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님 이별 눈물
가을비 되어 내리네
[한시산책] 심희수와 일타홍의 사랑
    2019년 09월 16일 03: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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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오더이다

                배연일

아카시아 향내처럼
5월 해거름의 실바람처럼
수은등 사이로 흩날리는 꽃보라처럼
일곱 빛깔 선연한 무지개처럼
사랑은 그렇게 오더이다

휘파람새의 결 고운 음률처럼
서산마루에 번지는 감빛 노을처럼
은밀히 열리는 꽃송이처럼
바다 위에 내리는 은빛 달빛처럼
사랑은 그렇게 오더이다

이 시를 만난 건 제게 행운이었습니다. 시를 보면서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마을, 어린 추억이 가득 담긴, 여전히 맑은 시냇물에 손을 담근 느낌입니다. 그래. 사랑은 그렇게 왔었지.

이번 가을에는 서산마루에 번지는 감빛 노을처럼 오는 사랑을 놓치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사랑을 담을 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그릇 크기만큼만 사랑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설령 많은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도 가슴 속 사랑그릇이 작다면 그 사랑을 모두 담을 수 없겠죠. 반대로 사랑그릇이 아주 크다면 비록 지금은 그 그릇 가득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릇 가득 사랑이 차겠지요. 배연일의 시를 보면서 저는 제 가슴 속 사랑그릇이 얼마나 클까 반성해봅니다.

이번 한시산책은 조선 선조(宣祖)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沈喜壽 1548년(명종3)∼1622년(광해14))와 일타홍(一朶紅)의 시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분은 사대부 선비이고, 또 한 분은 기생입니다. 조선시대에 선비와 기생의 사랑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두 분이 처음 만남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사랑을 한 경우는 참 드뭅니다. 심희수와 일타홍은 일타홍이 죽을 때까지 함께했습니다.

심희수 묘. 왼쪽 검은 비석이 일타홍 제단이고, 뒤는 심희수 부모 묘입니다

심희수와 일타홍의 만남은 극적이었습니다. 심희수는 조선 제13대 임금 명종(明宗)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沈)씨의 육촌 동생입니다. 명문 중의 명문이죠. 하지만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한 어른이 없이 자라서 벗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심희수는 평소대로 벗들과 함께 재상집 연회에 가서 술 마시고 노니면서 기생을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대부분의 기생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들을 피하는데, 이날 모인 기생 중 단연 뛰어난 미모와 가무를 겸비한 일타홍은 오히려 심희수의 희롱을 받아주었답니다. 심희수는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며 후일 만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일타홍이 서울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 한 수를 볼까요.

長霖(장림, 장마)

十日長霖若未晴 십일장림약미청
鄕愁蠟蠟夢魂驚 향수납납몽혼경
中山在眼如千里 중산재안여천리
堞然危欄默數程 첩연위난묵수정

열흘이라 긴 장마 개일 기색 없는데
고향 그리워 꿈결에 날아갔다 놀라서 깨네
옛 동네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길은 먼 천리
난간에 기대어 가만히 고향길 헤아려보네

일타홍은 연회가 끝나고 약속한 대로 심희수를 찾아갑니다. 이때 심희수의 나이 15세이고, 일타홍의 나이는 분명치 않지만 17세 전후였던가 봅니다. 심희수는 아직 결혼 전이었습니다. 일타홍은 인삼으로 유명한 금산의 기생이었습니다. 17세에 서울 대갓집 연회에 초청되었다면 미모와 재주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금은보화로 유혹하는 수많은 벼슬아치들을 뿌리치고 망나니(?) 심희수를 선택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심희수가 ‘용모가 아름다웠고 우스개를 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때문이었을까요.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공부를 하도록 권하고, 정식 결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심희수가 정실부인과 혼인을 한 뒤에도 심희수는 일타홍만 사랑했다고 합니다.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5일을 주기로 4일은 정실부인에게 가서 자고 자신과는 하루만 지내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타홍을 너무나 사랑한 심희수는 이런 약속을 번번이 깨고 밤이면 밤마다 일타홍을 찾았다고 합니다.

일타홍은 심희수가 자신에게 너무나 빠져 있어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과거에 급제한 뒤에 나를 찾으라’는 편지를 두고 집을 나왔습니다. 이후 심희수는 공부에 더욱 정진해서 21세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타홍과 다시 만납니다.

일타홍 제단 뒷면. 일타홍과 심희수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

다시 10년이 흘러 심희수는 35세 되던 해에 죄를 얻은 허균의 형 허봉(許篈)을 두둔하다가 임금에게 밉보여 금산(錦山) 군수로 좌천됩니다. 금산은 일타홍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일타홍이 갑자기 병이 났습니다. 일타홍은 죽음에 임박해서 심희수에게 유언을 합니다. 당신과 한평생을 함께 해서 행복했다며 선산에 묻어달라고요. 이때 심희수의 나이가 36세이니 일타홍의 나이는 아마도 38세 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를 한 수 남기고 운명합니다. 그 시를 볼까요.

遺詩(유시)

靜靜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淸 일편금광만고청
無限世間今夜望 무한세간금야망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맑은 밤하늘 초승달 또렷하기도 하구나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맑았겠지
무한한 세상에서 오늘 밤 함께 바라보니
인생 즐거움과 슬픔 몇 사람의 정일까

‘무한(無限)’은 지금도 쓰이는 용어지요. 물리적으로 넓다는 뜻도 되지만 시간으로도 멀디 먼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끝 모를 미래까지를 뜻하기도 하지요. 그런 무한한 세상에서 오늘 함께 달을 바라보니 보통 인연이 아니겠지요. 그런 인연인 당신만을 사랑했다고 일타홍은 죽으면서도 고백을 합니다.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을 손수 염하고 일타홍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관을 상여수레(輀車)에 싣고 선영(先塋)이 있는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출발합니다. 금강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가을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붉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면서 심희수는 시 한 수를 읊습니다. 그 시가 유명한 「만장시(輓章詩)」입니다.

輓章詩(만장시)

一朶芙蓉載輀車 일타부용재이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秋雨丹旌濕 금강추우단정습
疑是佳人別淚餘 의시가인별루여

한 떨기 연꽃 상여수레에 실려 있는데
향기로운 영혼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비단강 가을비 붉은 명정 적시우니
아마도 고운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붉은 연꽃. ‘일타홍(一朶紅)’은 한 떨기 붉은 연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심희수의 이 시를 볼 때마다 심희수의 따뜻한 심성이 느껴져 행복합니다. 얼마나 사랑하면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따뜻한 이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은 일타홍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참고로 ‘일타홍(一朶紅)’은 ‘한 떨기 붉은 꽃’이라는 뜻입니다. 일타홍의 정식 기명(妓名)은 ‘취연(翠蓮)’입니다. ‘푸른 연’이라는 뜻인데, 만개해서 ‘붉은 연꽃’이 되었나 봅니다. 심희수의 시에 나오는 ‘부용(芙蓉)’은 연꽃의 다른 표현이니 ‘일타 부용’은 ‘한 떨기 연꽃’ 쯤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정지용의 사랑 시 한편을 보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이런 시를 보다보면 제 가슴 속 사랑그릇도 조금씩 더 커지겠지요.

호수(湖水) 1

     ―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필자소개
최경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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