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심 전달한 걸 권력투쟁이라니요"
        2006년 08월 05일 03: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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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거취 및 후임 법무장관 인선에 대한 여당의 문제제기와 관련, 노무현 대통령의 반발 강도가 예상보다 세다. 최근 청와대 이병완 비서실장, 박남춘 인사수석이 여당의 태도를 강력히 비판한 데 이어, 4일에는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입을 통해 노대통령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강경한 노대통령 "이건 권력투쟁이다"

    <한겨레> 5일자 보도에 따르면, 노대통령은 인사권 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당청갈등을 ‘권력투쟁’으로 규정했다. 이어 "대통령 한 번 하려고 그렇게 대통령을 때려서 잘 된 사람 하나도 못 봤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해 여당이 일부러 문제를 키우고 있다는 인식이다.

       
    ▲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연합뉴스
     

    노대통령은 자신의 인사권 문제에 대해서도 원론을 재확인했다. "인사권은 대통령이 가진 마지막 카드로, 이것을 흔들고 무력화시키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후임 장관 인선과 관련해서도, "내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을 계속 기용할 것"이라며, 인사권이 대통령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했다

    노대통령은 ‘탈당’ 문제도 언급했다. "나더러 나가라고 하지만 절대 탈당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어 "나갈 사람들은 자기들이 나가면 된다. 싫으면 자기들이 나가면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악의 경우 당내 반대세력과의 결별도 불사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당청간 투쟁구도를 당내 투쟁구도로 바꾸겠다는 의도도 읽힌다.

    노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지난 2일, 김 부총리가 사퇴 의사를 밝힌 직후 청와대 관저에서 핵심 참모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왔다. 이병완 비서실장, 박남춘 인사수석의 대여 공격이 노대통령과의 교감을 통해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적중한 셈이다. 노대통령의 발언은 말 그대로 초강경이다.

    당혹감에 빠진 열린우리당

    노대통령의 발언을 접한 여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근태 의장의 한 측근은 "김 의장이 2일 발언 이후의 사태 전개에 대해 무척 곤혹스러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의장이 언론에게 당했다"는 항변도 나왔다. "김 의장은 코드인사를 옹호하는 발언을 주로 했는데, 기자들이 묻기에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한 걸 이렇게 키웠다"고 했다. 또 다른 측근은 "당청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수구언론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노대통령의 상황 인식에 대한 반발감도 엿보인다.

    우원식 수석 사무부총장은 "당은 민심을 전달했다. 그 방법은 공개적일 수도 있고 비공개적일 수도 있다."면서 "민심을 전달한 것을 두고 ‘권력투쟁’이라고 하면 되겠나"고 했다. 주요 당직을 맡고 있는 또 다른 의원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며 "(권력투쟁은) 대립, 갈등, 투쟁의 변증법적 사고를 좋아하는 노대통령다운 표현법"이라고 냉소했다.

    ‘문재인 비토론’도 한 풀 죽는 모양새다.

    이목희 전략기획위원장은 "문 전 수석은 개혁적이고, 능력 있고, 청렴한 사람"이라며 "개인적으로 문 전 수석의 법무장관 임명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또 "문 전 수석이 법무장관에 내정되도 당청간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그런 게 정치 아니냐"고 했다.

    민심 전달한 걸 가지고 권력투쟁이라니

    이화영 의원도 5일 오전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정권 후반기에, 특히 대선정국에 법무부장관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런 부분에서 소위 문재인 카드의 유용성, 이런 부분에 대해 당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치적 대응에서 절차적 대응으로 강조점이 바뀌는 흐름도 엿보인다. 이른바 인사청문회 활용론이다. 물론 인사청문회를 통해 부적격 판정을 내리더라도 법적 구속력은 전혀 없다.

    우원식 수석 사무부총장은 "당은 의견을 전달했고, 선택은 대통령 몫"이라며 "대통령이 판단을 하면 그 이후는 정해진 절차대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장영달 의원도 "장관 내정은 대통령의 권한"이라며 "국회는 인사청문회를 통해 검증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병호 제1정조위원장은 "문 전 수석이 훌륭한 분이라고 하지만 업무 능력과 관련해서는 검증할 것이 많다"며 "참여정부의 가장 큰 실패는 인사정책의 실패인데, 문 전 수석은 인사정책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인사청문회를 통한 ‘호된’ 검증 말고 다른 대응 수단도 마땅치 않다. 

    수도권 지역 초선의원은 "노대통령은 탈당하지 않겠다고 했고, 우리가 지금 당을 깨고 나갈 수도 없는 것 아니냐"며 "정치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서로 갈라서기 전까지 당은 당의 목소리를 내고, 청와대는 청와대의 뜻대로 가는 거지 별 수 있겠느냐"며 푸념했다.

    갈라서기 전까지 자기 목소리 내는 수밖에

    물론 노대통령이 문 전 수석을 법무장관으로 기용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와 관련, <한겨레>는 5일 보도에서 "문재인 전 수석은 여전히 유효한 카드지만, 아직 검찰 내부인사로 할 것인지 외부인사로 할 것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라며 "(문 전 수석을) 시킨다, 안 시킨다 방침을 정하지도 않았는데, 여당이 기정사실화해 미리 막은 것이 문제"라는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 노무현 대통령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연합뉴스
     

    다만, 정치적 득실만을 놓고 본다면 노대통령이 문 전 수석의 기용을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어 보인다. 노대통령이 받을 정치적 타격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당청관계는 지금도 이미 최악의 상태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반대 세력이 당을 깨고 나갈 여건도 아니다. 한나라당 등 야당의 반발도 새삼스럽지 않다. 국민적 여론도 더는 떨어질 곳 없는 바닥이다. 한미FTA 등 주요 국정과제의 경우 민주노동당을 제외하면 여야 정치권이 자발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정치적 불화와 정책적 공조의 동거는 우리 정치의 해묵은 관행이다.

    결국 대국민관계, 대여관계, 대야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이미 최악의 상태에 있는 노대통령으로서는 문 전 수석을 기용한다고 해도 별로 잃을 게 없다.

    반면 문 전 수석을 기용하지 않을 경우 노대통령이 입을 피해는 한결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해 여당이 개입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는 셈이 된다. 당청관계에서의 주도권도 완전히 내주게 된다.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한 각종 ‘도발’도 잦아지고 수위가 높아질 공산이 크다.

    더 잃을 게 없는 노대통령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문 전 수석을 기용하거나, 문 전 수석을 기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사권 문제에 대해서는 여당이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도록 단단히 쐐기를 박는 선에서 노대통령의 선택지가 결론날 가능성이 크다.

    노대통령은 6일 청와대에서 여당 지도부와 오찬을 갖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인사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은 대응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노대통령은 선택의 폭이 넓은 반면 당분간 여당의 간판이 필요한 열린우리당은 선택의 폭이 좁다.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사의를 관철시키면서 여당이 기세를 올리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세역전의 계기가 된 건 김근태 의장의 2일 발언이다. 김 의장의 발언이 의도적인 도발이었는지 실수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정치에서 명분과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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