선시대 금위영의 화약고를 비롯해 어영창 ․ 남소영(南小營) 등의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었다(아래 지도 하단의 실선 타원형). 이 군사시설들은 1881년 12월 5군영이 양군제(兩軍制)로 통합 개편되면서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쌍림동 일대(출처 :『도성대지도』(18세기) 중 일부)

둘째, 신정이 지형적으로 유곽 건설에 적합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형적 조건은 앞서 언급한 일본 요시와라 유곽의 조건, 즉 시가지 외부에 위치하며 울타리나 하천 등으로 격리된 곳에 조성되었다는 조건에 대입해 볼 필요가 있다.

신정 일대는 러일전쟁 이전까지 일본인 거류지의 외곽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인 상인들의 상권과 거류지가 확장되었는데, 그 위치는 주로 남대문로 일대였다. 그러므로 러일전쟁 직전의 일본인 거류지를 본정과 남대문로 일대로 본다면 신정은 일본인 거류지의 외곽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아래 지도 참고).

1904~1910년 일본인 거류지의 영역별 성격(출처 : 이연경,「한성부 일본인 거류지의 공간과 사회 – 1885년~1910년까지 도시환경변화의 성격과 의미」,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261쪽)

신정은 또한 주변과 격리된 공간이었다.『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를 기초로 삼아 신정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재현해보면, 신정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하천(아래 지도 타원)이 흐르고 신정 외곽을 능선이 둘러싸고 있어(아래 지도 굵은 선) 자연적으로 격리된 공간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정은 일본 유곽처럼 인공적으로 격리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능선과 하천이라는 자연지형으로 주변과 격리된 곳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정유곽의 자연지형 (출처 :『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1922년))

한편, 유곽의 입지조건에서 군대라는 변수를 배제할 수 없다. 유곽 건설의 목적 중 하나가 군인과 남성노동자들에게 안전하게 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던 만큼 군대와 가까운 곳에 유곽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치안 문제를 고려해도 공사관이나 군대 주변에 유곽을 두는 편이 안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정유곽이 만들어질 당시 도성 안에는 신정 주변 외에도 군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일례로 장곡천정(현재 중구 소공동 일대)에 60연대와 한국주차군 사령관저가 있었다. 그러나 60연대와 주차군 사령관저 일대는 열린 공간이었고, 무엇보다 주변에 경운궁과 원구단이 있다는 점이 유곽 조성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반면 신정의 경우 유곽 조성 당시 전차도 다니지 않고 대로도 없어 접근성이 좋지 않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시가지 외곽이고 폐쇄적인 지형이라는 적절한 입지 조건을 가졌으며 궁궐처럼 조선인과 마찰이 생길 위험 요소도 적었다.

다음으로 도산유곽의 입지조건을 살펴보자.

첫째, 유곽 건설에 적합한 터가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산유곽이 조성된 자리는 기존에 묘지가 있었던 곳으로, 묘를 이장한다면 유곽 건설에 충분한 대지(垈地)가 확보될 수 있었다.

도산유곽의 위치(출처 :『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1922년))

둘째, 지형적 조건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도산유곽 자리는 소위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용산’ 일대로, 일본인 중심 거주지인 ‘신용산’과는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또한 아래 지도를 보면 도산 유곽은 바로 뒤편에서 내려오는 능선으로 인해 동 ․ 서 ․ 남 3면이 막혀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유곽의 크기도 작아서, 도산유곽은 매우 고립된 곳에 위치한 셈이었다. 도산유곽 뒤편 언덕의 높이는 1922년 기준 약 76m로 용산 일대에서는 높은 축에 속했다.

셋째, 군대와의 관련성이다. 도산유곽 또한 신정유곽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군대가 있다. 오히려 신정유곽 주변에 있던 부대보다 더 큰 부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더불어 기차역(용산역) 또한 주변에 있기에 접근성만 보면 신정유곽보다 좋은 위치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산유곽의 자연지형(출처 :『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1922년))

유곽의 성행과 조선인 유곽 건설

유곽 건설 이후 성매매의 번성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퍼져나갔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유곽에 조선인 창기와 수는 적지만 외국인 창기도 있었으며, 후술하겠지만 1919년경에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유곽이 만들어졌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이 유곽을 찾으면서 유곽은 점차 향락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유곽을 찾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성매매 관련 업자나 예창기의 수도 증가하였는데, 이는 비단 경성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표 1]을 보면 1910년대에는 조선 전역에서 성매매 관련업자 및 예창기의 수가 대체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창기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는데, 예기의 수가 1910년 1,404명에서 1920년 2,560명으로 1.8배 증가한 것에 비해 창기의 수는 1910년 1,426명에서 1920년 3,692명으로 2.5배 증가하였다.

조선의 성매매 관련업자 및 예창기 수(단위: 명)

신정유곽의 사례를 통해 유곽의 번성 양상을 살펴보면, 1922년 1월 한 달간 신정유곽에 12,662명이 방문해 247,046원 50전을 소비했다. 1년 단위로 보면 1921년 133,227명이 방문해 1,425,287원 9전, 1922년에는 131,918명이 방문해 1,423,630원 27전을 소비했다. 유곽의 수입이 얼마나 많았는지 당시 신문에서는 “조선사람 전 인구 약 이천만의 십분지 일인 이백만 명이 하루 삼전어치씩의 담배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육 만원 돈이 소비된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신정유곽은 경성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더욱 성황이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총독부 시정 5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었을 때 유곽에서는 30만 원에 가까운 소비가 이루어졌다. 또한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식민통치 20년을 기념하는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1929년 한 해 동안 신정유곽과 조선인 유곽 창기 562명이 827,370원 37전의 소득을 얻었다. 1929년 당시 신정유곽은 매일 2천 원 정도의 이익을 거두었는데 박람회가 시작된 이후에는 매일 2배의 이익이 있었으며, 10월 11일에는 하루 동안 7,114원으로 평소보다 3배에 가까운 이득을 보기도 했다. 또한 10월 1일부터 18일까지 83,820원 72전을 벌었는데, 이는 창기 1인당 150여 원의 수입이고 1일 평균 8원 정도를 버는 것으로 불경기 속에서 돈벼락을 맞는 상황이었다. 그밖에 12월 31일 신년을 맞이해 많은 사람이 유곽을 찾아 신정유곽은 791원 20전, 조선인 유곽은 270전의 이득을 보았으며, 평소 2천 7,8백 원 정도를 벌다가도 일 년에 한 번 있는 상여금 날에는 하룻밤 6천원의 수익이 나기도 했다. 상여금을 받는 날에 평소보다 많은 수익이 난다는 것은 그만큼 봉급생활자들이 유곽을 많이 찾았다는 뜻한다. 경제대공황의 타격을 받은 이후인 1931년에도 서울의 유곽은 불황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듯 1931년 9월 당시 서울의 유곽 네 곳-신정 ․ 병목정 ․ 도산 ․ 대도정-에서 9만 3천여 원의 소비가 이루어졌다. 이는 1931년 9월말 합계와 몇 십 원 정도밖에 감소되지 않은 액수였다.

이렇듯 유곽이 성행하는 상황에서, 조선인도 유곽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1910년대 후반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곽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 유곽 조성은 조선인 창기를 관리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인 창기를 관리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7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부터 이러한 조치가 시작된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하나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이다. 물산공진회의 목적이 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맞이해 식민지 통치상의 발전을 기념하고 내외로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경찰당국은 성매매의 관리를 더욱 엄중히 했다. 다른 하나는 일본군 상주사단의 창설이다. 1915년 6월 일본 제국회의는 조선의 상주사단 편성을 승인했다. 상주사단의 창설은 곧 일본인 남성인구의 증가를 뜻한다. 서울에도 용산에 사령부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인구 증가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서울에 거주하거나 방문하는 남성 인구가 급증하게 되자 일제는 성매매 단속을 위한 법령정비에 서둘러 착수했다. 이에 1916년 통일된 단속규칙이 반포되었고, 1917년부터 조선인 창기를 특정 장소로 이전시켜 관리하였다.

조선인 유곽의 건설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17년 3월 1일 본정경찰서가 본정 ․ 종로 경찰서 관내에 색주가가 많아 시가의 체면과 풍화 상 문제가 있으므로 창기들에게 3월 15일 이내로 신정 근처인 병목정으로 옮겨 갈 것을 명했다. 하지만 현재 병목정에 그만큼의 집이 없으니 우선 병목정과 입정정(笠井町) 두 군데로 옮겨가도록 했다. 같은 해 8월 22일 구체적인 대책이 마련되었는데, 신정 동쪽의 4,893평을 편입해 모두 이곳으로 옮겨가게 하고자 했다. 이에 1918년 봄부터 ‘신정 겻산’ 밑에 집을 짓는 공사를 시작해 12월 공사가 끝나자, 본정 경찰서는 12월 27~28일 양일간 북미창정 창기들을 신정으로 옮기고 입정정 창기들은 다음해 3월 이내로 옮기기로 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조선인 유곽은 동신지 유곽으로, 병목정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병목정 유곽이라고도 불렸다. 병목정 유곽의 대략적인 범위는 아래 지도와 같다(검게 칠한 부분).

조선인 유곽의 범위(출처 :『地形明細圖』(1929년))

1945년 해방 이후 서울에서 유곽은 사라져 갔다. 1947년 미군정이 ‘부녀자의 인신매매 및 매매계약 금지와 공창제도 등을 폐지’를 공포하면서 공창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한편으로는 1946년부터 피란민이 내려오면서 요정 ․ 유곽 ․ 여관 등이 피란민들에게 제공되면서 성매매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지금은 신정유곽이나 도산유곽이 있던 곳에 가도 유곽과 관련된 흔적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의 도로 구획은 지금도 일부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신정유곽이 있었던 묵정동의 경우 일부는 변형되었지만 큰 틀은 지도를 통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도로 구획 형태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신정의 위치과 현재 묵정동의 위치 비교
비고 : 일제강점기 신정의 행정구역 경계는『대경성정도』(1936년)에서 추출하였다.

<참고문헌>

박현,「일제시기 경성의 창기업(娼妓業) 번성과 조선인 유곽 건설」,『도시연구』14, 2015.

박현,「20세기 초 경성 신정유곽의 형성과 변화 과정에 대한 공간적 분석」,『서울과역사』92, 2016.

金富子 ․ 金榮,『植民地遊廓 : 日本の軍隊と朝鮮半島』, 吉川弘文館, 2018.

하시야 히로시 지음 ․ 김제정 옮김,『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다』, 모티브, 2005.

홍성철,『유곽의 역사』, 페이퍼로드, 2007.

필자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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