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사태와 정의당,
    반기득권 사회개혁의 깃발 들어야
    [기고] 정의당 지도부에 드리는 충고 혹은 비판
        2019년 09월 23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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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노동당 당원이며 정의당의 지지자가 아니다. 하지만 당적을 떠나서 우리 사회의 진보적 사회개혁을 바라는 사람으로서, 정의당이 제대로 된 사회개혁에 적극 노력해줄 것을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정의당을 제외한 다른 진보정당은 당세가 취약한 상황이므로, 진보적 사회개혁과 관련된 의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정치적 발언권의 대부분은 정의당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달 넘도록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정의당의 대응은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 지점에 대해 정확한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는 애매모호한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모두와 차별화된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정쩡한 입장으로 일관하였으며 일부에겐 준여당으로 일부에겐 기회주의자로 비쳐졌다. 그 결과 현재 정의당의 정당 지지율은 일부 조사에서 바른미래당보다도 낮아졌거니와, 원래 보수성향일 바른미래당 지지자는 생각지 않더라도 이번 사태에서 정부여당에게 실망한 광범위한 중도층의 지지를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

    이는 매우 뼈아픈 일이다. 정의당이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이번 사태는 진보정당에게 매우 좋은 기회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 진보정당의 가장 큰 딜레마는, 보수양당제라는 기존 정치구도에서는 중도층의 대부분이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사이에 있게 됨으로써 생기는 곤란이었다. 현실정치에서 대중적 지지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기존 양대 정당의 열성지지층이 아닌 중도층을 공략할 수밖에 없는데, 민주당보다도 더 오른쪽에 위치한 중도층에 대한 공략은 진보정당의 가치 내지 지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국 사태는 이런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열어주었다.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우리 사회의 온갖 쟁점들이 튀어나왔기에 어느 한 측면만 강조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태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우리 사회의 기득권에 대한 문제제기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 기반한 현 집권세력은 검찰개혁 등 민주개혁의 문제라면 몰라도, 우리 사회의 각종 기득권을 철폐하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사회개혁의 문제에는 별 관심도 없고 자격도 없는 기득권 세력의 일부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조국에 분노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유한국당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득권 반대와 사회개혁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즉 단지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라는 기존 양당구도의 중도층이 아니라, 기득권 대 반기득권의 입장에서 양당 모두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중도층이 형성되었다. 민주개혁이 아니라 사회개혁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기존의 기득권 정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정의당 회의 모습 자료사진

    이 글의 주제가 아니기에 자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태는 단지 입시의 공정성을 해치는 편법 등에 대한 분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입시의 공정성을 일부 개선해본들 학벌체제가 유지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 학벌체제가 타파되는 것조차 본질이 아니다. 학벌이 완화되면 이제 의대나 로스쿨,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등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한 취업경쟁으로 전장이 옮겨갈 뿐이다.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 중 어디서 시작하는 지에 따라, 평생 동안 한 쪽은 철저한 기득권을 누리고 다른 쪽은 불안하게 살아야 하는 노동의 불평등이 문제의 본질이다. 따라서 학벌체제를 극복하고 노동의 불평등을 완화할 전면적인 기득권 타파와 사회개혁을 이야기함으로써,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을 끌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진보정당의 원래의 지향이었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당은 학벌체제 극복이나 노동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적 제안이나 노력을 계속해왔다. 국공립대 통합, 비정규직 제한, 좋은 일자리의 문호는 넓히고 지나친 특권은 제어함으로써 노동의 불평등 완화 등등. 그간 이미 노력해왔던 자신의 가치에 충실하면서도, 기존의 기득권 체제에 문제를 느끼고 사회개혁을 바라며 양당 모두에 비판적인 중도층에 접근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였다. 보수양당 구도 하에서의 진보정당의 딜레마에서 벗어나, 기득권 대 반기득권이라는 갈수록 더 중요해질 새로운 구도에서의 진보정당의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간 정의당 지도부의 모습은 이런 기회를 거꾸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기득권 세력의 행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조국에 대해 확실하게 반대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만을 보였다. 그렇다고 아예 확실히 정부여당 편을 들어준 것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양쪽 모두의 눈치만 보는 기회주의적 태도였다. 당원 등 당내의 의견도 갈라졌음을 핑계로 내세울지 모르겠으나, 이는 지도부가 정확한 입장을 견지하면 설득 가능하다. 조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은 확실히 하되, 자유한국당처럼 말도 안 되는 트집만 잡을 게 아니라 청문회 등 법적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최종적인 임명 여부는 대통령이 결정하라고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야당의 반대에 관계없이 임명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반대를 확실히 하되 임명 후에는 이를 인정하면 되는 일인데,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지도 못하면서 ‘임명권은 존중하나 깊이 생각해주길 바란다’는 식의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대통령도 당연히 여러 가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정의당이 조국을 반대하는 것이 범여권 입장에서도 꼭 나쁜 게 아니었다. 조국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에 분노한 사람들이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 쪽으로 가는 것보다는, 기득권에는 반대하지만 민주개혁에는 입장을 같이 하는 정의당 쪽으로 가는 것이 이후의 민주개혁에도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치공학적으로도 어차피 중도층을 최대한 흡수해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만큼, 정부여당에 실망한 중도층에게 또다른 기득권 보수정당이 아닌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은 범여권 입장에선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범여권이 얻을 수 있게끔 하는 일종의 역할분담이 된다. 조국을 지지하는 정의당 내의 당원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설득했다면 충분히 설득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의당 지도부는 당원들을 설득하고 반기득권 사회개혁을 바라는 새로운 지지자들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지지층 자체를 새롭게 확대해서 기존의 보수양당구도에 제대로 균열을 낼 생각은 하지 않고, 지역구는 민주당을 찍되 비례는 정의당을 찍는 기존의 좁은 지지층에 갇혀 선거제도 개혁되면 비례의석 몇 석 늘릴 생각만 했던 것 아닌가? 그런 식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민주당에 이끌려 다니는 보조정당 이상이 되지 못한다. 어차피 20석 이상의 원내교섭단체가 되지 않는 한 (현재로는 이는 불가능하다), 10석이나 3,4석은 국회의원 당사자들 빼고는 사실은 별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일시적으로 의석이 약간 주는 한이 있더라도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해야만 이후의 더 큰 도약이 가능한데도, 현재의 정의당 지도부는 내년 총선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원래 1당이나 2당이 아닌 정당은 적어도 5년 내지 10년을 바라보는 전망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정의당은 과연 그러한가?

    아니, 향후 10년 정도를 바라보면 더 암울한 전망조차 가능하다. 지금의 자유한국당은 민주당보다도 한참 못한 정당이기에 명백한 한계가 있지만, 이를 극복한 새로운 대안우파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이미 온라인 공간 등에서는 기존의 586 기득권 등을 공격하면서 공정한 경쟁과 철저한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신우파들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들은 편법에 의거한 기존의 기득권은 반대하지만, 공정한 경쟁에 의한 차별, 가령 시험보고 들어온 정규직과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 간의 심각한 불평등은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결과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으므로 실제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음에도, 공정과 능력 등 이미 한국사회에 내면화된 가치를 바탕으로 반기득권을 내세우기에 이들은 향후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아직은 기존 양당구도가 강력하므로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지만, 한국정치는 매우 역동적이거니와 외국 사례 등을 볼 때도 이런 흐름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새롭게 형성되는 기득권 대 반기득권의 정치구도에서, 반기득권의 깃발을 원래 이를 고민해온 진보좌파가 아니라 대안우파에게 빼앗길 경우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진보정당의 입지가 크게 축소될 위험성이 강하다. 이는 역사적인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필자가 정의당의 당원이나 지지자가 아님에도 이렇게 강한 어조로 질타하는 것은 적어도 진보정당 전체의 입지가 축소되면서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의당의 현 지도부는 그간의 행태에 대해 대오각성해야 한다. 민주당의 보조정당이 아니라 기득권 반대와 사회개혁을 앞장서서 외치는 독립적인 진보정당이 되어야 한다. 물론 뒤늦게나마 그린뉴딜 정책 등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보이려는 노력은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 또한 핀트가 어긋나 있다. 지금 사람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기득권 문제이므로 이를 극복할 전면적인 사회개혁의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고민해온 주제이므로 지금부터라도 집중적으로 준비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사람들이 가장 분노하고 있을 때, 조국 임명에 반대하면서 사회개혁을 외치는 것이 가장 좋았으며 지금은 아무래도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젓지 않고 거꾸로 갔으니, 뒤늦게 흐름을 거슬러 가려면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반기득권 사회개혁의 깃발을 선점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민주당과 구별정립되는 독자적인 진보정당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반기득권 대안우파의 득세를 막고 역사에 죄를 짓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의당의 현 지도부는 내년 총선만 생각하지 말고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입지만 생각하지 말고 광범위한 피지배계급을 대변함으로써, 지지층을 확대하고 진보정당 전체의 전망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일찍 내려오시라. 새로운 미래를 위해.

    필자소개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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