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의 상징
    ‘밀양 할매’들, 그림에 목소리를 담다
    [책소개] 『송전탑 뽑아줄티 소나무야 자라거라』(김영희(글),밀양 할매(그림)/ 교육공동체벗)
        2019년 09월 21일 05: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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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서 맨 앞줄에 섰던 ‘밀양 할매’들의 그림 작품집이다.

    ‘힘 있는 말’을 가진 자들의 ‘논리 정연하고 전문적인 말’에 맞서 ‘밀양 할매’들은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참담한 ‘말의 싸움터’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함께 다독이며 즐겁게 놀아 보자는 심산으로……. 처음엔 종이와 각종 그림 도구들을 아까워하며 그림 그리기에 자신 없어 하던 ‘밀양 할매’들은 나중엔 끼니를 거르고 시간을 잊은 채 그림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림이나 한번 그려 볼까 하고 시작했던 일이지만 막상 결과물들을 놓고 보니 모두가 매우 훌륭했다. 그 그림들을 통해 ‘구술하는 말이나 평상시의 언술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 다른 언어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어떤 다른 말로 번역되거나 설명될 필요가 없는 ‘밀양 할매’의 자기표현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2017년과 2018년 사이, 8개 마을에서 진행한 그림 작업의 결과물을 엮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해 덧붙였다.

    말들의 싸움에 맞서 그림으로 말하다

    누군가의 ‘말’은 크고 웅장하게,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반면 누군가의 ‘말’은 애초에 발화되지도 못한 채 봉인된다. 또 어떤 ‘말’은 엄청난 사회정치적 파장을 만들어 내지만, 어떤 ‘말’은 발화되자마자 지워져 버린다.

    2017년,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 ‘공론화위원회’에서는 장기적으로 원자력발전을 축소해 나가되 건설 중이던 원자력발전소는 경제적 손익을 고려해서 계속 짓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안을 내놓는다. ‘밀양 할매’는 이 공론화의 장에서 ‘전문가’도 아니었고 ‘당사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당사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이들은 이 공론화의 장에서 제대로 발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공론화위원회의 발표 이후 말을 잃은 할머니들은 그림을 그리며 다시 ‘말’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말로 표현하지 못한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 책은 ‘밀양 할매’를 비롯해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목소리’들이 내려앉을 자그마한 자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 기획되었다.

    ‘생명’의 편, ‘살아 있는 것’들의 편

    ‘밀양 할매’의 송전탑 그림에는 언제나 꽃과 나무와 새들이 있다. 그리고 ‘밀양 할매’는 송전탑을 뽑아 그 땅을 꽃과 나무와 새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밀양 할매’는 생명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송전탑’에 반대하고 ‘원자력발전’에 반대한다. 그리고 꽃과 나무와 새들을 비롯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강건하고 담담하게 싸워 왔다.

    ‘밀양 할매’는 송전탑을 생명을 위협하는 괴물로 인식한다. ‘밀양 할매’가 그린 송전탑은 모두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 로봇 괴물을 닮았다. 할머니들에게 송전탑은 ‘남의 편’이지만, 진달래나 소나무는 ‘내 편’이다. ‘밀양 할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생명’의 편, ‘살아 있는 것’들의 편이다. 그래서 이 고단한 싸움을 중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운동의 어른이자 신념에 찬 활동가로서 ‘밀양 할매’

    이 책에서 호명하는 ‘밀양 할매’는 밀양에 사는 ‘할머니’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또한 ‘밀양 할매’는 사랑스럽고 소녀 같고 발랄하고 귀여운 ‘할머니’의 이미지에 고착되어 있지 않다. 그림 작업을 하면서 나누는 ‘밀양 할매’들의 수다에는 연륜에서 배어나는 여유와 유쾌함이 가득하다. 여느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그림에서 드러나는 ‘밀양 할매’들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밀양 할매’들은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기 위해 한국전력이 고용한 용역들을 향해 거침없이 욕을 쏟아 내기도 하다가 어린 전경들이 끼니를 거를까 걱정하여 살짝 먹을 것을 내밀기도 한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깊은 밤에도 조용히 산에 오르고, 폭력에 맞서 싸우는 대열의 맨 앞줄에 서며, 맨몸으로 경찰들의 진압에 맞서는 ‘밀양 할매’는 사회운동의 어른이자, 신념에 찬 실천가의 모습이다.

    수많은 연대의 존재들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다

    이 책에는 ‘밀양 할매’들이 연대자들과 함께 성장해 온 과정도 담겨 있다. ‘밀양 할매’는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 순간 자신들을 찾아와 주었던 연대자들의 손길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 ‘연대’의 손길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내민다.

    ‘밀양 할매’들은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하며 ‘철탑에 올라가 농성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높은 곳에 올라서야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었던 이들의 심정이 지금 송전탑에 올라가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자신의 마음과 똑같다’는 것이다. ‘밀양 할매’가 제주 강정마을의 주민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내민 손길은 모두 본인들의 싸움에서 깨달았던 소중한 ‘연대’의 실천이다. 그리고 ‘밀양 할매’의 곁에는 그들과 함께 천막 농성장을 지키며 함께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꽃을 보고 노래를 불렀던 연대자들이 있다.

    이 책에는 연대자들과 함께한 싸움의 기록과 함께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곳곳에 담겨 있다. 모든 폭력에 저항하며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탈핵의 길에 나선 ‘밀양 할매’는, 이 길에 동참한 수많은 연대의 존재들을 상징하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밀양의 빛깔〉에는 송전탑이 들어서기 전의 밀양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 있다. ‘밀양 할매’들은 염료를 섞어 가장 그리고 싶은 ‘밀양의 빛깔’을 만들어 종이 가득 칠했다. 그리고 종이 위에는 밀양의 진달래꽃 빛깔, 배추색과 가지색, 마을에서 바라본 하늘의 빛깔, 봄물이 오른 들판의 빛깔 등이 가득 채워졌다. ‘밀양 할매’들의 붓질은 거침없고, 자연의 색을 머금은 빛깔은 아름답고 다채롭다.

    2부 〈너와 나, 서로 마주 본 얼굴〉에는 서로가 그려 준 얼굴과 자화상 등을 담았다. 한 사람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도 있고 각자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것도 있다. 특히 서로 둘러앉아 종이를 돌려 가면서 따로따로 눈, 코, 입을 그려 한 사람의 얼굴 그림을 완성하는 작업에는 모든 마을이 참여했다. 처음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마주 쳐다보며 그린 그림들이 투박하면서도 정겹다.

    3부 〈곱디고운 내 몸〉에는 손이나 발을 대고 형태를 본뜬 다음 각자 그리고 싶은 꽃과 나무들을 그리거나 전지를 여러 개 붙인 후 드러누워 몸의 라인을 본뜬 다음 그림을 그린 작품들이 수록돼 있다. 몸의 선을 따라 그렸을 뿐인데 그 형태만 보고도 당장 누군지 알아맞힐 수 있을 것처럼 그림의 주인공을 닮아 있다.

    ‘밀양 할매’가 가장 자신 있게 그린 것은 송전탑이다. 4부 〈송전탑과 꽃〉에서 ‘밀양 할매’들은 송전탑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자세히 묘사한다. 특히 송전탑의 위용과 번쩍이는 불빛이 강조되어 있다. 또 송전탑을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나 송전탑이 세워져 슬픈 마음, 송전탑에 올라가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마음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송전탑 옆에 나무와 풀, 새와 꽃들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밀양 할매’는 ‘거기 원래 있던 것들이고 그 땅의 원주인이라서’라고 말한다. 송전탑 그림 옆에는 한결같이 ‘송전탑을 뽑아줄 테니 소나무야 자라거라’, ‘송전탑 뽑아줄 테니 꽃들아 피어나라’ 등의 읊조림이 담겨 있다.

    5부 〈함께 싸워 온 우리〉에는 송전탑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산속에 천막을 짓고 농성을 할 때의 기억을 담았다. ‘밀양 할매’는 새카맣게 올라오던 경찰들, 용역에 맞서던 서로의 모습, 농성장에서 먹었던 바나나 몇 개, 산길을 오르내리다 수녀님을 만나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 등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권력의 횡포에 맞서 강건히 싸우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겪은 상처와 아픔이 함께 드러나 있어 뭉클한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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