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함께’가 신당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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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24일 05: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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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 20일 ‘국제사회주의’ 그룹의 이론가인 알렉스 캘리니코스 교수가 한국을 다녀갔다. 캘리니코스의 이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마침 1월 11일 열렸던 비판사회학회 심포지움에서 경상대 정성진 교수의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이론과 전략」에 약정 토론한 바 있어, 그 때 말했던 것 중 캘리니코스의 ‘혁명정당론’에 대한 비판 부분을 글로 옮긴다.

       
    ▲ 건국대 학생회관에서 강연 중인 캘리니코스 (사진=뉴시스)
     

    정성진 교수에 따르면 캘리니코스의 혁명정당론은 다음과 같다.

    “캘리니코스는 혁명정당과 범좌파정당을 구별한다. … 전자는 노동자계급 중 선진적 혁명적 부분에 한정되며 노동자계급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느슨한 정당은 진정한 정당(혁명정당)을 대신할 수는 없다. … 대규모 구성체들을 전진시킬 수 있는 조직화된 혁명적 투사들의 중핵 … 민주집중제의 원칙이 21세기 혁명정당의 원리로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 위 정성진 글

    좌익이든 우익이든 그 당의 규모와 질과 동질성을 어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세 판단이나 목표 설정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캘리니코스의 당론은 다분히 도식화된 전위-대중관에 가깝다.

    나는, 이른바 ‘레닌적 전위정당론’이라는 것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의 짜르 체제에 대응키 위한 특수한 변형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대중정당, 캘리니코스가 말하는 범좌파 정당이야말로 다양한 경험과 실천의 하중을 통해 당을 교정하고, 단련시키고, 올바른 노선으로 나가게 하기에 적합한 기제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결사인 정당이 정세나 목표로부터 독립하여 ‘전위적이고 혁명적으로’ 자기 구성하는 것을 존중한다. 문제는 그러한 정당이 과연 ‘개입하여 전진시키는 중핵’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노동계급의 선진적 혁명적 중핵? 신문 파는 학생들?

    그런 역할은, 그러한 정당 또는 그룹의 질적 우위 즉, 이론이 올바르고 실천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대중에 의해 경험적으로 증명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캘리니코스가 몸 담고 있는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급진적 좌익정치 연합의 한 주체일 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의 ‘다함께’를 ‘노동계급의 선진적 혁명적 중핵’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압도적 다수의 노동조합원들은 ‘다함께’를 아예 모를 터이고, 대개의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신문 파는 학생들’로 여긴다. 이런 정황을 볼 때 ‘혁명정당론’의 오류는 자연스레 형성되는 전위의 권능을 주관적 자임으로 대체한 것이다.

    국제사회주의 그룹 뿐 아니라, 좌우를 막론한 정당과 정치조직들이 채택하고 있는 ‘민주집중제’라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한 철학적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저 ‘민주주의’가 아닌 ‘집중’인 것은 민주적 토론 후의 행동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도덕적 권장이 아닌 규범적 제도로 존립하려면 통일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제재나 징벌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첫째, 통일 행동을 실현할 방법은 실재하는가? 둘째, 통일 행동하지 않는다고 불이익을 부과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알카에다나 적군파 같은 테러리즘 정당이 아닌, 현대 민주정당들은 그 구성원의 일탈 행동에 대해 어떠한 물리적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든, ‘다함께’에서든, 민주노동당에서든 의결된 행동에 함께 하지 않는 태업을 실제로는 방관한다.

    예외적으로 권리 제한 등의 조치가 가해졌을 때조차도 그 실현은 조치를 수용할 것인가, 조직에서 이탈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주체의 선택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된다. 제재를 피해 조직에서 이탈하는 경우에도 행동 통일을 통한 다수 형성이라는 민주집중제의 목적이 실현되지 않긴 마찬가지다. 요컨대, 현대 민주정당은 ‘집중’을 실현할 아무런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정당은 국가의 한 요소이지만, 정당의 입장에서 국가는 정당의 확장이다. 정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당과 국가의 차이는 물리력의 보유 여부 뿐이다. 따라서 행동 통일의 의무와 일탈에 대한 제재라는 철학을 국가 맹아인 정당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민주집중제는 현대 민주정당의 전신(前身)인 비밀음모가 조직들, 개인이나 소집단을 인격과 행동의 독립적 주체로 인정치 않던 동서양 전근대 공동체 문화의 잔재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철학을 가진 정당이 국가를 장악했을 때 나타난 것이 소련과 중국과 북한 등의 참상이다. 현대 진보정당은 행동 통일의 의무를 부과하기보다는 뒤따라 행동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해가야 한다.

    민주집중제와 개입의 효율성이란?

    현대 서유럽에 근원을 두고 있는 국제사회주의 그룹이 옛 국가사회주의 식의 민주집중제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구적 분파는 주요한 결정적 정세에서 혁명정당의 개입을 비효율적으로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개입하거나 침투할 곳이 두세 개로 갈려 있으면 귀찮다는 말이다. 국제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개입 대상의 정치적 자유는 자신들의 공작 효율성에 복속되어야 하는 하위 개념인 것이다.

    한국 ‘다함께’ 역시 민주노동당의 분당이나 새 진보정당 창당에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주체사상파 마냥 ‘통일단결’을 외쳐대는 것이 민주노동당을 위해서이거나 민주주의를 존중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의 행태만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트로츠키주의라는 것이 우면산 정기 받아 태어나는 것도 아닐진대, ‘다함께’가 유독 강남, 서초에만 버글대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체사상파와 ‘다함께’는 민주노동당 밖의 조선로동당이나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숭상한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을 자신들의 숙주인 민족민주전선이나 ‘공동전선’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이 진짜 똑같은 점은 자신들에게는 민주노동당의 민주주의를 초월하여 위장 전입이나 독자적 선전을 할 천부의 권리가 있지만, 남들에게는 ‘민주집중제’에 복종할 의무만이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어이없는 자기애(自己愛)가 사생활에 그칠 때는 따뜻하게 보살펴야 하는 질환일 뿐이지만, 정치로 들어오면 마땅히 퇴치해야 하는 공공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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