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 성내교회, 아름답고
건강한 지역교회의 모범
[그림 한국교회] 토착민과 북한 이주민, 함께 신앙공동체 이루고 발전
    2019년 09월 30일 10: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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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유교가 왕성했던 경북 풍기에서 성내교회가 어떻게 든든한 역량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장신대 임희국 교수가 집필한 성내교회 100년사 『하늘의 뜻, 땅에 심는 성내교회 100년사』를 읽으며 주목한 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걸출한 목회자들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보았습니다.

우연히 목회자의 중요성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9월 21일 토요일,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출신들이 새로 건축한 교회당의 한 방에서 “아름다운 진실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시대의 횃불 포럼>을 열고, 이 시대에 진실을 구현하기 위한 방안을 진지하게 나누었습니다. 모임 후 저녁을 먹는 음식점에서 담임목사 때문에 3년간 ‘가나안교인’으로 지냈던 선배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담임목사는 유학시절 미국에서 만난 고등학교 선배인지라, 귀국하여 그 분이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며 찬양대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독재자로 군림하고 재정에 비리가 많은 것을 보다가, 원로목사가 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가 심각하여 결국 교회를 떠났답니다. 아예 신앙조차 포기하였다가, 우연히 새문안교회 선배가 부임한 교회에 나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3년마다 담임목사가 바뀌던 그 교회에 평화가 오고,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목자를 만난 덕분에 지금은 신앙을 회복하여 정말 기쁘게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경북 풍기가 발전한 것은 19세기 정감록에 최고의 장소로 알려진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황해도 출신들은 인삼 재배를 주도하였고, 평안도민들은 직조업을 주도하여 지역경제를 일으켰습니다. 한국전쟁 때 더 많은 서북인들이 이주하여 인삼과 직조업이 풍기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희방사를 비롯한 불교 고찰들이 여럿이고, 유교를 숭상하는 풍기 향교와 규모가 큰 소수서원이 있습니다. 민간신앙도 성행하였는데,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이 결실한 것입니다.

1907년, 김기풍과 김창립 등이 예배를 시작하여 1909년 3월, 초가를 구입함으로 풍기교회(1947년 성내교회로 개칭)로 불렸습니다. 토착민과 북한 이주민이 함께 이룬 신앙공동체로 자리를 잡으며 ‘교회갱신과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건강한 교회의 전형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이근복

그런데 성내교회를 튼실하게 세운 담임목사들은 대부분 제가 아는 분들의 선조들이었습니다.

1923년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강병주 목사는 강신명 목사님의 부친입니다. 강신명 목사님은 제가 1971년에 새문안교회 고등부에서 첫 신앙생활을 할 때 담임목사였고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진보적 목회자들과 대학생회의 울타리였고 숭실대 총장을 지내셨습니다. 강병주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3.1만세운동 참여로 8개월간 옥살이를 하였고, 부임 후 교회학교 발전에 힘쓰셨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유일한 목사이사로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하여, 성경과 찬송가의 용어가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개편되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농촌운동 지도자로서 지역사회의 사회, 경제, 문화영역에서 활동하였고, 10년 동안 성내교회는 부흥하였습니다.

1934년에 3대 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는 예장통합의 총회장을 지내고 연동교회의 원로목사이셨던 김형태 목사님의 조부입니다. 김형태 목사님은 교육목회로 연동교회를 든든히 세웠고, 1989년에 조기은퇴 후 국내에 계실 때는 제가 섬기던 새민족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1934년 경안노회는 성내교회에 분란이 일어나자 교회 분립으로 수습한 후, 김영옥 목사를 파송합니다. 김 목사는 1911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후 안동읍교회에 부임하였는데, 1919년 이중희 장로 등과 3월 13일에 시위하기로 결의하나 예비검속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방면되었습니다. 만세운동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크게 확산되었고, 시위 중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168명이나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김영옥 목사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여러 번 고초를 겪었고, 포항교회에서 시무할 때는 신간회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분란이 있던 성내교회는 안정과 화평이 왔습니다. 성내교회는 그의 아들 김은석 목사를 4대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몇 달 동안 부자가 동역하였습니다.

1952년 제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성찬 목사는, 에큐메니칼운동에 헌신하고 숭실대 교수를 역임하고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으로 일하시는 이삼열 박사님과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총무를 지냈고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친구 이승열 목사의 선친입니다. 그는 1938년에 신사참배반대로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복원하고자 만주 심양에 세워진 동북신학교에서 공부하여 안수받고 일하다가 1948년에 인천항으로 입국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교회는 피격되지 않았지만, 겨울에 목재교회당은 군인들이 와서 마루와 벽채를 뜯어가 기둥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곤핍한 시대였지만 그는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1953년 12월에 입당합니다. 1954년에 1월 위임식에서 교회가 담임목사에게 드린 선물은 구두 한 켤레였습니다. 교회건축을 위해 전국 각지를 다니며 발품을 판 목사의 수고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이 목사는 10년 동안 목회하면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교회당을 재건하고 중흥시켰지만, 세 아들을 서울에 유학보내는 것이 만만치 않아서 돼지를 키우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누리는 권세와 부유함과 대조적입니다.

1988년 4월에 제11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최갑도 목사님은 저의 장신대 신학대학원 시절, 이문동교회 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할 때 부목사이셨습니다. 부드럽고 창의적이고 친절하여, 우리 동기생 셋은 즐겁게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 12월에 31년 동안 사역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된 최 목사님 시절에, 성내교회는 많은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선교도구라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목회철학으로 세운 최 목사님의 입장은 지역사회를 섬기는데 바탕이 되었습니다. 예배갱신과 교육과 목회적인 돌봄으로 내실을 다지는 한편,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한 사역들을 추진합니다. 전인적으로 건강을 돌보는 목회간호사 제도, 여성장로 장립, 봉사와 문화적 혜택을 베풀기 위한 사회봉사관 건립, 도서관 개설, 작은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성내선교교육원, 역사박물관 등을 통하여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지난 8월 20일, 성내교회 100년사의 저자인 임희국 교수님과 둘러본 역사박물관에는 한국교회사적으로 소중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전쟁 때, 항아리에 숨겼다는 초대 당회록, 1930년에 사용한 찬송가 등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신앙인들의 고귀한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최 목사님은 성내교회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성내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으면서 풍기지역에 말씀고백과 섬김, 나눔의 실천운동을 계속 전개하고자 한다. 이제 성내교회는 이웃과 사회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봉사할 책임이 있다.”

그날 만난 최효열 담임목사님은 3일 전에 위임예식을 한 분이었습니다. 성내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더욱 건실한 지역교회로 발전하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하였습니다.

필자소개
이근복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교회활력화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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