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사태와
    톨게이트 노동자들 투쟁
    [기자수첩] '사라진 민주노총, 작아진 진보정당'에 대한 어떤 안타까움
        2019년 10월 17일 11: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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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전 민정수석(이하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면서 시작된 ‘조국 사태’는 한국사회를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까지 불러온 한일 갈등 문제는 물론 거의 모든 노동, 사회 이슈를 집어삼켰다. 진보적 학자를 자청하며 기득권을 신랄하게 비판해왔던 조국은 기득권 대물림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들만의 리그가 무엇인지에 국민들이 생생하게 목격하게 만들었다.

    광화문과 서초동, 그 어느 쪽도 내키지 않는 진보층 지지자들은 적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찰개혁이나 불공정에 대한 저항보단 차기 정권을 향한 거대양당의 암투 정도로밖에는 비춰지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조국의 ‘조’자만 보고 들어도 피로감이 몰려오고 활자에서 눈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심정에 허덕였다. 많은 이들이 광화문과 서초동, 그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을 동안 진보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박근혜 정부를 몰아낸 촛불집회 주도 세력인 민주노총은 두 달간 벌어진 ‘조국 사태’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어떤 사회단체보다 불평등과 불공정에 앞장서서 싸워왔던 민주노총은 이와 관련한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원내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조국에 대한 찬반 당론을 정하는 것조차 버거워 했다. 당 지도부는 우물쭈물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는 상황이 거의 확실시되자 뒤늦게 “대통령의 임명권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냈다. 당원들은 진보정당다운 결단을 내리고 당원을 설득해내는 지도력을 원했지만 당 지도부는 그러지 못했다. 당내 후과는 여전하다.

    조국이 장관직 사퇴를 발표한 날 정의당 대변인은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개혁을 해왔다”며 “가족들에 대한 수사 등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검찰 개혁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고 추진해온 것을 높이 평가한다. 수고 많았다”는 브리핑을 냈다. 민주당스럽다는 비판은 접어두더라도, 불법과 특혜 의혹에 휘말려 검찰 수사까지 받고 있는 장관한테 진보정당이 내놓을 만한 입장은 아니지 않나?

    조국 사태 속에서도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직접고용 투쟁은 요 근래 최대 노동이슈였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톨게이트 캐노피에 오르고 청와대 앞 농성, 도로공사 점거투쟁을 하며 자회사 전환채용이 아닌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하는 투쟁이었고, 노동계는 물론 여성, 시민사회, 장애계 등 각계가 연대한 투쟁이었다.

    최근엔, 정부가 자회사 전환의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운 “노사전협의체가 자회사 전환 채용에 합의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노사전협의체는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직접고용 요구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국회에 와서 “노사전협의체가 자회사 전환에 합의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의 민낯이다.

    처음부터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최근엔 더 어려워진 듯하다.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 노조는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내놓은 중재안에 합의하면서다. 2심 계류 중인 수납원만 직접고용하고, 1심 계류 중인 수납원에 대해선 1심 판결이 나오기 전까진 도로공사 기간제로 채용하기로 한 것이 합의안의 주요 내용이다. 2년 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으면 모두 해고 위기다. 쟁점이었던 직무에 관해서도 합의안에 담기지 않아 수납업무를 보던 이들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 주어질 수도 있다. 어찌됐든 곳곳이 폭탄인 이 합의안에,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은 서명하지 않았다.

    톨게이트 투쟁에 민주노총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열고 투쟁기금 모금, 정부여당을 상대로 한 전면 투쟁 등을 확정하며 톨게이트 노동자 직접고용 쟁취를 하반기 주요 투쟁 계획에 포함했다. 정부여당을 상대로 한 전면 투쟁과 같은 계획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걸까. 정부는 이미 반노동 정책으로 방향키를 튼 상태이고, 여론은 온통 다른 데에 관심이 쏠려 있다. 광화문과 서초동 어디에서도 민주노총 깃발을 반기지 않는데 총력투쟁과 총파업은 과연 누구를 압박할 수 있는 도구일까. 이 때문에 산별노조 내부에선 민주노총이 기자회견이나 집회를 잡는 것 외엔 현 상황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아이디어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자조가 나온다.

    톨게이트 투쟁뿐만 아니다. 최근 사회적 합의기구인 2기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지난 11일 출범한 후 보여준 민주노총의 무력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이 비운 노동계 자리는 모두 한국노총이 채웠고, 2기 경사노위는 탄력근로제 확대를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제아무리 “정당성 없는 경사노위”라 비판해봤자, 국회는 이 합의를 근거로 탄력근로제 확대를 법으로 못 박을 것이다. 어쩌면 민주노총은 탄력근로제 확대 법안이 처리되는 당일 국회 앞에서 밧줄을 당기고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며 최선을 다해 싸우겠지만, 경험상 그런다고 국회가 법 통과를 미루거나 취소하는 일은 본 적이 없다. 지금 노동운동에 필요한 전략과 행동은 무엇일까.

    일부 진보정당의 모습에선 무력감을 넘어 좌절감까지 느껴진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민주노총 소속 톨게이트 노조와 정론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가 돌연 취소한 일이 대표적이다. 그 배경으로 정의당이 최근 집단 입당한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 노조의 눈치를 보고 기자회견을 취소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정미 의원실은 노조의 ‘국토교통부 장관 등의 파면’ 요구에 대한 이견 때문에 취소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노조 쪽의 말은 다르다. 민주일반연맹 복수의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의원실의 요구로 ‘장관 파면 요구’를 삭제하기로 하고 기자회견을 공동주최하기로 했으나 한국노총이 을지로위원회 중재안에 합의한 직후 의원실이 다시 기자회견 취소를 통보했다. 의원실 쪽은 노조에 “상황이 변했다”, “입장이 난처해졌다”며 기자회견을 취소했다고 한다. 당시는 기자들에게 취재요청서도 이미 다 뿌려진 상태였지만 노조는 정정자료를 내고 김종훈 민중당 의원과 함께 했다. 의원실 관계자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SNS상에 떠도는 이야기”, “노조의 일반적 주장”이라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의원실의 해명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정미 의원실이 취소한 기자회견은 “쓰레기” 중재안을 내놓은 을지로위원회와 존재하지도 않는 노사전협의체 합의를 명분으로 자회사 전환을 밀어붙인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이게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의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때로는 당에 우호적인 이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곳이 진보정당이다. 이 정도 수위의 기자회견에도 갈팡질팡하는 정당이라면,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다른 사회 갈등들은 어떻게 중재할 수 있을까. 어떤 유권자가 그런 정당을 유능한 진보정당이라고, 힘은 약하더라도 신뢰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진보정당이라고 평가할까. 이미 많은 노동자들이 정의당이 아닌 민주당을 찾고 있다. 노동문제 중재에 나서는 곳이 번번이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인 이유는, 노동자들이 정의당이 아닌 민주당을 찾는 이유는 단지 민주당이 여당(혹은 제1야당)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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