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한 입시란 없다 : 정시 확대 비판
    [민주적 사회주의]교육문제, 입시제도만의 문제 아냐
        2019년 10월 28일 09: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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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회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신분 상승이 자유로웠던 개방적 사회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코웃음 칠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할 수 있었고, 양반뿐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과거 응시 자격은 주어졌다. 기회야 있었어도 평민들이 합격 했겠는가 싶겠지만, 우리의 통념과 달리 신분이 낮은 문과 급제자(평민, 서얼 등)의 비율은 조선 초기에 40~50%에 달했고 중기에 10%대까지 낮아졌다가 양란 이후 수치를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50%에 가까운 비율을 유지했다(한영우, 『과거, 출세의 사다리』). 조선사 전체를 통틀어서 보아도 문과 합격자의 1/3 정도는 낮은 신분 출신이었다.

    하지만 ‘개천에서 난 용’이 분명히 있었다고 해서 조선 사회가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높은 열린 사회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렵사리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평민들은 관리 임용과 승진에 차별을 받았다. 유명한 조선 관료들 중에서 평민 출신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만큼 재산을 가진 평민들이 지극히 소수였다는 것이다. 돈 많은 평민이 과거에 합격하든 말든 그건 ‘그들만의 리그’일 뿐 백성 전체의 기회를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보건대, 이 나라의 수능은 과거제와 흡사하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정시를 늘려 많은 학생들에게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단언컨대 사기꾼이거나 바보이다. 과거 합격자를 늘려 신분을 타파하자는 이야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학력고사 때와는 다르다. 내가 수능을 쳤을 때와도 다르다. 부모의 학력과 소득이 높을수록 ‘수시’보다는 ‘정시’로 대학을 갈 확률이 높다. “정시 일반전형의 전형요소인 수학능력시험과 사교육비 지출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수능시험을 중심으로 한 정시 일반전형은 특정 지역과 특정 학교,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전형으로 고착화될 개연성” 또한 가지고 있다(이기혜, 최윤진, 「대학입학전형 선발 결정요인 분석: 가정배경 및 학교 관련 요인을 중심으로」, 『한국교육학연구』 22권 1호).

    방송화면 캡처

    2017년 4월 12일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46개 대학 신입생 18만 7천명을 전수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시 전형 중에서도 비교과 활동을 강조하는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에서 1)저소득층 학생들의 합격 비율이 가장 높고, 2)일반고, 읍면 도시 학생들이 강세를 보였다. 그리고 ‘학종’으로 대학을 입학한 학생들이 다른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보다 1)학업성취도가 가장 높고 2)중도 탈락 비율이 가장 낮았다. 우리의 통념과 달리 ‘금수저 전형’은 ‘학종’이 아니라 ‘수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통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금 정시 확대를 가장 반기는 곳이 대치동 학원가라는 것, 대통령이 정시 확대를 공언하자 당장 대형 사교육업체의 주가가 뛰었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계급대물림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적어도 부자들은 그걸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수능 시험의 설계자였던 박도순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수능 무력화가 필요하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원래 수능의 취지는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 정도만 확인하자는 것이었는데 시험이 변질되더니 이제는 1~2점 차이 가지고 서로 물고 뜯는 시험이 되었다는 것이다. 45문제가 나오는 국어 영역 시험에서 보통 3점짜리 문제 3-4개만 틀려도 2등급이 된다. 탐구 영역은 더 심한데, 20문제 중 1문제 틀리면 1등급, 2문제 틀리면 2등급, 운 나쁘면 3문제 틀려서 3등급이 뜨기도 한다. 이 한 두 문제 때문에 등급이 떨어져 재수건 삼수건 하게 되는 건데, 사실 이 한 두 문제의 차이를 ‘능력의 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치적 의미는 없다. 차라리 시험 치는 그날 컨디션이 학생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평생의 문화 자본을 결정하자는 이 멍청한 짓을 ‘국민 여론’이라는 말을 빌려 대통령이 부추기고 있다. 교육 철학이 부재하거나, 사교육계의 강력한 입김을 받았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이유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이 더 공정하다거나, 입시를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정시’든 ‘수시’든 부모의 소득 수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입시를 아예 폐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OECD 35개 국가 중 입시, 즉 학교가 아닌 외부 기관에서 출제하고 채점하는 시험이 없는 곳은 노르웨이, 캐나다뿐이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독일’과 ‘핀란드’에도 대학 입학을 위한 일정한 자격을 요구하는 시험은 존재한다. 똑같이 입시 제도가 존재함에도 한국처럼 사교육 문제가 심하지 않은 것은, 결국 한국의 교육 문제가 입시 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핵심은 우리가 어떤 입시가 더 ‘공정’한지를 찾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공정한 입시란 없다. 같은 조건 하에서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진공 세계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시험을 쳐서 소수점 단위로 학생들을 경쟁시키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허상일뿐더러, 교육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형평성’이다. 공교육은 더 많은 학생과 계층을 위한 기회를 보장해야지 특정 계층만 유리하게끔 설계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적극적인 ‘역차별’이 더욱 필요하다. 국가 교육 시스템이 개인 간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이미 벌어진 출발선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다면, 그 자체로 공교육은 이미 불필요하다. 현존하는 시스템은 벌어진 격차가 대입에 그대로 반영되는 구조이고, 그 상황이 유지되는 한 국가가 뭐라고 떠들든 학부모들은 그 제도에 더 적합한 사교육을 찾으러 다닌다. 사교육을 해야만 공교육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 현실은 건들지 않으면서 정시를 늘리는 것이 ‘공정성’에 대체 무슨 기여를 한단 말인가.

    필요한 건 더 충실한 ‘평준화 교육’이다. 평준화 교육이란 ‘천편일률적’인 교육이 아니다. 동등한 기회를 모두에게 보장하자는 것이다. 공부할 애들만 선발해서 ‘과학고’나 ‘외고’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반 학교’를 다니면서 원한다면 외국어 수업이나 과학 수업을 더 많이 수강하여 자신의 특색을 살리자는 것이다. 평가 기준을 다원화하여 학생들이 자신만의 특색을 살려 대학에 가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목고, 자사고 폐지와 더불어 ’수능의 무력화(절대평가 혹은 자격고사화)’, ‘고교학점제’ 도입, 고등학교 졸업생의 일정 인원을 수용하는, 주요 사립대를 포함한 일종의 ’공동 입학 네트워크‘ 등 철학과 관점만 바꾼다면 지금 교육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를 얼마든지 궁리해볼 수 있다. 한국과 같이 사교육이 비대한 곳에서는 그 과도기적 과정으로 바깥의 사교육 강사들을 학교의 선택 수업에 초빙하여 학교의 제한된 인력과 예산을 아끼고 사교육을 학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사교육의 준공영화’를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입시 비중을 이리저리 조정하는 것만으로 지금 이 문제가 쉬이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시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말만으로 이 땅의 공정함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공정성 담론’과 ‘정시 대 수시’의 논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이 불평등한 교육 제도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공교육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각자도생’의 가치가 유일할 것이다. 공동체가 자신을 책임지지 않는데, 그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요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답은 ‘탈조선’이 되는 것이다. 공교육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이 역설적인 현실에 대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 어떠한 근본적 개혁의 시도조차 않는 것, 그 자체로 이미 그들은 공동체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은 언제나 일반 대중을 향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지금 현존하는 구조를 개혁하여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한다면, 그것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사교육계의 몫이어야 한다. 교육 제도가 계속 이 상태로 유지된다면, 또한 정부가 공언하는 대로 정시 비중이 확대된다면 사교육업자로서 내가 돈 벌기에는 이만큼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시민으로서의 양심으로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라고 말할 따름이다.

    앞 회의 글 [민주적 사회주의] 필요한가? 그리고 가능한가?

    필자소개
    ‘민주적 사회주의자’ 편집팀, 대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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