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다 적색, 보다 녹색' 얼마든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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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29일 01: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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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틀의 정당 구도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적 진보정당의 탄생으로

    얼마 전 자율과연대의 주대환씨는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라는 구호가 적합하지 않은 구호라고 비판한 바 있다. 우리는 주대환씨가 대선 시기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가만히 있어야 된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주대환씨의 이런 주장은 아주 협소하고 구시대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낡은 주장이거나 정치적 의도가 숨겨진 고도의 술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먼저 비판하고 왜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이 얼마든지 녹색 정치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이야기하겠다.

    서구 중심적 세계관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로 표상되는 ‘적록연대의 정치’는 오늘날의 진보운동, 사회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서의 제시로서, 앞으로 진보정당의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간명하게 색채 이미지화한 구호이다.

    그러나 주대환씨는 서유럽 진보정당들의 종류만 나열하며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서유럽처럼 실패‘할’ 진보정당들의 역사를 따라가기 위해 진보정당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서구 중심적이며 진화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오늘날 좌파 정치의 위기가 그러한 진화론에서 비롯되었음이 명백하기에 우리는 주대환의 80년대 논리를 따라갈 필요가 없다.

    이해를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요컨대 운동은 결코 진화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운동이란 때론 후퇴하기도 하며, 때로는 급진전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한 지역에서 수십 년 간 종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사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반도에서의 사회운동이 서유럽의 역사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옳지도 않다. 그러나 주대환의 식상하고 낡은 논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지루하게 통용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 안의 ‘진화주의’ 때문이다.

    맑스주의 역사를 지배해온 진화론

    20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맑스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선언하고, 그것이 전화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알튀세에서부터 시작된 이들은 스탈린주의적인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부터 전면적인 이념 투쟁을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문화이론, 맑스주의 페미니즘 등 다양한 이론들이 분화 발전하는데 이것은 맑스주의의 전화라는 문제설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전세계 사회주의 운동이 어찌해서 이토록 후퇴했고, 소비에트의 혁명이 왜 실패했는가에 대해 맑스주의 내부에서 구조적 원인을 찾고나 노력했고, 지목한 것은 맑스주의 역사 내부의 오류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맑스주의 내부에 안착해있는 ‘진화론’이었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진화주의는 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역사 철학 체계였다. 사람들은 역사를 진화주의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이 때문에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비롯한 서구에 비해 과학적으로 ‘후진’적인 국가들도 서유럽처럼 발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에서 맑스주의자들 역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맑스 자신은 어쩌면 봉건사회 이후 자본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도식을 다소 진화주의적으로 받아들인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생산력 증진이 사회주의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볼세비키 혁명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지배적이었고, 이는 오직 생산력 증진을 위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과오까지 불러오기도 한 것이다.

    이들이 무슨 짓까지 했는가?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거짓 명분 하나로 핵무기까지 개발했고, 체르노빌 사건이라는 유래 없는 재앙까지 만들어냈다. 맑스주의의 오류에서부터 태생된 비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럽에서 스탈린주의의 반대편에 위치한 사민주의는 어떠한가. 제2인터내셔널에서 카우츠키는 레닌을 향해 교조주의자라고 꾸짖었다. 맑스에 따르면 지금은 혁명할 때가 아닌데, 왜 혁명을 선동하느냐고.

    이런 선동에 서유럽 대다수 혁명가들이 동조했으며,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레닌은 소수의 입장에 불과했다. 베른슈타인 역시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고 사민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합리적인 것처럼 들린다. 혁명이란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혁명을 이룬다한들 그것의 성공을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도 하다. 그러니 점차적으로 나아가면 세상이 나아진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오늘날의 사민주의 정당은 대부분 초국적 자본의 무혈입성을 용납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스웨덴에서도 초국적 자본은 한때 사민주의 정당들의 아성이었던 이 땅을 무혈입성했고 지금은 복지체계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이들 사민주의자에게도 진화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깊게 베여있었다. 사회라는 것은 점진적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이 이들의 역사관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어찌 보면 맑스주의 역사에서 중대한 기점으로 손꼽히는 이 제2인터내셔널~코민테른 시기의 양쪽 진영 모두가 ‘진화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질곡을 낳았다. 한쪽은 ‘생산력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미국-자본주의와 맞서려고 노동자들을 스스로 착취했고, 또 다른 한쪽은 일국적 시야에 갇히고 점진론적인 개혁론에 갇혀 제국주의 전쟁의 찬성자, 노동자 파업 탄압의 찬성자들로 돌변했다.

    이들이 제국들의 식민지 전쟁에 찬성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국적 한계에 갇힌 포퓰리즘적 정치 양태와 더불어 진화주의는 식민지의 진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가 근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핑계 구실을 했다.

    이 두 가지 비극이 좌파운동의 역사의 질곡을 만들어 왔으며, 이것은 스스로가 키운 걸림돌이었다. 어찌 보면 전혀 무의미한 논쟁들이 백여 년 간 지속되어 왔다. 항상 이들의 재료로서만 이용되어온 민중들에게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그러나 지금 과연 사민주의냐 사회주의냐의 구분이 필요하고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철학적으로 진척된 사상을 남길 수 있는가? 모두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등장한 세계 사회운동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세계사회포럼을 위시로 한 풀뿌리지역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노동자운동, 빈민운동, 아나키스트, 문화운동, 환경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제 진영은 지난날의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적 태도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운동을 시도하고 있다.

    99년 시애틀 WTO반대투쟁을 계기로 실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진보의 다원주의와 다양성을 스스로 보여주며 적극적 연대로 실천하고 있는 이 운동은 제 분야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서유럽 사민당이 아니라, 그리고 더불어 스탈린주의적 공산당만이 아니라 사회운동적 정당운동을 지향하는 이탈리아나 라틴아메리카 등의 ‘새로운 형태’의 정당들, 프랑스 쉬드-레일 노조와 같은 사회운동적 노조들, 생태운동, 페미니즘, 금융세계화에 맞선 행동들, 반세계화 시위 등 다양한 행동들이 어우러진 사회운동이 전세계 곳곳에 펼쳐지고 있다.

    매년 세계사회포럼이라는 이름의 전세계적 사회운동 행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지난 1월 26일 전세계 70여 개 국가에서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는 자본가들의 ‘포럼’에 반대하는 항의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이날 서울역에서 다양한 부문의 운동들이 한 데 모여 신자유주의에 맞서서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실천을 벌인 바 있다. 이들의 실천방향은 지역적이면서도 전세계적이다. 환경, 여성, 노동, 빈곤 그 어느 하나 가리지 않는다.

    낡은 구분법은 적록연대의 훼방꾼

    적록연대는 가능하다. 주대환은 “보다 적색으로!”가 사민주의에 대한 은근한 배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낡은 틀 안에서이다. 새로운 정당은 사민주의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노당 자주파 같은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당 밖에 있던 좌파들로부터 ‘사민주의적’이라고 공격받던 이들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런 불필요한 구분은 오히려 운동을 질곡시킬 뿐이다. 대체 그 많은 불필요한 구분들 속에서 어떤 내용이 보충되었는가? 무엇이 풍부해졌는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새로운 진보정당은 오직 대안과 실천으로 자기 정치를 증명할 뿐이다. 우리는 의회로의 실천도 머뭇거리지 않을 테지만, 본말이 전도된 의회 정치는 원하지 않는다. 의회 진출도 역시나 사회운동의 발전과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실천들 중 하나라면, 의회에서의 실천은 다양한 실천들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국회, 지방자치

    우리는 지금 사람들의 삶에 유의미한 화두를 던지는 의의로서, 진짜 진보의 면모를 전국적으로 보여주는 장으로서 국회의원 선거판에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풀뿌리지역운동, 모든 주민의 정치주체화를 위한 실천적 과제로서 지방자치선거에 대응해야 한다.

    우리는 선거에 있어서도 제한을 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친’의회적이다. 그러나 매몰되어서는 안되며, 본말이 전도되지 않게 ‘제도’라는 틀과 긴장감을 두고 있어야 한다.

    일국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사회운동적 진보정당운동

    더불어 우리는 보다 더 지역적이면서도 보다 더 국제주의적인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스탈린주의와 사민주의 구획의 낡은 틀에서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간단한 예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라. 미국의 신용등급이 낮은 민중들이 무분별한 주택 투기 열풍 이후의 금융위기로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면서 민간 금융자본업자들이 무더기로 파산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 있는 서민들이 경제위기 속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 한국 경제는 무슨 수를 써도 빠져나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초국적 금융자본 은행이 손실을 입으면, 한국에 있는 노동자들이 해고당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미국에서 경제 위기가 터져도 유럽에서는 호황을 누렸다. 반대로 일본이 공황에 빠져도 미국은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일국적 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제 점점 그것은 강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도 전세계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국적 실천에 국한된 계획만을 갖고 있는 낡은 틀의 ‘진보정당론’이 이런 새로운 상황에 적합할 수 있을까?

    이런 금융위기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환경 재앙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이제 혁명을 이룩해도 전지구는 재앙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곧 다가올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극단이 자연의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환경 재앙들에 대한 대안과 저항 없는 진보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IT, 중소기업 발전 이런 것들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1=100의 적록연대 정치로

    우리는 기껏해야 1+1=2에 불과한 단순한 합산 정치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좌파 정치, 진보정당, 진보정치 자체가 ‘환경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적록연대는 주대환의 협소한 이해처럼 이합의 단순한 합이 아닌, 사회운동의 초록정치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적색 정치란, 이제는 적색이면서 녹색이지 않으면, 더는 적색이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가장 중요한 모순 중 하나인 환경 재앙에 대해 실천하지 않고는 적색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환경운동 역시 기존 시민운동판이 대중성을 갖추지 못하고 도리어 때때로 자본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환경 캠페인을 하는 등의 오류에서 벗어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 대중적인 실천을 갖춘 면모로 정치화되어야 할 것이다. 적록연대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의 초록정치화, 진보정당운동의 초록정치화란 무엇인가. 그동안 환경과는 무관하게 제출되어 온 우리들의 정치 대안, 운동들도 그만큼 환경친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의 운동 그 자체가 진화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대환은 서유럽을 거들먹이며 엉뚱한 이야기만 한다. 녹색당 만들고, 사민당 만들고, 공산당 만들라고.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주장인가? 세계에 대한 협소한 이해가 30년 전에나 통할 법한 소위 명망가 진보정치 지도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대안적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 운동으로

    적록연대의 정치는 대안적 삶의 양식의 창출이라는 대단히 철학적인 논점으로서의 ‘사회화’의 문제까지 나아간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운동이 극복해야 할 문제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며, 이것들은 따로 또 같이 거대하고 긴밀한 관계맺음을 맺어가며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서, 새로운 관계맺음의 저항이데올로기 창출을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회운동이 문화예술화, 여성주의화, 초록정치화될 때 대안의 정책도, 대안의 이데올로기도 창출된다.

    그러나 오도된 구분법은 이런 식의 입장에 대해 그렇다면 사회주의냐? 아니면 사민주의냐? 선택하라고 말한다. 글쎄.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우리는 추호도 당신의 구분법에 끼어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 낡은 구분법으로는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새로운 사회운동을 명명할 수 없다. 우리는 생태를 말하고,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하고, 지역 곳곳에서 풀뿌리가 되어 실천하고 움직이는 새로운 진보정당을 원한다.

    권병준씨의 우려에 대해

    ‘초록정당을 만드는 사람들’의 권병준씨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출범식 자리에서의 소회를 허심탄회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 역시 종북주의를 악마화하고 모든 원인을 종북주의로 돌리는 태도에 반대한다.

    애초에 논쟁의 시작 지점이 그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해명이나 반성을 요구하는 비판들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당 창당을 위한 여러 가지 근거들 중 단 한 가지 근거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찬성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이 모든 것이 해체되고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종의 단절적 시기에 진보정당운동 역시 새로운 형태로 새로이 태어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북주의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유일한 핑계가 될 수 없다. 우린 오직 우리의 앞길을 바라보며 보다 더 풍부한 내용과 대안을 찾기 위해 나아갈 뿐이다. 우리가 실천적으로 종북주의와 결별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 새로운 정당운동의 동반자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린 언제나 ‘진보’라는 틀 안에서 계속 마주칠 것은 틀림없지만, 연대를 꿈꾸더라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라는 가장 현실적인 인지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가득안고 우리를 이렇게 움직이게 하였다.

    더불어 적색과 녹색은 함께 할 수 있다. 아니, 함께 해야만 적색은 더 적색으로, 녹색은 더 녹색으로 진전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상황은 아직 미약해 보인다. 고민과 토론도 아직은 몇 년은 더 해야 한다. 지도부의 미숙함도 곳곳에서 보이고, 아직 옛날 면모들도 벗어나지 못했고,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라고 인식했다.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실천을 통한 새로운 사회운동적 진보정당의 탄생을 위해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함께 하기로 했다.

    서구 발전주의 역사, 자연과학 발전의 역사와 그 태를 같이하는 ‘정치적 진화주의’와 결별하자. 그럴 때에만 적색도 새로워질 수 있고, 새로운 운동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실력, 대안, 운동력의 배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 우린 피나는 노력을 다 할 것이다.

    보다 더 적색으로! 보다 더 녹색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슬로건이 대중정치로서는 부적절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도, 철학도 색깔과 이미지, 기호로 표현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모든 이론은 텍스트만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보다 더 적색으로! 보다 더 녹색으로!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나은 슬로건은 없다.

    학생운동누벨바그 http://blog.jinbo.net/new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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