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조국 사태를 돌아보며
    [기고] 변화 혹은 추락에 대한 공포
        2019년 10월 31일 10: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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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법무부장관의 임명부터 사퇴까지, 그리고 그가 사퇴한 지금도 조국 없는 조국 사태는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와 의미, 전망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기고 글을 이장규 씨에게 요청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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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법무부장관의 사퇴로 이른바 ‘조국대전’의 한 국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너무나 많은 쟁점과 과제들을 남겼다. 애초에는 각각의 쟁점이나 과제에 대한 입장을 좌파적인 시각에서 정리하는 글을 쓸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입장 정리’야말로 어쩌면 또 하나의 ‘꼰대짓’인 듯하다. 어떤 입장을 정하고 그 입장대로 가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반자유한국당이나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조국을 무조건 옹호하는 비상식적인 행태와 얼마나 다를까 싶다.

    그래서 어떤 쟁점이나 과제의 정리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번 사태가 이렇게까지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약간은 다른 시각에서 돌이켜보고자 한다.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이 과연 문제인가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다양하게 던지는 것이 오히려 꼰대로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인 듯싶다.

    필자는 조국과 같은 세대 즉 이른바 586세대이다. 이번 사태의 와중에서 가장 깊은 내상을 입은 사람들은 어쩌면 청년층 이전에, 필자처럼 진보적인 4,50대이면서 조국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상층진보의 기득권을 비판한 이들일 수도 있다. 조국 한 사람 때문이 아니다. 조국 본인보다도,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조국을 옹호한 이들에게 더 상처가 깊었다. 그동안 그래도 기본적인 상식은 공유한다고 믿었던 이들에 대한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조국이야 어차피 강남좌파 즉 기득권자였다. 말과 행동이 다른 건 기득권자 본래의 속성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를 옹호한 이들 중에서도 민주당 골수 지지자나 기득권자들은 오히려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어차피 별 기대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평소에는 민주당 골수 지지자도 아니었고 그보다 더 왼쪽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기득권자가 아니라 일반 중산층 수준인 4,50대 중 상당수가 조국을 일방적으로 옹호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이라는 정의당에서도 당 지도부를 포함한 4,50대 당원 상당수는 조국을 옹호하거나 침묵했으며 적극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게 단순히 세대의 문제일까? 4,50대의 소득양극화는 청년층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다. 게다가 한국의 4,50대는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부양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장경섭 교수가 ‘내일의 종언’에서 말한 대로, 한국의 50대는 어쩌면 전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세대일지도 모른다. 50대 전부가 기득권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기득권이라 볼 수 없는 이들 상당수도 조국을 옹호했다. 물론 조국처럼 잘 나가는 586들은 틀림없이 기득권자이며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50대를 대표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4,50대조차 조국을 옹호하는 것이 과연 단지 세대 간의 동질감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보수언론은 586 기득권을 이야기하면서 세대론을 부추기지만, 여전히 세대보다는 계급이 본질적이다. 같은 세대라도 블루칼라인 경우 화이트칼라보다 조국에 반대하는 여론이 더 높다. 그렇지만 오로지 계급으로만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4,50대의 경우 블루칼라 역시 20대보다는 조국을 더 지지한다. 경제적으로 결코 안정적인 계층이라고 하기 어려운 3,40대 여성에게서 조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강한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단지 세대 간의 문제도, 역으로 계급만의 문제도 아니다. 또한 단순히 기득권 대 반기득권으로만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교차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필자가 이번 사태의 와중에 우리 또래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는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생각한 것은, 이번에 강력하게 드러난 것 중 하나가 ‘중산층의 불안감’이라는 사실이다.

    변화 혹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

    왜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보수정당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여러 설명들이 있다. 아직 확실히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가설은 가난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해도 리스크가 적은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들이 실제로 실현될지 불확실한 약속만 믿고 변화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면 감당할 수 없기에 오히려 보수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가난한 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산층 역시 변화의 리스크가 오히려 더 크다면 비슷하게 행동할 것이다. 중산층은 리스크를 감당할 여력이 약간은 있으므로, 미래가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약간의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지지하지만 그 반대라면 오히려 보수적으로 바뀐다. 추락에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리브스가 ‘20 VS 80의 사회’에서 말한 ‘유리바닥’을 만드는 것이다.

    조국을 옹호한 핵심 계층은 바로 이런 중산층이었다. 추락에의 불안감에 영혼을 잠식당한 이들이다. 더 이상 한국에서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안다. 자기 자식들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삶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어떻게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도 기회가 있다면 조국처럼 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거리낌없이 나오는 것이다. 추락에서 안전한 진짜 기득권자들이라고 생각되는 검찰과 언론과 자유한국당을 욕하면서.

    조국 사태 이후의 민심 수습책이 ‘정시 확대’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좋은 학벌은 여전히 한국에서 추락을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식되므로, 학벌 획득의 형식적인 공정성에 몰입하는 것이다. 정시 확대가 사교육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교육에 돈을 쏟아부어도 좋으니 추락하지 않을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결과이다. 1대99가 아니라 20대80이라면서 두 해석이 전혀 다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게 아니다. 정확히는 1대19대80인 것이다. 1을 따라잡기는 이미 어려워진 상황에서, 1에 대해서는 말로만 공격하고 실제로는 아래 80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노력에만 집중하는 것. 이것이 진짜 강남좌파가 아님에도 조국을 옹호한 대다수 중산층 내지 진보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들을 상층진보 내지 기득권자라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냉정하게 말해 80은 아직 자신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라도 20을 전부 기득권자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도 이해할 부분이 있으니까 다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1프로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나머지 80을 배제하는 행동을 정당화시켜 줄 수는 없다.

    무엇이 필요한가

    실천적으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80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당연히 기본이다. 하지만 80의 힘을 실제로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19 내부에서의 문제제기가 병행되어야 한다. 19의 불안감이 극대화되었을 때, 오히려 파시즘 등 역사의 반동이 올 수도 있다 (물론 필자는 한국에서 파시즘은 쉽지 않다고 본다. 파시즘적인 심리상태는 넘치지만 이를 위한 사회적 조건들이 미흡하다고 보기 때문에. 하지만 파시즘까지는 아니라도 말로는 반기득권을 내세운 신우파적 포풀리즘이 진출할 가능성은 상당하다).

    19 내부에서의 문제제기란 결국 내부비판의 활성화를 뜻한다. 범진보세력의 분열을 걱정하지만,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산층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해법은 없다. 현실은 현실로서 인정해야 한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아래 80을 배제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할 것인가, 아래 80과 함께 1의 막강한 기득권을 타파하기 위한 동맹에 나설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민주당 지지자이건 진보정당 지지자이건 마찬가지다. 이미 민주당과 진보정당 간의 뚜렷한 구분은 없어졌다. 민주당도 진보정당도 그 주도세력은 대부분 19들이다. 아래 80을 배제하고 그나마 가진 것을 지키려는 행태 역시 민주당과 진보정당 모두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행태들부터 내부비판을 시작해야 한다. 슬프지만 이제 진보정당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진보적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어졌다.

    이러한 내부비판은 단지 도덕 내지 윤리만을 강조하는 근본주의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중산층의 추락 가능성 증가라는 실제의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묻고, 이후 누구와 동맹하여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는가를 묻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일종이다. 추락에의 불안감에 굴복하여 지금의 현실을 도리어 강화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추락 가능성을 더 높이는 악순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래 80과 함께 지금의 불평등을 강력히 억제함으로써 추락에의 불안감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것인가를 제대로 선택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또한 이런 내부비판은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세대보다 계급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며, 손쉽게 청년팔이를 하는 정치권의 행태에도 매우 비판적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도 사회적 발언권을 가진 이들의 대부분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들은 더더욱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한다. 이제 남은 날들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전에 뭔가 이후의 추락을 방지할 발판을 마련해두어야 한다고 더 강하게 집착하게 된다. 반면 젊은이들은 아직 미래가 많이 남았으므로 이런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50대가 세대론을 내세우면서 청년팔이를 하는 것보다, 20대가 계급을 이야기하면서 50대 내부의 불평등 해소를 말하는 것이 훨씬 멋지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이 글도 굳이 쓸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이 글 또한 사실은 50대가 청년을 호명하는 일종의 꼰대짓이다. 굳이 내부비판을 주문하지 않더라도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면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 또래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상처가 깊지만 사람에게서 생긴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다. 우리 또래 중 더 이상 분노하며 상처받고 싶지 않은 이들부터, 현재의 위치에 관계없이 서로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변화에의 불안감 때문에 기존의 자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닌지, 나 자신부터 되돌아보고자 한다.

    필자소개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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