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이런 독립영화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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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05일 09: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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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서울아트시네마와 필름포럼 등지의 예술영화관에서 영화를 볼때면 이런 영화는 우리 독립영화계에서도 만들어져야 하는데, 혹은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인데 라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그것은 그 영화에 대한 부러움과 존경을 포함해서 우리 독립영화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일 것이다.

    물론 그들의 영화 환경과 우리의 환경이 같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일본이나 유럽에서 과거에 만들어졌던 형식파괴와 도발적인 상상력 그리고 진보적 가능성으로 무장한 영화들을 접하면 한국에서는 주류영화계에서도 독립영화계에서도 그런 시도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내게 <레디앙>의 지면은 우리 독립영화들을 소개하는 곳이라고 생각되지만, 독립영화에 대한 글을 써도 정작 그 영화들을 영화제 이외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극장은 물론 불법 다운로드로도 볼 수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영화들을 소개하고 그 영화들에 대해 짧은 코멘트를 덧붙인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자괴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본 영화 중 상당히 가슴을 울렸으며, 우리 독립영화계에서도 만들어졌으면 하는 영화를 소개할까 한다.

    이 영화가 절대적인 기준을 될 수 없겠으나, 나름의 반면 교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난 월드컵 기간에 필름포럼에서 "스위스 영화제"가 열렸다. 스위스는 한국과 함께 16강을 다퉜던 G조에 속해 있었고, 나는 스위스영화제에서 알렝 타네 감독의 <2000년에 25살이 될 요나>(1976년, 스위스)를 뒤늦게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30년전에 이미 이런 영화를 만든 스위스를 응원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로 좋았다고 누군가에게 이야길 했다.

    물론 간사하게도 한국을 응원하고 말았지만, 그만큼 그 영화가 보낸 메시지가 강렬했고, 정말 한국이 싫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76년 영화인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는 "68혁명"이후를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는 프랑스의 68년 5월 혁명이 일정하게 실패로 결론 지어지고, 프랑스와 인접한 스위스 역시 만성적인 실업과 인플레 등으로 민중들의 삶은 질곡 속에 빠져들고 있는 시기이며, 지식인들은 실패를 낙담하며 좌절로 빠져들던 시기였다.

    영화는 담배가게에서 담배를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담배를 사는 사람은 왜 담배가 지난번보다 비싸졌나고 묻는다.

    점원은 인플레 때문이라고 말한다. 할 수 없이 돈을 지불하고 담배를 사는 사람들. 저항의 몸부림이 지나가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인플레라는 단어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담배를 살 수 밖에 없는 풍경. 한미FTA 체결 후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에는 흥미로운 괴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단히 진보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직업을 갖고 있지만, 필연적인 이유로 만나게 된다.

    이 인물들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프랑스 혁명 시기 저널리스트였지만 지금은 남의 글을 교정보고 있는 맥스. 진보적 저널리스트였다가 이제는 남의 글이나 고치고 있다는 푸념 섞인 그의 말에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탄식이 묻어있다.

    하지만 그는 금융업자들이 개발이 예정된 시골농장을 무작위로 사들여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엄청난 차액을 챙기는 것을 알아내고, 농민들에게 땅을 팔지 말 것을 권유하고 다닌다. 그 이유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 위해서이다.

    그는 기어코 농부의 집에 찾아가서 얼마뒤 금융업자가 찾아와 땅을 팔라고 하면 절대 팔지 말라고 권유한다.

    모든 농부들에게 일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는 마르그에리트 부부는 금융업자가 찾아오자 너희들이 고래도 그렇게 죽였다면서 그를 조롱한다.

    또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묻고 노래나 듣고 가라고 하곤 신나게 노래를 불러주고 이제 썩 나가라고 한다. 고래를 노래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마르그에리트와 그의 아내 그들은 자유분방한 농부들이다.

    그리고 그 농부의 집에 일자리를 찾아온 마르셀. 그는 일자리를 얻지만 주인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온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농군 부부는 그에게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학교에 맡기고, 당신은 당근이나 캐라고 말하자. 아이가 당근보다 못한 존재냐며 반항을 하기도 한다.

    또한 학교에서 순대(소시지)를 꺼내놓고 역사의 결과 굴곡에 대해 가르키는 진보적 지식인 마르코. 그는 농민에게 찾아가 도대체 인플레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자신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강연을 요청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이 캐릭터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과 비교되기도 했는데, 키팅 선생이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용기와 진실을 이야기했다면, 마르코는 철학적으로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능력만이 아니라 주변인물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물론 그는 이런 교수법 때문에 학교에서 번번히 해고당한다.

    스위스에 살면서 프랑스의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일하는 마리. 그녀는 손님들이 계산대에 놓은 상품들 중 일부를 의도적으로 계산에서 누락시킨다. 상품값의 일부만을 받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연로해서 일하지 못하는 과거의 철도노동자와 대형마트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나눠먹고 그와 진심어린 대화를 나눈다. 돈을 내고 사왔냐는 질문에 마리는 "물론! 일부만" 나머지는 할아버지의 연금이라고 생각하라고 이야기한다.

    마리는 교사인 마르코에게도 돈을 제대로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친해지게 되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기도 한다.

    여기 이 인물들은 스위스 자본주의 안에서 살면서, 자본주의에 근본적으로 반항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68혁명의 실패 이후 실제 68혁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 그들의 후손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공동체를 이루며 자생적 교육 체계를 만들어가던 마르셀은 딸인 "요나"를 낳는다. 하지만 그는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해고 당하고 만다.

    나름대로 해방의 공간에서 자율적인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들이지만, 그 공동체는 영화의 전개에 비하면 상당히 사소해 보이는 이유로 인해 해체될 운명을 맞는 것이다. 당장 일을 해서 당근을 캐야 하는 것이 아이의 교육보다 중요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을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경제적 빈곤과 압박은 모든 공동체를 궁지에 몰아넣고 개개인의 연대를 가로막는다.

       
     

    마르셀은 추운 겨울날 자전거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가면서 자신의 딸 요나에게 이런 현실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25살이 되는 2000년엔 절대로 이런 현실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영화는 다섯살이 된 요나의 모습을 정지된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끝난다.

    1980년대에는 지금과는 달라야 하고, 2000년에는 지금의 현실을 변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980년대의 현실이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바로 앞 장면에 등장한다.

    영화의 첫 장면과 똑같은 담배가게에서 손님과 점원은 똑같은 대화를 나눈다. 다만 담배값이 5배 정도 올랐다.

    현실을 변혁하지 않는다면 우린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도 불편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마치 미래를 보여주는 SF영화같은 제목을 갖고 있는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는 미래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보다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는 영화이고 지금의 현실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하는 영화이다.

    미래를 직접 보여주는 영화들이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비전을 여러 특수효과를 동원해 마치 현실인 것처럼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미래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지금과 같은 이 현실을 우리가 스스로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내 딸에게 이런 더러운 현실을 물려줘야 한다는 외침에 가깝다. 이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30년전 스위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많은 농지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공권력의 폭력과 함께 강제로 내쫓기고 신도시로 혹은 미군부대로 건설되어지고 있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에 최저임금과 상급직원들의 감시 속에서 일하고 있다. 학생들은 고강도의 교육을 받고 있지만, 입시를 위한 신분상승을 위한 교육을 받을 뿐 진실을 배울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다.

       
     

    물론 우리 주변에도 영화 속에서처럼 멋지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마리와 같은 대형마트의 노동자가 있을 것이고, 마르코처럼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생님이 있을 것이며, 마르셀과 같은 투지를 갖은 인물이, 맥스와 같은 좌절한 언론인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런데 우리에게 지금의 현실을 변혁하지 않는다면 2026에 혹은 그보다 가깝거나 먼 미래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보여주는 영화가 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괴물>? 환경오염을 그냥두거나 미국놈을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 옆에 괴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올드보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면 미래에 어떤 가혹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다.

    이 영화들을 비난하거나 주류 상업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생각은 없다. 우리 독립영화에 우리의 현실과 더불어 미래를 고민하는 이 정도의 영화가 이쯤에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에 하는 말이다.

    지금 한미FTA가 체결되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설파할 수 있는 영화라면 어떨까. 한미FTA의 문제점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상상의 영역을 끌어와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조망할 수 있다면. 물론 스위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영화가 나온다고 당장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를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환경을 탓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시대를 반영하는 미래에도 볼 수 있는 영화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도 그런 영화를 보고 싶다.

    참. 그런데 정작 짜증나는 문제는 이미 만들어진 영화도 못보는 현실이 아닐까? 정작 이 영화도 한국에선 어떤 매체로도 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나와 있는 독립영화도 못본 사람이 너무 많다는 안타까움.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봐야 하는건지 다시 자중지란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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