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공적 예산 집행 지침들,
    기후위기와 불평등 문제 등 반영해야
    [에정칼럼] ‘불용’의 용기를 갖는 정치가 필요하다
        2019년 11월 01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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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난 각종 보조금 사업에 참여해 본 시민들이라면 익히 아는 불편함(?)이 있다. 바로 자산취득성 예산집행을 금지하는 지침이다. 모든 보조금 사업에 대해 행정은 해당 사업별로 그 특성에 맞게 집행지침을 만들어 배포한다. 예산안을 작성해 보조금 사업을 신청하는 시점부터 가장 강력한 기준으로 작동하는 이 집행지침에는 표현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보조금 사업을 진행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자산을 취득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예산 집행에 대해 엄격하게 금지한다.

    공적예산을 투입해 추진하는 사업이니만큼 사업의 공공성, 특히 공공의 예산이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이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에 중요성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업진행비 항목이나 물품구입비 항목의 예산 수립과 집행 과정에서 ‘소모성 물품’을 구입하도록 제한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면 그 경계가 애매한 것들이 많이 있다. 게다가 비슷한 이유에서 대부분의 보조금 사업이 인건비성 수당 집행에도 매우 많은 제한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업을 진행하는 중에 쓸 수 있는 예산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도, 장소에게도 남지 않도록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실제로 보조금으로 집행되는 예산은 그런 의도를 충분히 살려 공공성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을까? 이 질문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주한 2019년 시점의 ‘공공성’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적인 사례를 들어 생각해보자. 여러 제한 덕분에 보조금 사업을 집행하는 중에 가장 손쉽게 ‘돈을 쓸 수 있는’ 방법은 기념품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것이다. 받은 예산은 최대한 다 쓰는 것이 미덕인 분위기 때문에 돈은 써야 마땅한 것이 되었고, 직접 활동했거나 활동에 기여한 개인에게 비용을 집행하는 것은 인건비성 수당으로 간주되며, 특정 장소나 개인이 어딘가에 고정시켜 활용할 수 있는 물품을 구입하는 것은 자산취득성 예산 집행이 되기 때문에 개인에게 지급될 수 있지만 인건비는 아니고 소모성 물품이지만 1년 이상 활용할 수 있는(대부분의 보조금 사업은 ‘물품관리법’을 근거로 1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구매하도록 지침을 내리고 있다.) 기념품을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방식으로 예산을 쓰는 것이 일종의 Tip처럼 구전되는 모양새다. 물론 구체적인 지칭은 기념품일 수도 있고, 캠페인 물품일 때도 있고, 워크숍 재료일 수도 있다. 집에 굴러다니는 에코백이 너무 많아져서 더 이상 ‘에코(Eco)’하지 않다는 농담이 만들어진 맥락에는 이런 관행이 한몫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런 관행들은 기후위기와 저성장이라는 시대적 위기 앞에 구성되어야 할 ‘공공성’이라는 준거점에서 볼 때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더 큰 문제는 이런 관행이 단지 보조금 사업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조금 사업의 관행은 공적 예산을 집행하는 관료제 시스템의 오랜 습관들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몇 년 전 한 기초의회 회의록을 모니터링하며 발견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공공 자전거 수리와 관련된 예산안에 대한 질의 내용이었는데, 한 기초의원이 공공 자전거 수리에 들어가는 예산보다 자전거를 새롭게 구입하는 예산이 더 저렴하니 수리가 필요한 공공 자전거는 폐기하고 새로운 자전거를 구입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부족한 예산을 최대한 아껴 집행할 수 있도록 의견을 내는 것이 선출직 기초의원이 부여받은 공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예산 계획의 수립과 집행, 평가 과정 중에 개입해야 할 가치가 ‘무조건 절약’ 하나 밖에 없는 것일까? 물건을 수리해서 쓰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것이 더 저렴해진 맥락에는 대량생산 시스템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 대량생산 시스템은 성장주의적 탄소기반경제와 불평등을 강화하는 노동 덕분에 유지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 문제들이 우리가 지금 당장 가장 우선적으로 풀어야할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단지 더 싸서 예산을 아낄 수 있기 때문에 공공자전거를 새로 사자는 제안이 힘을 얻어서는 안 된다.

    수리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repair)

    최근 여러 국가에서 수리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repair)을 법제화하는 흐름들이 형성되고 있다. 미국 대선 주자로 나선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이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이런 흐름에 지지의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도 꼭 필요한 논의다.

    수리 받아 물품을 재사용하고 오래 사용할 권리는 이미 우리 일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2017년 한국인의 핸드폰 평균 사용기간은 2.7년으로 집계된 바 있다. 여기에는 통신사와 제조사가 연합해 만들어 낸 이른바 약정 시스템이 크게 역할을 했고(실제 교체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약정만료(36.7%)였다.), 기존 기기를 수리해서 쓰는 것보다 새 기기를 새로운 약정으로 구입해 쓰는 것이 더 저렴하다고 홍보하는 마케팅 방법이 한 몫 했을 것이다. 핸드폰 류의 가장 대표적인 가전제품이 소모품이 되어버린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문화를 멈춰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수리 인프라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게 하는 시스템에 비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에 속해 있는 개인과 심지어 공공마저 지금의 기준에서는 누구나 수리보다는 신제품 구매를 선택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적 예산의 집행이나 사적 영역의 소비에서 ‘수리 받을 권리’가 공적 영역의 토론 주제로 하루빨리 등장해야 할 이유이다. 대규모의 공적예산을 투입해 수리받을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지금 당장 공적예산의 집행 과정에서도 비용이 더 들더라도 재사용에 비용을 쓰도록 하는 기후위기 시대의 ‘집행지침’이 필요하다.

    공적 예산의 집행 기준, 새롭게 설정되어야

    마지막으로 공무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불용(不用)’이다. 통과된 예산을 남김없이 사용하는 것은 담당 사업을 추진하는 부서와 부서원들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거꾸로 예산이 다 사용되지 못해 불용처리 되는 것은 관료제 하에서 무능력이 증명되는 무서운 경험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예산을 무조건 절약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존재하지만, 또 어떤 상황에서는 주어진 예산을 어떻게든 전부 쓰는 것이 훌륭한 공무원의 미덕으로 인지되고 있다. 이 관행이 보조금 사업을 집행하는 시민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되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현실이다. 그래서 어떤 예산들은 적재적소에 잘 활용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평가항목에 존재하는 여러 기준들과 제한들을 충족시켜가며 다 쓰이는 것을 우선순위로 집행된다. 그리고 이미 확보한 예산의 크기를 축소시키지 않으려는 행정 부서 간 경쟁도 예산의 불용처리에 대한 관료 사회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킨다. 더 이상 건설할 도로가 별로 없어 심지어 민자도로까지 재원을 투입하고 있으면서도 매년 10조 이상의 재원을 포기할 수 없어 국토부가 놓지 못하는 교통시설특별회계 같은 내용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분간 어떤 예산들이 ‘불용’되는지 있는 그대로 확인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억지로 예산을 다 쓰며 역설적으로 공적 생존기반을 파괴하는 방식의 예산 집행을 일단 멈추자. 이를 위해 당분간 ‘불용’은 무능력의 상징이 아니라, 진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용기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공적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 중에 확인되는 문화적 관행들이 있고, 명확해 보이지만 모호한 기준으로 얽혀 있는 그 관행들이 명문화된 법과 지침들이 존재한다. 모두 우리 사회가 계속 성장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시기, 자원의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로부터 이어진 것들이다. 이 연결을 단호히 끊고, 새롭게 모든 기준들을 다시 설정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체감의 정도가 부쩍 높아진 기후위기 문제, 폐기물 문제, 그리고 계속 악화되는 불평등의 정도가 그 명분이다.

    2050년까지 탄소배출 Net-Zero에 도달하고, 자원이 효율적으로 순환되어 매립되고 소각되는 폐기물이 사라지며, 강화되는 불평등의 고리를 끊는 것을 공적 예산 집행의 최우선 기준으로 설정할 때, 과거의 관행들이 고정시킨 기준들을 재구성할 명확한 준거점이 만들어질 것이다. 기존의 공적예산 집행을 둘러싼 관행과 기준을 시키는 해체하고, 새 기준을 설정하는 작업, 그것이 2019년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필자소개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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