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 기후위기, 돼지농장
    [낭만파 농부] 이럴 때가 아니지만···
        2019년 09월 23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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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호 태풍 ‘타파’는 지금 제주도 오른쪽 바다를 지나고 있다고 한다. 그 분이 오기도 전인 어제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가 내리 이어지고 있다. 물폭탄이 떨어질 거라더니 정말 그럴 모양이다. 아직은 살랑대는 바람, 그대로 고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9월도 거의 다 가고 가을걷이를 코앞에 두고 큰비가 내리니 심란하기만 하다. 널어놓은 녹두며, 고추, 참깨 따위가 빗물에 흠씬 젖어버린 것도 속상하다만 또 어떤 피해가 빚어질지가 더 큰 걱정거리다. 가뜩이나 농사일 말고도 곁가지로 벌어진 일이 한 둘이 아닌 터다.

    태풍을 비롯해 세상을 벌컥 뒤집어놓는 자연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다. ‘천재지변’은 인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재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만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갈수록 더 자주, 그리고 더 세게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그 큰 책임이 인류에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것을 상징하고 함축하는 용어가 바로 기후변화 아니겠나.

    이번 태풍이 온실가스-지구온난화-기후변화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제 하루만큼은 한 묶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담을 앞두고 세계 전역에서 동시에 열린 <9.21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바로 그것. 여기서는 전주 남천교에 자리가 마련됐다. 태풍 타파가 몰고 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서도 집회장을 향했다. 주최단체가 나눠준 골판지로 손피켓을 만들어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고 집회는 마무리됐다. 빗줄기는 내내 주룩주룩. 그 바람에 우리 동네에서는 병수 형님하고 달랑 둘이서 길을 잡았더랬다.

    기후위기 긴급행동(전주 남천교)

    야속한 가을비. 그나저나 이 비 때문에 일을 망친 곳이 여럿이다. <기후변화 비상행동>도 그렇지만 가을 한복판 주말, 잔칫날로는 그만이었을 거고 너도나도 택일을 했을 테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래도 집회를 마친 우리는 빗발을 뚫고 ‘비가 와도 예정대로 한다’는 동네 잔치판으로 향했다.

    “재미없으면 자기 탓!”이라는 도발적인 슬로건을 내건 <바보들의 축제>(‘Stay Foolish’라는 원제는 솔직히 무척 거슬린다). 이 고장 뮤지션들이 ’제멋대로‘ 즐기자고 만든 음악공연이다. 공연을 보러 오든 말든, 재밌든 말든 알 바 아니란다. 당연히 입장료은 없고, 후원하면 고맙고 안 해도 그만이다. 그래도 저녁밥(‘백인의 밥상’)과 생맥주를 공짜로 주는 착한 잔치판.

    <바보들의 축제>(‘Stay Foolish) 모습

    전날 밤엔 날도 좋고 바람도 선선해 큰 성황을 이뤘다. 밤이 이슥토록 광란의 춤판이 펼쳐졌더랬다. 하지만 오늘은 이리 굵은 비가 쏟아지니 어렵겠지. 그래도 진행요원들이 무대와 객석 곳곳에 자바라텐트를 펼쳐 응급조치를 해두었다.

    저녁때가 되자 뜻밖에도 우산을 받쳐 쓴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 전날만큼은 아니지만 장대비야 보란 듯이. 천막 위에 고였던 물이 쏟아져 그야말로 ‘물폭탄’이 터져도 사람들은 즐겁기만 하다. 내리치는 빗줄기 속에서도 사운드에 취해 몸을 흔든다.

    그런데 사실 말이지 내 처지가 그리 녹록치가 않다. 몸뚱이는 이렇듯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지만 마음은 늘 그 놈의 돼지농장에 붙들려 있다.

    9월초로 접어들면서 군청 앞 천막농성은 한 달을 채웠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지역주민이 힘을 보탰다. 하루 적게는 열댓, 많게는 마흔 가까운 이들이 농성을 함께 했다. 연인원으로는 5백명에 이르는 숫자. 그 열기에 스스로들 놀랐고, 업체쪽은 그 기세에 눌려 농장 재가동 관련한 인허가 신청서를 낼 엄두를 못 냈다. 물론 재가동을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닐 테고 잠시 상황을 두고 보자는 뜻일 거다.

    아무튼 우리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로서는 ‘인허가서류 제출 저지’라는 일차 목표를 이루었고 지역주민들의 투쟁의지를 끌어 모으는 성과를 거뒀다. 여세를 몰아 천막농성을 이어갈 힘도 넉넉하지만 일단 천막을 접기로 했다. 그 대신 최종 결정권을 쥔 그룹본사를 압박하는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먼저 그룹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일주일 동안 말미를 주고 두 차례나 공문을 보냈지만 아직 응답이 없다.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지, 나름 신중히 고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에도 회신이 없으면 직접 찾아 나설 수밖에 더 있겠나.

    사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을걷이 제대로 준비하려면 도랑치고, 도구쳐서 배수로를 정비해둬야 수확기가 어려움 없이 작업할 수 있다. 천만 뜻밖에 살아남아 멀쩡하게 올라온 피이삭도 솎아내야 하고. 그럭저럭 잘 말려두었는데 이번 태풍 바람에 흠신 젖어버린 녹두며, 참깨며, 고추는 또 어찌할꼬? 태풍이라도 다소곳이 지나갔으면.

    천막농성 마무리에 즈음한 ‘캠핑문화제’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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