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괴물'과 무능한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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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07일 12: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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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괴물’ 포스터
     

    "딸이 살아있다는 거죠? 그럼 왜 군대나 경찰, 아니면 TV 방송사나 인권단체에 말해보지 않았습니까."

    개봉 11일만인 6일 관객 600만명을 넘어섰다는 영화 <괴물>(연출 봉준호, 제작 청어람)의 대사 한 구절이다. 병원에 감금돼 검사를 받던 강두(송강호)를 찾아온 미국 인사가 건넨 말이다.

    물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말을 한 미국 인사의 속뜻은 딴 데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이 대사는 그 자체가 중요하게 부각되기보다는 ‘미국의 교활함’, 그리고 이어지는 송강호의 코믹스러운 연기를 뒷받침하는 배경 정도로 지나가는 듯하다.

    그러나 기자에게는 이 부분이 영화 전체 줄거리 전개의 논리적 설득력과 현실적인 핍진함 획득의 열쇠로 보였다. 일개 소시민 가족이 공권력이나 사회시스템을 제쳐두고, 아니 오히려 그들과 싸워가며, 직접 괴물 처치와 현서(고아성) 구출에 나서야 했던 논리적 개연성 말이다. 공권력과 사회시스템으로도 해결 가능한 문제라면 강두네의 ‘자력구제’는 너무 무모하거나 오히려 문제 해결에 장애를 일으키는 ‘가족이기주의’가 될 수도 있다. 반면 ‘해결 불가능’이라면, 누구도 그들의 선택을 탓할 순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직접적인 장면들로 볼 때, 이러한 부분을 설명하는 대목은 의외로 그리 길지 않다. 결정적인 것은 강두가 ‘현서와의 통화’를 설명하다 경찰관의 벽에 부딪치는 장면이다. 결별의 순간은 짧고, 고군분투의 시간은 길다. 선택의 대가는 전재산의 처분과 아버지 희봉(변희봉)의 희생을 포함한 가혹한 것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사건 정황 설명도 없이 무조건 강압적으로 유가족을 대하는 당국,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병원, 합동분향소 ‘그림’이나 잡으려는 취재진 등의 모습을 통해 ‘가족 외부’에 대한 불신이 쌓여간다. 그러나 말단 경찰관(순경)과의 말싸움 한번으로, 공권력과 사회 시스템 일체와 결별한다는 설정이, 70~80년대도 아닌 2002년 대한민국의 현실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질까 하는 의문도 갖게 하지 않을까? 강두네는 딸 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경찰에게 그 흔한(?) 휴대전화 발신자번호를 보여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영리한 봉준호 감독은 이러한 딴죽을 예방하기 위해 강두를 약간 모자란 인물로 설정해 둔 듯하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2003)에서도 ‘공권력’은 영화의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 시민들에게는 강압과 횡포를 부리면서 정작 연쇄살인범을 잡는 데는 무능한 80년대 공권력의 묘사는, 그리 멀지 않게 그 시절을 실제 경험한 관객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다. 그럼 2000년대의 공권력은?

    유감스럽게도 ‘괴물’ 속 공권력의 횡포와 무능은 2006년 한국의 관객에게 별로 괴리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괴물’의 공권력은 거시적으로 미국과 결합해 있다. 미시적으로, 아직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실종자를 바로 사망자 명단에 올린다거나, 방역업체 선정에 뒷거래가 있다거나, 한강 출입통제선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부분도 관객에게 ‘그럴 법한’ 설정으로 여겨진다. 현실의 TV나 신문을 보면 그 정도의 일은 그리 놀랄 사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70~80년대도 아닌 2002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했을 때 ‘대한민국의 현실’엔 공권력만 있는 게 아니다. 8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다. 강두가 있는 병원을 찾은 미국 인사가 ‘군대나 경찰’ 이외에도 ‘TV 방송사나 인권단체’를 언급한 일과 연관된 것이다. 기자는 미디어 업계 종사자로서 이 부분에 더 관심이 갔다.

    만약 실제로 2000년대에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가 벌어진다면 한국 언론이 가만히 있을까. 한국 언론이 어떤 언론인가. 오늘날 한국 언론은 국회의 검증을 거쳐 대통령이 교육 부총리에 임명한 ‘대통령의 남자’도 의혹이 있으면 물러나게 할 만큼 막강하다. 사설과 칼럼에서 대통령과 정부를 조롱하는 일을 일삼아 하는 자칭 ‘비판언론’도 있다. 어떤 언론은 공권력도 생각하지 못한(?) 개인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입수하기도 한다.

    그런데 <괴물> 속 언론은 어떠한가. ‘한강둔치 괴생명체 난동사건’을 중계보도할 뿐이다. 합동분향소에선 유가족들의 ‘엽기 행동’을 취재하느라 바쁘고, 강두네가 병원을 탈출하자 이번엔 ‘도주한 신궁’ ‘세균으로 얼룩진 동메달의 영광’ 같은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만들어낸다. 미국의 발표를 받아 한참 ‘바이러스 위기’를 조장해 시민들을 침 한방울에도 공포에 떨게 하더니 나중엔 역시 미국에서 "잘못된 정보였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하는 장면을 동시통역으로 중계한다.

    그렇다면 <괴물>의 이러한 언론 묘사는 부당한 일인가. 강두네의 가족애가 강조되는 이면에서 애꿎게 명예가 훼손된 것인가. 그러나 기자는 다시 한번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황우석 사태’가 겹쳐 떠오른다. 군사정권의 시대도, 가시적으로 언론을 통제하는 공권력의 시대도 아니었건만, 황우석 전 교수는 정치권-자본-미디어의 공모 속에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성역으로 군림했었다. ‘분명히 현서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항변을 들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일부 PD와 인터넷 매체 기자, 소장 과학자, 네티즌이 강두네 가족의 심경이 되어 고군분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우석 사태 이전에 ‘괴물’이 개봉했었다면, 틀림없이 이 영화 포스터도 황우석 사태 패러디에 활용됐으리라.

    뒤돌아볼 것도 없이 최근 숨진 포항건설노조 하중근 조합원의 사례 또한 그러하다. 정부와 언론이 포스코 점거농성을 맹비난하며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을 때, 집회 과정에서 뇌사를 당한 그의 항변은 들리지 않았다. 그의 휴대전화는 끝내 터지지 않았다. 그에게 2006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캄캄한 한강 하수도에 갇힌 채 혼자서 맞딱뜨려야 하는 무시무시한 ‘괴물’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여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괴물’은 한강의 괴생명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괴물이게 하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부조리한 현실이고 그 거대한 구조다. 어느 영화 평론가의 말처럼 ‘한국 사회의 괴물성’인 것이다. 강두네의 목숨을 빼앗고, 또 강두네가 목숨바쳐 대적한 상대도 괴물 자체가 아니라 그 괴물성이다. 그 괴물성의 한 부분에 언론이 자리한다는 것이 우울하다. 오늘도 열심히 흥행 신기록 행진을 보도하고 있는 그 언론이.

    미디어오늘 이수강 기자 ( sugang@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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