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북한이다?
    2006년 08월 06일 11: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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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에는 영화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영화 관람후기 성격임을 밝혀둡니다.

<괴물>은 매우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만드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가족영화, 미국비판 영화, 반신자유주의영화, 환경영화, 운동권 후일담/추억담영화, 그리고 ‘괴물’ 영화 등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영화 전편에 무리없이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괴물’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괴물’이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좌우파 모두를 향한) 정치적 냉소주의의 결정판"이라고 합니다. "항상 문제를 만드는 우파, 아무 문제도 해결 못하는 좌파, 그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모험을 하듯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 혹은 도시 빈민들"의 모습이 이 영화에서 드러나있다고 말합니다.(씨네 21에 정성일씨의 장문의 영화평이 실립니다.)

이글은 이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괴물’을 읽고 있습니다. ‘괴물’을 보신 분들 가운데 영화 관람기를 보내주시면 실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만인은 만인에 대한 적이요,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가 된다.” – 홉스, [리바이어던], 1651.

영화 ‘괴물’을 봤다.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역시 미제국주의에 맞설 무기는 ‘꽃병’과 쇠파이프 뿐이야”라고 외쳤다. 그런가?

봉준호가 ‘괴물’을 그릴 때,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봉준호에게는 그의 괴물이 있을 것이고, 천만 명씩 보는 상업영화에는 천만 개쯤의 괴물이 있게 되지 않겠는가. 앞으로 몇 달, 밉살스런 상사나 동료, 빚 독촉하는 카드 회사, 살 맞대기 끔찍한 남편이나 아내가 괴물이 되어 주겠지.

   
 

내가 보기에 ‘괴물’은 북한이다. 괴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사회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주인공 가족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이리저리 도입해보면 ‘북한’이라는 정답이 나온다. 외세가 만들고, 사실은 아무 ‘바이러스’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람들을 옭죄는 통제수단으로 이용되고, 한편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괴물은.

괴물은 외세의 부당한 개입과 그에 대한 굴종이 만들었다. 나는 한반도에서 두 개의 국가가 생기는 것이 일제 시대 때부터 있었던 내부 모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표현이 쉽지 않은 영화는 미군이 포르말린을 흘려버린 데서 괴물이 생겨난 것이라고 통속적으로 설명한다. 물론 남한인 군속도 종범 역할을 하고.

한강이 괴물을 키우고, 괴물은 한강을 벗어나지 않는다. 남과 북이 서로의 존재에 의존해 그 존재 가치를 유지하듯이, 고도성장한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인 한강은 괴물의 숙주(The host : ‘괴물’의 영어 영화명)가 된다. 처음 출몰할 때는 뭇짐승들처럼 밤섬에서 놀더니만, 나중에는 기괴스런 한강 구조물을 주무대 삼고, 자본주의 하수구에 둥지 튼다. 그래서 ‘괴물’이다.

영화에서 남한 정부와 미군은 괴물을 잡거나 막거나, 혹은 제 살 데로 보내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회는 괴물 그 자체보다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을 더 적대시한다. 왜? 작은 괴물보다는 괴물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가 두렵고, 바이러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그 사실을 감추기 급급해서다.

북에 나포되었던 어부나 이북 사람을 만난 외국 여행객이나 포장마차에서 ‘김 장군님’ 얘기를 한 주정꾼을 ‘격리 보호’한 후 뇌 조사를 하지 않고는 베겨나지 못하는 남한 정부의 레드 콤플렉스는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사팔뜨기 미국인 의사는 바이러스가 없다는 사실을 숨기지만, 배운 거 없고 무식한 주인공은 “No virus”라는 한 마디만으로도 진실을 알아챈다. 남한 민중으로 살아온 지 어언 수십 년, 그 정도 눈칫밥은 대한민국 국민됨의 요건이지 않겠는가.

괴물은 움켜쥐는 꼬리와 먹이를 낚아채는 긴 혀를 가진 모습이다. 딱 카멜레온이다. 카멜레온은 파리 모기 먹는 약한 짐승이고, 그래서 남한 정부나 미군은 굳이 잡으려 애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강을 벗어날 수 없는 힘 없는 사람들에게 괴물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괴물은 한강에서 매점하는 주인공 가족과 방역회사 노동자, 집 없는 아이들을 잡아먹는다.

주인공 가족에게는 두 개의 전선이 있다. 자신들을 잡으려는 정부 봉쇄선이 첫째 전선이고, 괴물과의 대치선이 둘째 전선이다.

처음에는 강가에 놀러온 모두가 괴물의 희생물이었지만, 한강 봉쇄선이 생긴 이후에는 강 유역에 소외된 사람들만이 괴물의 먹이감이 된다. 따라서 봉쇄선 밖의 안전한 사회는 괴물보다는 ‘바이러스’를 가진 내부의 적을 더 불온시하여, 주인공 가족을 수배하고 고발하고 추적하고 가두고 고문한다. 봉쇄선 너머의 북한에는 쌀을 보내도 좋지만, 바이러스 전파자인 전교조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박살내야 하는 이유도 같다.

오리 배를 타고 놀던 강은 ‘소통’이었지만, 괴물이 버티고 있고 군경이 막아선 강은 ‘단절’이다. 주인공 가족에게 한강은 공무도하가의 강이거나 임진강이다. 하지만 어쩔거나. 거기 손녀이며, 조카이며, 딸인 어린아이가 잡혀 있는 것을.

무엇이 괴물을 이기는가?

미군의 세균전 무기는 괴물을 죽이지 못한다. ‘에이전트 옐로우’를 처음 맞은 괴물은 쓰러지지만, 한 번 더 뿌리니 다시 일어나 날뛰고, 애꿎은 사람들이 피 흘린다. 미국의 경제봉쇄에 미사일 발사로 응답하는 북한처럼, 불안한 동북아 인민들처럼. ‘업자’들에게 돈 주고 산 총 역시 괴물을 퇴치하지 못한다.

   
▲ 포항건설노조 조합원 가족들이 포스코 본사에 있는 조합원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려 했지만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물론,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괴물을 죽인다. 하지만, 운동권 향수에 젖지 않은 대개의 사람들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를 보게 될 것이다. 화염병을 던지는 삼촌, 불화살을 날리는 고모, 쇠파이프를 꽂는 아버지.

그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드는 이유는 단지 가족이기 때문이다. 혈연 아닌 어머니가 빠진 순수한 가족이 그들이다. 온 사회가 그들을 배제해도, 배제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보살피고 나눈다.

가족을 먹여 살리던 할아버지는 평생 번 재산을 털어 손녀를 구하려 나서고, ‘왕따’ 아버지를 감싸고, 가족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 덜 떨어진 아버지는 딸에게 새 핸드폰을 사주기 위해 ‘삥땅’을 하고, 조카 핸드폰의 위치추적을 하던 삼촌은 경찰에게 쫓겨 다리에서 떨어진다. 언제나 머뭇거리던 고모는 조카를 위해 과감히 화살을 날린다.

그리고 그들은 먹거리를 나눈다. 살아 있다는 전화에도 주저하던 가족이 병원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은 괴물에게 잡혀간 어린아이가 배 주리고 있으리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삶은 계란, 소세지, 만두 등속을 건내고, 아이는 능청스레 넙죽넙죽 받아 먹는다. 돈도 서비스도 아닌 밥을 나눈다. 가족의 염원이고, 어린아이의 꿈이다.

노무현 정부는 포항 ‘노가다’들에게 전해주려던 가족들의 밥을 막았다. 조선 시대 감옥에서도 가족이 넣어주는 밥을 막지 않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막았다. 아프리카 들개들은 병든 무리에게 먹잇감을 토해 주지만, 노무현 정부는 동족을 굶겼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밥을 나누지만, 먹고 먹히는 관계일 때는 어느 한 편이 밥이 되어야 한다. ‘노가다’들이 사람이 아니거나, 노무현네가 사람이 아닌 것이다.

현생하는 한반도 주민의 기억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국가 – 일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은 목숨을 부지시켜 주기는커녕, 수백만 인민을 도륙한 괴물(leviathan)이다. 결국 몸 붙일 유일한 피난처는 가족 뿐이다. 따라서 가족주의는, 한반도 거주민에게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경험이 낳은 최선의 합리적 선택이다.

   
 ▲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남한 자본주의의 오늘이 국가 동원으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한강의 기적’은 가족이라는 자발적 동기 부여와 국가의 합작품이다. 장시간 노동, 저축율, 진학률 – 으레 ‘세계 최고’라는 접두사가 자동으로 따라붙는 세 현상 모두는 가족의 안위를 위한 비이성적 노력과 희생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괴물’도 괴물이고, 사회도 괴물이고, 가족의 내일도 괴물이다.

가족주의는 계급단결이 아닌 지역주의, 산업노조가 아닌 기업노조와 같은 소집단주의로 발전했다. 가장 대자적이어야 하는 노동운동조차도 가족주의 틀 안에서 발전해왔다. 아이에게 들어가야 할 과외비는 단위기업에 대한 임금인상요구율과 비정규직 근로조건에 대한 묵인으로 발현한다.

영화 말미에서 ‘괴물’은 가족으로부터 슬그머니 벗어난다. 괴물의 아가리에서 딸을 끄집어낸 아버지는 죽은 딸을 부여안고 울부짖는 대신 딸이 보살피던 사내아이를 보듬어 살려낸다. 그리고 눈 오는 겨울밤, 주워온 아이에게 따뜻한 흰쌀밥을 지어 먹인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 김지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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