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의 홍보전략과 서민마음 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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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05일 08: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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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삼분지계가 지금으로 말하면 전략이고, 도원결의는 강령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유비 3형제에게는 인민들을 흡입할 명분도, 힘도 없었다. 원소는 명문대가의 자손이니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조조는 환관의 자식으로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고, 난세의 유능함과 정치적 판단력으로 황제를 등에 업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킨다.

    유비 복고적 행태 비판과 가리발디 그리고 호치민

    손권은 원래 자신의 영지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북의 주인이 정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 3형제에게는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 전혀 없었다.

    유비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산인 중산정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이용한다. 중산정왕은 한나라 효경황제의 현손인데, 유비는 중산정왕의 16대손 정도 되는 것 같다. 한나라 왕실과 관계를 이용하는 유비의 복고적인 행태에 대해서 그 반동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 청나라 때의 유비의 초상화
     

    그러나 모든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왕정이 반동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공화정의 옹호자였던 가리발디가 왕정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 시점에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 더 중요해서였을 것이고, 호치민이 바오다이 황제와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민족의 독립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왕조의 부흥은 실제로는 유비가 황제가 되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황제가 조조의 품안에 있는데 한왕조를 부흥한다는 것은 결국 조조와 싸운다는 것이고, 그 방법이 천하삼분지계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결말은 그것이 성공한다면 마치 이성계처럼 천명이 유비에게 있으니 새로운 왕조를 만드는 것으로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왕실의 후손이라는 유비의 홍보는 당시 인민들에게 유비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했지만, 감옥에 사람이 많아야 관리들이 제대로 일을 한다고 평가한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 황제의 태도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놀라운 시각이다.

    민중적 관점에서 본 한나라 초기 조세정책

    이에 반해서 한나라는 초기부터 비교적 안정된 통치를 했는데, 민중의 관점에서 두 가지 점은 평가할만하다. 하나는 전세를 경감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육형(肉刑) – 신체를 절단, 훼손하는 형벌 – 을 폐지하였다는 점이다.

    중국과 같은 봉건국가에서 인두세와 전세가 기본인데, 특히 전세를 경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고,(당시에는 누진세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전세 경감은 지금과 같은 의미의 증세, 감세논쟁과는 다른 것이다. 제대로 된 누진세가 등장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이다.) 코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혹형이 횡행하던 그 시절에 신체를 절단, 훼손하는 형벌을 폐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선진적인 것이었다.

    한무제가 균수법, 평준법과 염철에 대한 전매제를 실시하고 대외 원정을 단행하던 시절에는 상황이 달라지지만, 한나라 통치의 영향은 인민들에게 그 향수가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 때문에 삼국지에 등장하는 야심가들도 원술처럼 정신 못 차리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한나라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은 쉽게 하지 않았다.

    유비는 한나라 황제의 후손이고, 조조로부터 핍박받던 헌제가 아저씨로 대우해주니 이를 활용하면서 사람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유비가 얼마나 덕이 있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백성들은 힘도 없는 유비를 따라가기를 원했고, 이 때문에 유비는 상당한 곤경에 처하게 되지만, 크나큰 명분을 얻게 되고 이 때부터 기대주로서 전국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사회주의’ 구호와 국민생각 타고넘기

    유비가 한왕실을 이용한 것은 궁색한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어떠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이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예로부터 정치의 정도일 것이다.

       
     ▲ 모심기를 하고 있는 박정희 ⓒ연합뉴스
     

    그런 면에서 자신이 주창한 강령을 잘 모른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도 문제지만, 생경하게 ‘사회주의’라고 구호만 반복하는 것도 사실은 무책임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민들은 보수언론의 여론조사결과를 보아도 정치, 문화적 이슈에 관해서는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반면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해서 상대적 진보성을 보이고 있는데, 진보진영이 원칙 없이 행동해서는 안 되지만 국민들의 이러한 정서를 유리하게 이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박근혜씨의 청와대 입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 이는 역으로 한국진보운동이 전체적으로 무능하여 박정희의 유산이 아직도 사회 곳곳을 잠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소농의 자식이자 막걸리와 모내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인 그는 사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친일지주계급의 정당인 한민당에 연원을 두고 있는 보수야당이 정상적인 선거에서 이기기 쉬운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99칸 집에서 살았다던 윤보선보다 소농의 자식인 박정희를 농민들이 63년, 67년 지지했던 것은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농촌은 피폐화시켰지만 농민의 자식들에게 급격한 신분상승의 가능성이라는 무한한 기회를 주었던 그는 분명 한국의 나폴레옹 같은 정치적 존재였던 것이다.

    99칸 집 살던 윤보선과 소농 자식 박정희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시대의 극복은 과거사청산 – 물론 이것도 필요하다 – 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를 넘어서서 진정으로 인민의 마음을 얻는 정치세력이 등장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립묘지 격인 팡테옹 – 입구에 루소와 볼테르가 묻혀 있다- 에 묻혀 있는 프랑스 사회당의 창건자인 장 조레스의 부조 기념물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회주의자 내지 정치가라는 명칭보다는 “인민의 호민관, 서민의 보호자”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만약 민주노동당이나 그 주요한 인물이 국민들에게 이러한 칭호를 듣는다면 아마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실질적으로 청산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2002년 대선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어눌한 말투지만 신실하게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하면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역설할 때, 민주노동당의 드높은 강령은 국민들의 마음을 1%라도 움직인 것이다.

    대선투표일에 민주노동당 중앙당으로 걸려온 50대 남성의 절절한 질문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에 대해서 “가능하냐”가 아니라 “진심이냐”였던 것이었다. 2004년 총선 당시 최순영 의원이 쓴 박근혜에게 쓴 구구절절한 편지에 대해서 아마도 한나라당 지지자로 보이는 50대 남성은 “나도 힘들게 노동했지만, 우리 마음을 아는 사람 같다”고 했던 것이다.

    "가능한가" 묻지 않고 "진심인가"를 묻는 대중의 속깊은 뜻 헤아려야

    비근하게는 쌀 협상 날치기에 맞서 온몸을 던져 절규하던 모습은 민주노동당의 신참인 강기갑 의원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든 것이었다.

    쇼(?)라도 좋으니 인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모습을 보고 싶다. 혼자 사는 아이가 개에 물려 죽고, 의료비가 없어 애가 굶어 죽고, 전기료를 못내 촛불 켜고 살던 장애인 부부가 불타 죽는 GDP 10위, 수출 5천억불, 외환보유고 2천억불, 1인당 GDP 2만달라(구매력기준)의 나라에서 인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활동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그 많은 민주노동당의 입법발의 중 상가임대차보호법의 10%만큼이라도 인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없다는 사실보다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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