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을 직면하다 :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②
    [번역] 운동은 장기적 사회변화 역량으로 전화되어야
        2019년 09월 04일 01: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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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최근 범죄인 인도법 관련한 홍콩 시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전사라고 할 수 있는 2014년 홍콩 우산운동에 대한 평가와 분석 글이다. 홍콩을 뒤흔들었고 또 지금 뒤흔들고 있는 2014년과 2019년의 대중시위의 유사성 등을 고려할 때 2014년 시위에 대한 평가 글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보여 게재한다. 축약본이 아니라 논문 글의 전문을 번역 게재하는 것이기에 길어서 2회로 나눈다. 그래도 긴 글이다. 홍콩 시위의 의미와 전망에 대해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기대한다. 번역자의 소개글 또한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관심을 갖고 읽어주길 바란다. 원문의 전문(全文) 번역문이고, 축약문이 <역사비평> 2019년 가을호에 게재됐다. 그리고 이 글은 <레디앙>, <참세상>, <동아시아국제연대>에 공동으로 게재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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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2014년 우산운동 시위 아래는 1997년 홍콩 반환식 행사

    홍콩을 직면하다 :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①

    다자 ‘불개입’ 하의 자치

    만약 민주화에 대한 요구의 외향성이 간접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자치권은 직접적으로 대외적인 것이다. 우산운동 중 자치에 대한 요구는 사실 민주에 대한 요구보다 더 격렬했다. “홍콩은 중국의 또 다른 한 도시가 될 수 없다”는 구호는 민주파의 구호이자 적지 않은 보통 시민들의 우려이기도 했다. 홍콩은 확실히 상당히 특수한 도시 경제체이다. 홍콩의 자주성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형성된 것이고, 지금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홍콩의 자주성은 1997년 이전 상당히 특별했던 홍콩의 식민지 지위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홍콩은 영국의 사실상의 식민지였다. 영국은 홍콩의 안전을 보호하고 기본적인 질서를 보장했다. 하지만 또 정식 식민지는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빌려온 지역, 빌려온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홍콩에서 ‘고도의 식민주의’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홍콩섬의 엘리트들은 뿌리까지 영국화되지는 않았고 홍콩의 일반 시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것들이 홍콩의 일상 사회생활에서 일정 정도 자치성을 갖게 했다.

    영국 정부는 홍콩에서 전형적인 경제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했는데, 상업무역은 공공복지 지출과 노동권익 보호 등과 같은 ‘사회 외부적’ 간섭을 최대한 적게 받았다.(이것은 전후 영국 본토의 발전과는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홍콩에 새로 온 많은 이민자들도 ‘빌려온 지역, 빌려온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경제적인 생존과 발전만을 추구했다. 이렇게 홍콩 경제는 순수한 자유자본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홍콩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땅이 아니라 마치 모든 것이 자유롭게 유동하는 시장과 같은 곳이다. 홍콩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와서 각축을 벌이도록 수용하면서 대신 입장료를 받고 수수료를 버는 개방된 플랫폼이다. 순수한 자유자본주의는 어떠한 제약도 없이 자주적이고 자치적이지만, 반면 이는 홍콩 사회의 정치 성격의 결여로 이어지게 되었다.(18) 홍콩의 영국 정부는 1970년대 이후 중국인 엘리트 계층을 정치로 끌어들였다. 한편으로는 중국인 사회의 자주적인 경제생활과 일상생활을 허락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회의 자주성이 정치화됨으로써 정부와 완전히 분리되고 심지어는 대립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즉, 소위 ‘자치’는 엄격한 정치적 상황(즉 홍콩의 영국 정부와 해당 사회 사이의 통치와 피통치 관계) 하에서의 일종의 행정관리 방식이지 비정치적인 의미의 자치는 아니었다.(19)

    이와 같은 홍콩의 고도의 자유와 정치적 성격의 결여는 2차 대전 이후의 경제 발전에 특수한 장점을 제공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냉전체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방이 통제하는 세계시장체계에서 배제된 것과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고립(고립을 선택하기도 하고 고립되기도 한)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거대한 시장을 남겼다. 이 뿐만 아니라 그 국가들이 서방의 지지도 받게 함으로써 좋은 조건으로 국제자본주의 경제체계로 진입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홍콩은 다른 ‘용’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립 중의 중국과 서방 간의 무역을 거의 독점한 것이다. 홍콩의 자주와 자치는 홍콩의 독립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수의 주체들이 이러한 비정치적인 플랫폼을 필요로 한 결과였다. 즉 그 자주와 자치는 홍콩이 스스로 가지게 된 정치적 민주가 아니라, 홍콩이 정치적 주체의 자격이 없다는 전제 하에 여러 주체들이 ‘개입하지 않는’ 자유항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영은 내생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와 경제 상황의 특수한 위치가 결정한 것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중국이 개방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세계정세도 크게 변했다. 중국이 달라짐에 따라 홍콩의 위치도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홍콩 민주 정치의 발전 역사는 중국의 당-국가 체제 형성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것은 각 주체들이 ‘일국양제’의 발전 궤적에 대해 원래 예상했던 것들이 왜 허망한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일정 정도 설명한다. 모두들 중국 본토가 개혁개방을 거쳐 홍콩과 자연스럽게 점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떤 측면에서는 심지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 배후의 원인은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홍콩의 발전이 홍콩의 정치 주체로서의 자격 결핍 및 이에서 비롯한 사회 정치 성격의 모호함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개방 후 중국의 발전, 특히 근래의 ‘굴기(급속한 부상-역주)’는 장기적인 혁명과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으로부터의 고립 중 형성된 선명한 정치 성격 및 정치적 자주의 원칙에 대한 견지(예를 들어 서방의 경제정책을 쉽게 따르지 않고, 정치적 각도에서 경제 문제를 분석하는 습관) 덕분이다. 만약 이러한 역사 발전의 내재적 논리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쌍방에게 ‘민주’ 혹은 ‘독재’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만 치중한다면 서로 소통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홍콩 역사에서 형성된 정치 성격의 모호함으로 인해 아마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더 외향성을 갖게 된 것 같지만, 더 큰 문제는 중앙정부가 현재 기본적으로 실어상태(失語狀態)에 있어서 자신의 정치 주장, 특히 구체적인 정책을 명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는 중국의 당-국가 체제 그 자체에 대해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당-국가 체제의 변화?

    일국양제에 관한 많은 토론 중 대부분의 논자들은 이 구상의 배후에 있는 점들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중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홍콩의 역할, 홍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충분히 이용하고 장기적으로 계획한다’는 일관된 생각, 홍콩에 대한 영국 정부의 객관적 영향 등등. 비록 충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런 점들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당시 ‘등소평은 어떻게 이런 구상을 제기할 수 있었는가’이다. 등소평은 일국양제가 각종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겠지만, 그는 이러한 충돌은 부차적인 불편함이기 때문에 전략적 판단의 방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30년 후에 이러한 불편함이 지금과 같은 곤란함이 되었는가? 이는 단지 신의를 저버린 문제인가?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사무실에서 3년간 근무했던 법학자 강세공(强世功, 창스궁)은 일국양제의 의의를 중국공산당의 티벳, 대만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뿐만 아니라 중국 한당대(汉唐代) 이래의 제국 형태와도 연계시켰다. 그 결과 이러한 국가주권의 다양한 내재적 구성 방식은 중화민족이 존재해 온 특별한 방식이고 “장기 역사”가 부여한 합법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20) 통일 주권 하 다양한 통치권력이 공존하는 형식이 중국의 독자적인 것인지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토론해볼 만한 문제이다. 중국의 현실은 확실히 유럽에서 기인한 현대 ‘민족-국가’ 관념과는 다르다. 현대 민족-국가 관념은 원래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세계적으로 단지 소수의 몇몇 국가만이 이러한 형태에 진정으로 부합할 뿐이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현실과 일반적인 이론상의 차이를 유형의 차이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일국양제 구상을 천년천조(千年天朝, 중국의 전통 왕조-역주)의 연속으로 보기보다는 우선 그것을 현실 조건 하의 생동하는 실천으로 보고 일국양제와 역사 상 주권 구성의 구체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통일 국가의 주권이 다양한 수준의 정치 주체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첫째, 국가기구를 초월할 수 있는 주권의 상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다양한 종교 신분을 가진 청조(清朝) 황제와 빅토리아 여왕이 그러하다. 국가기구는 통상 주권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구이기 때문에 현대 국가가 주권을 실현하는 방식은 비교적 단일하다.(21) 중국공산당이 현재 이와 같은 국가를 초월하는 주권체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역할은 자신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 중국공산당 발전사 상의 중요한 한 지점은 강력한 아래로부터의 군중 동원과 위로부터의 조직제도 건설을 결합하고 교차한 것이다. 전자가 전복성을 갖고 있고 후자가 보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합은 독특하다.

    1949년 이전 중국공산당은 혁명과 기존 권력의 전복을 기본 사명으로 삼아, 지방소비에트를 발전시키고 혁명근거지를 건립하며 해방구를 형성해 이러한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그리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법규를 반포해 민주적 통치를 실험하며 사상투쟁과 ‘정풍’운동(중국공산당 내 잘못된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당 내에서 전개한 정치운동-역주)을 전개하고 이데올로기적 동원과 통제를 진행하는 등 풍부한 국가 통치의 경험을 쌓았다. ‘무장할거(武装割据)’(분산된 다수의 지역에서 지역을 방어하며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역주)의 전략적 의의는 지역적 건설(분산된 다수의 지역에서 지방소비에트와 혁명근거지 건립-역주)과 전국적 혁명을 결합했다는 것이다. 지역적 건설은 전국적 혁명에 지속성을 갖게 했다.

    1949년 이전이 건설로서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었다면 1949년 이후는 혁명운동의 방식으로 건설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오랫동안 ‘집권 혁명당’이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동시에 강력한 군중 동원과 사회 통치 능력을 갖게 해 일반적 의미의 정당과 관료체계로서의 국가를 초월하게 했다.(22) 이러한 중국공산당의 특수한 위치에 기초해 등소평은 일국양제 방안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다당제 민주체제 하에 있었다면 기존의 연방체제는 유지될 수 있었겠지만 창조적인 사고로 새로운 국가 구성 방안을 도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형적인 독재 체제는 일반적으로 매우 취약해서 종종 협소한 민족주의 등과 같은 우파 세력에 의존한다. 또한 민주 체제 하에서보다 이러한 체제의 창조적 개혁을 이루기가 더 힘들다.

    둘째, 강력한 이데올로기와 고도의 정치적 자신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식민주의 시기의 사회다윈주의와 문명진화론이 그와 같다. 청제국은 유학을 핵심으로 하는 천조사상(天朝思想)이 있었고, 1980년대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있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당시 엘리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고 동시에 대중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홍콩의 정치경제 제도와 생활방식이 왜 50년 동안 변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면서 등소평은 1988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 50년은 변할 수 없었고, 50년 후는 변할 필요가 없다.” 미래에 대해 “변할 필요가 없다”는 바로 이 역사적 판단에 근거해 “변할 수 없었”던 현실적 전략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근거해 등소평은 일국양제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도력’은 고도로 인정받은 권위와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결합해 형성된다. 국제 공산주의운동 중 발전해온 각종 이론들, 특히 그람시, 레닌, 트로츠키에서 모택동까지 혁명운동과 관련한 이론에 근거해 우리는 현대 정치 중의 지도력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초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는 역사 발전 방향에 대한 전망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당의 사명을 설명함으로써 정당이 순간적인 이익에 대한 요구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또한 보수적인 정치 요구(예를 들어 전통신앙이나 민족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등)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는 엄격한 기율이 있는 발전된 조직이다. 이러한 조직은 광범위한 군중을 동원할 수 있다. 셋째는 강력한 간부대오이다. 각계 군중 속에서 성장했고 신념이 강하며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간부가 필요하다.

    모택동이 강조한 것처럼, 간부대오는 중요한 것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다. 지도력은 정치적 정당성과 이론적 설득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도덕적 매력과 감정적 친밀성도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하나의 간부들이 매일 솔선수범으로 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간부는 당과 군중의 구체적인 매개체이다. 간부가 있어야만 정치 이론과 효과적인 조직도 발전시킬 수 있다. 군중과 긴밀히 결합된 관계를 유지하는 간부가 없다면 이데올로기는 공허해질 것이고 엄격한 조직 기율은 독재의 도구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간부의 역할은 또한 지도권과 통제권을 구분하는 것이다. 지도권은 기존의 체제에 의존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중에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지도권은 군중노선과 분리될 수 없다. 지도권은 실천 중의 ‘지도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권력이지만, 통제권은 먼저 권력 관계를 정의하고 고정된 권력 관계에서 사회 생활에 대한 주도적인 능력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이 자신의 지도력에 대해 높은 자신감이 있지만 체계적인 통제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에서 그 정치적 상상력은 종종 가장 풍부해지고 창조력은 가장 강해진다.(23)

    중국공산당의 지도력에 대한 자신감은 1951년 티벳의 ‘17조협의’, 1981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엽검영(葉劍英, 예젠잉)이 제출한 ‘대만의 평화통일과 관련한 9조 방침 정책(즉 ‘엽9조’)’, 그리고 홍콩에 대한 ‘12조’ 제출의 공통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 초기든 문화대혁명 후의 수습 시기든, 중국공산당은 자신이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고 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위대한 사업을 이끌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에 홍콩과 대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1950년대와 1980년대 창조적인 소수민족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일국양제 구상이 제기된 원래의 배경에는 이미 큰 변화가 발생했다. 1989년 중공의 지도력은 전에 없던 도전에 직면했고, 그에 대응한 전략은 새로운 통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1992년 이후의 경제시장화는 사회 상식을 새롭게 확립하고 집권당의 권위를 강화한 것 같지만, 1990년대 이후의 ‘발전주의’와 1980년대의 ‘경제 건설 중심’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1980년대의 발전은 확고한 방침이었으며 다소간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였다. 그 ‘확고함’은 실질성과 설득력을 갖고 있었으며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일면이 있었다. 그런데 1992년 이후 발전에 대한 확고한 방침은 대체로 많은 사회문제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한 실책에 대한 반응이었고 사회모순을 덮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확고함’은 수단의 강제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개 대표(강택민江泽民(장쩌민)이 2000년에 제기한 중공의 지도방침으로, 중공은 선진 생산력 발전의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가장 많은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지침. 이러한 방침을 통해 자본가/기업가들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역주)’의 제출은 중국공산당이 선명한 정치이데올로기와 노동자 농민의 대표라는 원래의 지도권을 조정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형식적으로는 전민당(全民党, 즉 비계급적 대중정당-역주)이 되는 것을 추구했다. 구조적인 통제력의 강화와 행정권의 확대, 그리고 실질적인 지도력의 약화는 동전의 양면을 구성했다. 2003년 중공은 약자의 이익 강화, 조화로운 사회, 인간 중심, 과학적 발전관, 새로운 민중의 형상 수립 등을 강조했지만, 여러 심층적인 모순은 건드리지 못하면서 이 기간에 사회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었고 중앙정부의 도덕화 현상이 출현했다.(예를 들어 ‘민중의 명을 받든다’) 그리고 지방정부는 공리주의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고 심지어 점점 약탈적 현상이 나타났다.(항표 2010) ‘안정 유지’는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되었는데, 정치 체제는 원래 ‘유지’를 위한 체제이기 때문에 안정 유지라는 이름의 많은 이상한 현상들을 단지 개별 사람들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2008년 이후 또 한 번의 전환이 일어났다. 국가 부의 급속한 증대(중앙정부의 재정수입 증가, 소수 대형 및 특대형 국유기업의 독점적 발전, 지방정부의 토지 등과 같은 희소자원에 대한 투기적 운용)와 서방의 경제위기 및 이에 기인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성찰은 중국 내 민족주의 정서와 국가주의 이론을 강화한 것이다. ‘중국모델’, ‘중화문명의 굴기’, ‘자신감 있는 노선, 자신감 있는 체제’와 같은 담론이 이러한 변화를 반영했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에 대한 자신감과 지도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지도력이 떨어진 상황을 오히려 은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에서 ‘양제(兩制)’를 ‘중국 본토의 사회주의’와 ‘홍콩의 자본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24)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현실 중 양제의 가장 명확하고 직접적인 차이는 일당제와 다당제의 차이이다. 앞서 말했듯이 바로 강력한 일당집정의 ‘당-국가’ 체제가 바로 일국양제의 구상을 가능하게 했다. 일당제와 다당제의 관계는 당파 간의 권력에 대한 쟁투로 단순화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당과 당 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과 국가 간의 관계에 있다. 바로 당이 당시에 상대적인 초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국’ 중 ‘양제’ 심지어는 다수의 제도를 수용하는 구상이 가능했다. 만약 당과 국가가 고도로 일체화되어 있다면 당은 국가를 초월해서 국가를 지도할 수 없고 오히려 국가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 있는 당은 지도력을 확보할 수 없고, ‘국가’는 유연성과 포용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홍콩의 문제는 일반적인 지방과 중앙 사이의 분권 문제가 아니다. 이는 홍콩이 ‘불완전한 주권’을 갖고 있고 일반적인 지방 정부가 갖고 있지 않은 법률적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중국 본토의 지방과 중앙의 관계가 상당 부분 당의 행정화(관료화)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과 중앙 간의 경제 이익과 행정 권력 게임은 결국 당의 위로부터의 간부 인사권 발동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 혁명 시기 당과 지방 사회 사이에 형성된 유기적인 관계는 당 자신의 행정화 및 당과 정부의 일체화로 인해 상당 부분 약화되었다. 말하자면, 당과 국가기구의 일체화는 사회생활에 대한 당의 일체화를 대체했다. 당은 홍콩에서 행정화된 위계적 수단으로 관리할 수도 없었고, 또한 자신의 전통적 이데올로기인 지방 사회와의 유기적 연계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당이 홍콩의 상업 세력과 반공개적으로 진행한 암묵적 계약은 이익 연대를 기초로 한 위탁식 관리였으며 이것이 바로 현재 위기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다. 따라서 ‘분권(分權)’이나 ‘주권-통치권’의 관계와 같은 틀을 통해 홍콩 문제를 분석하는 것은 단지 문제의 일부분만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홍콩 학자인 류조가(劉兆佳, 라우시우카이, 2012)는 중공과 홍콩의 관계 중 또 다른 한 측면을 제기했다. 중공은 중국의 집권당이고 또한 당연히 홍콩의 집권당이다. 그런데 중공은 홍콩에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많은 정치적인 문제에서 불확실성이 숨어 있는 복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89년 이후 중공은 사도화(司徒華, 쓰투화, 홍콩교육전문인협회 회장, 홍콩애국민주운동시민지원연합회 주석, 홍콩특별행정구 입법회 의원 등 역임-역주)와 같은 전우를 잃어버렸고, 점점 이가성(李嘉誠, 리카싱, 홍콩에서 가장 부자라고 알려져 있음. 장강그룹 설립자.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제정위원회 위원 등 역임-역주)과 같은 ‘한 배의 동료’에게 의존했다. 중공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없게 되자 점점 더 물질적 이익과 조작적 공작을 통해 침투하는 것에 의존하게 됐다. 중공은 홍콩에서 반공개 상태로 있고, 홍콩을 중국 본토 고위관리들이 거대한 금권을 교역하는 천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홍콩의 문제는 중국 본토의 문제와 아주 다른 게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중국 정치의 총체적인 깊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공이 일국양제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자신감 있는 지도권은 그 자신의 장기적 무장혁명,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경험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홍콩에는 당시 정당의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고 정치이념과 담론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홍콩의 운동은 역사상 수차례의 혁명이 더 이상 정치적 합법성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 요구의 다양성이 명확하게 증가했다는 점 등과 같은 새로운 도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도전은 중국 본토에도 존재한다. 홍콩의 곤경은 바로 중공이 국가의 지도권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 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종종 운동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 운동의 성패는 운동이 당시 제기한 구체적 요구들이 해당 시기에 얼마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는지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시도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으려고 하는 운동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이다. 끊임없는 운동만이 진실하고 성공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만약 운동의 구체적인 요구는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는데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패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랍의 봄’이 바로 그러한 예다.(25) 반대로 구체적인 목적을 즉시 이루지는 못해서 그 순간에는 실패한 운동으로 보이더라도 만약 사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내고 한순간 일어난 혁명적 역량이 장기적인 사회 진보의 역량으로 전화될 수 있다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중국의 사회운동이 실패한 것은 단지 그것이 진압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운동이 장기적 사회 변화의 역량으로 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그러한 경험을 의미 있는 사상적 자원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계는 운동의 경험을 제때에 갈무리하지 못했고, 운동 후 혹은 일상생활에서 진행된 잠복된 정치에 대해 지속적인 개입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홍콩의 우산운동과 대만의 해바라기운동은 우리가 그것들을 어떠한 사건으로 평가할 것인가와 무관하게 그 운동들은 이미 새로운 정치적 과정을 만들어냈다. 인류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통일된 사고의 틀과 공통의 언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 사이, 그리고 여러 사회 역량 사이의 구체적인 내재적 연계와 단절을 자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절대화된 주권 사상, 텅 비어버린 민주 담론, 그리고 본질화된 본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번역-박석진, 중국 칭화대清華大 역사학과 박사과정)

    <각주>

    18. ‘정치 성격’은 역사적 투쟁을 통해 형성된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를 다루는 한 사회의 입장과 경향으로 초보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무장혁명을 경험한 사회는 통상 비교적 강한 정치 성격을 갖는데, 예를 들어 베트남과 태국, 남북한과 일본, 프랑스와 영국을 비교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비교적 강한 일체감을 요구하며 이미 형성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있고 행동의 기회를 잡는 대신 입장을 두고 경쟁하는 데에 익숙하다. 하지만 정치 성격이 강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정치 성격이 강하면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사회가 큰 대가를 치러야 될 수도 있다. 정치 성격이 강하고 약한 것은 객관적인 역사 진행의 결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이 처한 사회의 정치 성격과 그 역사적 형성을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만 그에 대한 분석이 공허해지지 않을 수 있다.

    19. 강세공(強世功, 2007)은 이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해 결론을 내렸다. Ian Scott(1989)도 참고.

    하지만 이와 동시에 홍콩의 주체성 결여는 중국 본토 측의 정책적 원인도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앙 정부는 신중국 건립 후 홍콩을 ‘해방’시키고 자신이 주장했던 반식민주의를 관철할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콩에 더 큰 자주권과 더 많은 민주를 보장해줄 것을 포함해서 ‘탈식민화’ 정책을 영국 정부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매우 경계하고 반대했다. 중앙 정부는 홍콩 문제를 중국과 영국 이 두 주권 국가 사이의 협상으로만 엄격히 제한하기를 희망하면서 홍콩 문제에 제3자가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소위 ‘세 발 의자는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20. 강세공(2008a, 2008b). 중국 역사상의 제국과 현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근래 적지 않은 학자들이 글을 썼다. 왕휘(汪暉, 2004), 갈조광(葛兆光, 2011).

    21. 유럽의 고전적인 민족-국가 이론에 따르면, 현대 국가는 국가의 합법성이 동질적인 ‘인민’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족과 부락에 대한 초월이라기보다는 그것들에 대한 연장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

    22. 이는 왕휘(2013)가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초강력 정당(超級政黨)’과 ‘초월적 정당(超政黨)’이라는 이중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왕휘에 따르면 소위 ‘초강력 정당’은 경쟁 중인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이 모두 의회 내 경쟁형 정당 정치 형성을 목표로 두지 않고 헤게모니형 정당(혹은 지도적 정당) 체제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위 ‘초월적 정당’은 양자의 대표적 정치가 의회 내의 다당제 혹은 양당 정치와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그람시의 소위 ‘신군주’와 더 가깝다.

    23. 이와 관련해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모택동 <대중생활에 관심을 두고 사업방법에 주의를 기울이자>(1934), <신단계론>(1938), <우리의 학습을 개조하자>(1941) 등을 참조할 것.

    24. 많은 사람들은 지금 홍콩이 중국 본토보다 사회주의적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10월 7일 홍콩중문대학에서 토론할 때 한 학생이 나에게 “지금 중국은 국가 전체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상황인데 홍콩과 같은 도시 하나가 독자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25.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해 아랍 세계에서 파상적인 대규모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다.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 바레인 등 국가의 정부 수장이 하야했다. 이 운동은 교육 수준이 높고 심각한 취업난에 직면한 도시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 독재 반대와 민주 쟁취라는 구호로 대규모 시위와 인터넷을 통한 동원 및 조정을 주요 수단으로 진행됐다. 서양 언론들은 이를 새로운 민주화의 물결을 가져온 ‘아랍의 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2012년 중반에 이르자 아랍의 봄은 ‘아랍의 겨울’로 바뀌었다. 대중운동은 오랫동안 집권한 독재 정부를 신속하게 끌어내렸지만, 이 운동은 농촌과 노동자 농민에게 침투하지 못했고 효과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하지도 못했다. 혁명 후의 국가는 종교 근본주의 세력이 장악하거나 군대가 통제하거나 내전에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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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项飚, 샹뱌오,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문화인류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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