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을 직면하다 :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①
[번역] 홍콩 2014년 우산운동, 대중운동 분석과 의미
    2019년 09월 04일 11: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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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 범죄인 인도법 관련한 홍콩 시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전사라고 할 수 있는 2014년 홍콩 우산운동에 대한 평가와 분석 글이다. 홍콩을 뒤흔들었고 또 지금 뒤흔들고 있는 2014년과 2019년의 대중시위의 유사성 등을 고려할 때 2014년 시위에 대한 평가 글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보여 게재한다. 축약본이 아니라 논문 글의 전문을 번역 게재하는 것이기에 길어서 2회로 나눈다. 그래도 긴 글이다. 홍콩 시위의 의미와 전망에 대해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기대한다. 번역자의 소개글 또한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관심을 갖고 읽어주길 바란다. 원문의 전문(全文) 번역문이고, 축약문이 <역사비평> 2019년 가을호에 게재됐다. 그리고 이 글은 <레디앙>, <참세상>, <동아시아국제연대>에 공동으로 게재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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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글

이 글은 올해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에 반대하면서 홍콩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글이 아니라 2014년에 홍콩에서 일어난 ‘우산운동’에 대한 글이다. 우산운동 직후인 2015년에 대만에서 발표된 이 글은 비록 최근 홍콩 시위의 상황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당시 제기한 분석과 문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고 최근 시위에 대한 분석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비슷하게 보이는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그에 대한 평가와 분석이 철저히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홍콩 시위에 대해서도 철저한 분석을 통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런 대규모 시위와 충돌은 언제든 또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 현상이 그렇듯, 2014년과 올해 홍콩에서 진행된(그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시위도 다각도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이 글도 그 중 하나인데, 이 글은 2014년 홍콩 시위의 사회˙역사적 원인을 비교적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홍콩 시위를 “추상적인 ‘민주’, ‘독재’와 같은 범주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글의 작성 동기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글에서 홍콩 시위의 배경으로 홍콩 경제 상황의 변화, 중국 본토의 권력-자본과 홍콩 사회의 왜곡된 유착, 중국 본토와 홍콩 사이의 정치적 관계의 문제로 인한 홍콩 시민들의 불안함과 불만, 홍콩 시민들의 경제적 열악함 등을 지목한 부분들은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홍콩 시위의 본질이 표면적으로 대두된 ‘민주’나 ‘자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심층적인 원인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홍콩 시위를 계기로, 1989년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건’을 성찰한 저자의 평가도 흥미롭다.

이 글의 저자인 항표 교수가 홍콩 시위를 분석하며 가장 관건적인 행위자로 중국공산당(중공) 혹은 중국 정부-이 둘은 저자가 글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당-국가 체제를 형성해 사실상 구분하기 어렵다-를 지목하고 있는 것도 깊이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문제가 중공과 중국 정부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홍콩 시위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치에 중공과 중국 정부가 있다는 의미이다. 2019년 올해 다시 일어난 홍콩 시위는 여러 의미에서 2014년 이후 중공과 중국 정부의 대응이 적절하지 않았거나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터져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비록 홍콩에는 ‘독자적인’ 홍콩 정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중국 정부는 홍콩을 책임지고 있는 중앙정부이다. 중공과 중국 정부는 홍콩 시민들의 좌절과 분노에서 비롯된 행동들을 비난하고 중국 본토 시민들과 홍콩 시민들의 대립을 방임하거나 심지어 부추기는 방식이 아니라, 적절한 분석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중재해야 할 임무가 있다. 평화시위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홍콩 시위대의 절망감이 바로 “폭력” 시위의 토양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과 중국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항표 교수의 분석과 비판은 적절해 보인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 중에 ‘조반유리(造反有理, 저항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동안 평탄치 않은 역사를 거치면서 이미 상당히 복잡한 맥락을 가진 말이 되어 버렸지만, 기본적으로는 권력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언제나 진지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을 ‘민중들의 저항은 항상 옳다’로 해석하기보다는 ‘민중들의 저항에는 다 이유가 있다’로 해석해서, 그 저항의 정치적 방향이 옳든 그르든 저항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맥락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이 홍콩의 시위대를 비난하는(혹은 반대로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해 보인다.

이 글은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국양제’에 대한 평가와 새로운 접근,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평가, 홍콩의 식민지 역사에 대한 해석 등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굵직한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에는 중국공산당과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미와 변화에 대한 평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거대한 토론의 대상들이고 중국 내부에서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제출되고 있는 쟁점들이다.(정치적으로 봉쇄되어 토론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지만) 예를 들어, 이 중에서 항표 교수는 ‘일국양제’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에서 ‘양제(兩制)’를 ‘중국 본토의 사회주의’와 ‘홍콩의 자본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항표 교수는 ‘지금 중국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라는 질문을 직설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체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도 논쟁이 되고 있는데, 적어도 중국이 전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고는 하기 힘들다면-이에 대해서는 중국 스스로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혹은 ‘시장 주도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국양제에서 ‘양제’의 의미는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홍콩의 식민지 역사에 대한 해석에 대해 항표 교수의 이 글에서는 그다지 다루고 있지 않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일국양제에서 ‘일국(一國)’을 더 강조하며 한때 서구의 식민지였던 홍콩의 ‘미완의 탈식민화’ 문제를 지적하는 흐름도 있다. 이는 일정 정도 중국 본토의 도덕적 우위를 전제하면서, 심지어 홍콩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홍콩의 피식민 역사를 비난하는 사고방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때 ‘탈식민화’는 홍콩의 ‘(피식민으로) 오염된 역사에 대한 정화’라는 의미를 강하게 갖는 듯하다. 이는 ‘탈식민화’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중국 본토의 탈식민화 문제는 성찰하지 못하면서 홍콩의 탈식민화 문제만 지적하는 것이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홍콩만의 탈식민화 문제를 지적할 때 여기서 ‘탈식민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이 이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조금만 변용한다면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고, 심지어는 절박한 질문이 된다. 한국 사회는 87년 ‘민주화 운동’에 대해 적절한 분석과 평가를 남기고 있나. 큰 시위가 있을 때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종종 소환되고 있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담론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87년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제한적이거나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미완의 무언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미완’이 문제일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핵심이자 강령처럼 설정한 인식 자체가 문제인 걸까. 87년의 그 ‘거대사건’을 과연 ‘민주화’라는 담론틀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항표 교수는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해 “1989년 중국의 사회운동이 실패한 것은 단지 그것이 진압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운동이 장기적 사회 변화의 역량으로 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그러한 경험을 의미 있는 사상적 자원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1987년의 ‘민주화 운동’, 1996~19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 2008년 그리고 2016~2017년의 촛불집회를 통해 어떠한 사회 변화의 역량이 형성되었고 이를 어떠한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가.

이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과 홍콩이 겪고 있는 일국양제 문제는 남북 관계에도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남의 국가연합 통일안이든 북의 연방제 통일안이든 현재 중국과 홍콩의 문제는 상당 부분 남북이 이후 유사하게 겪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홍콩과 중국 본토가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남북의 어떠한 미래를 상상할 것인가. 홍콩과 중국 본토의 현재 상황은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표 교수가 현재 중국공산당의 결정적 문제 중 하나로 제기한 정치 세력의 지도력과 군중노선 등의 문제에 대해 한국 사회는 어떤 고민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는지도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와 ‘민주주의’, 20세기 혁명의 역사 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사회주의가 일개 구호나 타/아(他/我)를 구분할 선명한 정치색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 있는 인류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중국 사회주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혹은 좀 다르게 질문을 던진다면, 역사적 교훈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중국과 다른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훌륭한 글이지만, 다소 조심스럽거나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일단 눈에 띄는 부분으로, 문화대혁명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평가가 다소 일면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좀 더 풍부하게 드러나는 평가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든다. 그리고 홍콩의 역사와 홍콩 시위에 대한 평가도 좀 아쉽다. 홍콩 시위에서 보여준 홍콩 시민들의 능동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홍콩 역사의 대표적 특징으로 ‘비정치성’을 드는 것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홍콩 역시 오랜 식민지 역사를 거치면서 적지 않은 민중들의 저항이 있었고 중국 본토의 혁명과도 긴밀하게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콩 경제 발전의 역사와 관련해서도 외부적으로 형성된 조건만으로 홍콩의 경제 발전을 평가하는 것은 전면적인 평가로서는 좀 부족해 보인다. 홍콩 사람들의 적극적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홍콩 정부의 능동적 정책이 없었다면 홍콩이 과연 이만한 경제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중국은 외부에서 흔히 쉽게 상상하듯 어떠한 단일체가 아니다. 중국에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고 적지 않은 다양한 사회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존재하고 또 사회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토론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토론에서는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 사회보다 더 과감한 의견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중 ‘일부’는 검열로 삭제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특히 젊은 세대)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서구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무엇이 ‘자유주의 우파’이고 무엇이 ‘좌파’인지도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이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 중국 사회의 전체적인 작동 기제, 특히 일상생활의 경제 구조나 사람들의 의식 구조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더해 반제국주의의 의미를 상실한 민족주의가 확실히 중국 사회에서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중국의 현실에서 항표 교수의 주장은 소수 중에서도 소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회가 홍콩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무능함에 가까운 한계를 보이는 것은 이와 같은 중국 현실의 여러 요소가 복합된 결과일 것이다. 이번 홍콩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통해 홍콩과 한국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는 것이 어느 정도 체감된 지금, 한국 사회는 홍콩과 중국 본토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번역 박석진, 중국 칭화대清華大 역사학과 박사과정)

위 사진이 2019년 시위, 아래 사진이 2014년 우산시위의 모습

홍콩을 직면하다 :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②

홍콩을 직면하다: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항표(项飚, 샹뱌오,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문화인류대학 교수)

‘잔중(佔中)’과 ‘잔중(佔鐘)(**)
:홍콩 사회 ‘운동의 형성’과 ‘거대사건’의 형성

거의 모든 매체들-홍콩, 중국 본토, 서방의 매체들이 지지하든 반대하든 간에-이 2017년 시행될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법 관련해 2014년 9월 26일부터 홍콩에서 진행된 항의 행동, 특히 28일 이후 격화된 대치 상황을 “잔중(佔中)” 운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28일 새벽에 ‘잔중(佔中, 중환 점령) 시작’을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중환’ 점령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금종’ 점령을 시작한 것이었다.(1) ‘중환(中環, 센트럴)’과 ‘금종(金鐘, 애드미럴티)’의 차이는 단지 지역적인 차이가 아니다.

‘중환 점령’은 홍콩의 일부 학계와 법률계 그리고 종교계 인사들이 2017년에 있을 선거 개혁과 관련해 2013년 초에 시작한 운동이다.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이 운동을 시작한 후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적절한 방안을 토론하며 중국 본토를 포함한 각계각층과의 접촉을 조직했다. 그들은 만약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목표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이후 홍콩의 금융 중심지역인 중환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경제 흐름을 방해해 정부를 압박할 계획이었다.

‘금종 점령’은 9월 26일 밤에 일부 학생들이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앞에 있는 시민광장에서 경찰에 연행된 후 항의 운동이 일어나 전체 홍콩으로 확산된 운동이다.(2) 27일에는 약 5만여 명의 시민들이 금종으로 모여서 학생들을 지지했다. 그리고 28일에는 시위 인원이 계속 늘어서 경찰이 저녁 무렵 최루탄 87탄을 발사해 전체 홍콩을 놀라게 했다. 29일 홍콩대학생연합회(香港專上學生聯會, 8개 대학 학생들의 연합조직, ‘학련’이라고도 부른다)는 무기한 수업거부를 선포했다. 일부 사람들은 번화한 상업지구인 왕각(旺角, 몽콕), 첨사저(尖沙咀, 침사추이), 동라만(銅鑼灣, 퉁뤄완 혹은 코즈웨이베이)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텐트를 치면서 ‘점령’을 진행했다. 29일 저녁부터 30일 사이에 대략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경찰의 최루탄에 대비해서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나옴으로써 이 운동은 ‘우산운동’이라고 불리게 됐다.(3) 10월 20일 홍콩고급법원은 점령자들에게 즉시 금종과 왕각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21일 학생 대표와 홍콩 정부 대표는 2시간 동안 대화를 진행했고, 이는 모두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됐는데 결국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후 12월 15일 최후의 점령지였던 동라만 점령이 해산됨으로써 점령운동은 끝났다.

비록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이 주장하는 기본 목표는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와 입법회 의원 선거에 관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8월 31일 결의를 변경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일치하지만, 그 둘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중환 지역은 홍콩의 상징과 같은 지역이고 금종 지역은 홍콩 정부 소재지이다. 중환 점령은 전체 홍콩이 정치 체제 개혁을 요구한다는 의미가 있다. 한편 금종 점령은 홍콩 경찰과 정부의 강경한 조치에 대한 학생들과 각계 시민들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금종 점령 참여자 중 상당한 사람들은 선거 방안에 대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중환 점령도 찬성하지 않았지만, 28일 이후 거리로 나와 학생들을 보호하고 홍콩 정부가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자신들의 결의를 발표한 후, 10월 1일부터 중환 점령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예상 참여인원은 수천 명을 넘지 않았고 학생들을 주력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9월 28일 새벽 전혀 예상치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예정보다 서둘러 중환 점령 ‘사전 개시’를 선언했다. 그러자 당시 현장에 있던 일부 학생들은 이를 ‘도둑질(이용, 가로채기)’이라고 비난했고 일부는 현장을 떠났다. 입법회 민선의원과 사회운동 인사들은 ‘장발(長毛)’ 량국웅(梁國雄, 렁쿽훙)(4)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고 학생들이 남아서 중환 점령을 지지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5) 중환 점령 조직자들은 금종 점령 중 소외되었고 자신들은 운동을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다.

금종을 점령한 인원은 아주 많았고 통일적인 지도가 없었으며 상황도 아주 복잡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됐던 금종의 ‘점령구’는 일국양제(一國兩制, 중국이라는 한 국가에서 본토의 사회주의 체제와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가 일정 시기 동안 공존할 수 있다는 통일 정책-역주) 하의 민주와 자치를 주요 요구사항으로 내걸었고, 첨사저(尖沙咀)에서는 ‘반중(反中)’과 ‘홍콩 독립’ 구호가 나와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왕각에서는 점령운동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중환 점령은 북경을 대상으로 규모는 제한적이지만 목표는 거대했던 정치운동이었고, 금종 점령은 상당 부분 홍콩 정부를 대상으로 규모는 크지만 목표는 제한적이었던 운동이었다. 중환 점령은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지만 결국 그것을 실현하지 못했고, 금종 점령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서 대체로 자발적이고 돌발적으로 형성된 사건이었다.

서방의 매체들은 이러한 운동들을 모두 ‘민주 쟁취’와 ‘북경에 대한 항의’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을 구분하지 않는다. 홍콩의 반대파(즉, 입법회 중에 ‘범민주파’ 진영을 주체로 해서 평소 야당 역할(반대)을 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선거 방안에 격렬히 반대하고 점령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민주파’라고도 불리고, 입법위원회 중 친북경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건제파(建制派)’와 대립되는 세력이다.)는 금종 점령은 중환 점령의 필연적인 발전이기 때문에 정당의 요구를 군중의 구호로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홍콩 정부는 정부의 합법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점령 행동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이 둘을 하나로 묶으려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표면적으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결의를 지지하므로 중환 점령을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겨냥한 금종 점령을 반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중국 본토의 매체들이 이 두 운동을 구분하지 않고-예를 들어 금종 점령을 홍콩 지방정부의 대응 방식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반응이라고 분석하면서, 최루탄 사용의 정당성 등과 같은 문제에 토론을 집중하는 것- 오히려 이 두 운동 전후의 연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아마도 세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중국 본토 매체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합법-불법’을 기준으로 하는 입장이다. 어차피 불법은 중환 점령 계획과 금종 점령 행동의 공통된 본질이다. 그러므로 구분하지 않고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건의 성질에 대한 ‘배후론’적 사고방식이다. 배후 세력이 중환 점령을 계획했고 점령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배후 세력을 잡는 것이지 거리로 나온 학생들이 어떻게 이야기했고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중의 ‘사건화’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중환 점령이 제기한 원칙과 방안들이 금종 점령이 일으킨 교통 체증, 생활상의 불편함, 경제적 피해 등의 문제들로 바뀌었고, 따라서 기술적이고 전략적 조치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이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을 어떻게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분석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참가자들에게 동일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에게는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은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산운동은 2003년 23조에 반대한 7.1 대규모 집회(2003년 동건화(董建華, 퉁치화) 당시 홍콩행정장관이 홍콩의 기본법 23조에 근거해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후, 이에 반대하는 약 50만 명의 시민들이 7월 1일 시위를 진행했다. 홍콩 기본법 23조는 국가전복과 반란을 선동하거나 국가안전을 저해하는 위험 인물 등에 대해 최장 30년 감옥형에 처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이와 관련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규정했다.-역주) 이후 모든 사회운동과 지역운동, 정치개혁운동을 아우르는 대표적 사건이 되었다.

전형적인 비정치적 사회로 인식되던 홍콩이 최근 10년 시위와 침묵 연좌시위, 집회 등의 방식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등 예상치 못했던 고도의 정치화와 ‘운동의 형성’을 경험했다. 시위 동원 범위와 입장의 급진화는 의회 정치를 훨씬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운동은 자신의 순수한 시민사회로서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정당들과도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우산운동은 이 상징적인 우산이 거대해서 각종 운동의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인류학자의 일반적인 임무는 중대한 사건에 의해 가려진 일상생활과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본 의의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지만, 2014년 가을 홍콩에서는 일상생활 자체가 중대한 사건이었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의미는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 의미가 행동보다 컸으며, 상징은 상징되는 내용보다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인류학자는 하나의 우산 아래에 어떠한 다양성과 차이가 존재하는지 분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양성과 차이가 어떻게 하나의 ‘거대사건’으로 수렴되었는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이 운동을 직면해 이것을 순수한 이념(‘민주’)의 직접적 화신이나 국제적 음모의 결과로 보지 말고, 실제로 벌어진 사건 그 자체를 통해 도대체 무엇이 발생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이 거대사건으로 수렴된 여러 논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거대사건의 형성 중 모호한 ‘민주 홍콩의 독재 중국/본토에 대한 저항’이라는 틀이 각종 운동의 구체적인 요구에 녹아 들어갔고, 게다가 실제로 ‘민주’와 ‘독재’의 관계가 홍콩과 내지(중국 본토-역주)의 관계로 전화되고, 제도의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로 변화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결코 ‘홍콩 독립론’과 ‘종족론(族群論)’(6)이 특별히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온 관광객들이 최근 몇 년간 뚜렷이 많아지면서 홍콩 시민들이 이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중국 본토에 대한 반감(反感)이 커져서 운동의 중요한 동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7) 동시에 명확한 적에 대한 저항은 원래 건설적인 토론보다 더욱 호소력을 갖기 마련이라 저항은 손쉽게 문제를 타자-자아의 관계로 변화시켰다.

운동이 일단락된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운동의 목표가 일순간 물거품이 되어 형성된 좌절감이 협소한 본토론(本土論)(8)을 더욱 강화시킨 것은 아닌가? 원래 다양하고 구체적이었던 사회운동이 이러한 거대사건을 거친 후 더 큰 힘을 갖게 됐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해버렸는가? 2011년 금융 패권에 반대해 진행된 중환 점령 운동과 같은 사회 분위기가 2014년의 중환 점령을 통해 확대됐는가, 아니면 축소됐는가?(9)

저항 운동의 논리는 그것이 중공 체제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종종 무형의 거대한 것으로, 그리고 틈만 있으면 침투하려고 하고 경직되어 있는 독재 체제로 간주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전제정치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에 “중국을 바로 알고, 사회에 관심을 가지며, 나라와 민주를 사랑하자”는 구호는 어떻게 홍콩 청년들 사이에서 주류가 되었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어떻게 중국 본토를 흠모하는 소위 ‘국수파(國粹派)’가 되었는가? 1989년 피비린내나는 전제정치를 목도한 후에도 홍콩은 왜 여전히 평온을 유지한 채 ‘애국애항(愛國愛港, 나라(중국)와 홍콩을 사랑한다-역주)’이 인쇄된 티셔츠가 1997년에 높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는가? 그런데 2000년 이후 중국 본토가 개방정책을 시행하고 홍콩에 끊임없이 ‘선물을 보내는’ 상황에서는 왜 홍콩에서 오히려 ‘애국’은 비하적인 말이 되었고 ‘민주통일’ 구호는 ‘민주반공(民主反共)’으로 바뀌었는가?

우산운동은 홍콩과 중국 본토의 관계를 강조했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정확한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관계도 모두 필연적으로 역사적이고 구체적이며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지, 단순한 대립은 있을 수 없다. 중국은 종종 갑자기 군림하게 된 거대하고 속 빈 어떤 것으로 상상되곤 한다. 하지만 홍콩의 독특한 체제의 형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및 냉전 시기 중국의 독특한 위치, 1980년대 이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최근 20년간 홍콩 최대의 정치 변화는 사실 홍콩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중국 본토에서 어떻게 전제정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 본문에서는 ‘관계’의 시각에서 우산운동의 형성과 그 함의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이번 운동 중의 핵심 요구였던 홍콩의 ‘민주’와 ‘자치(자주)’가 어떻게 역사에서 구체적인 의의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운동 중에 거대한 동원 능력을 갖게 됐는지, 하지만 또한 어떻게 한계를 조성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 ‘일국양제’의 틀 및 그것과 중국 본토의 ‘당-국가’ 체제와의 관계로 돌아와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 문제를 질문하고자 한다. 즉, 중국공산당은 당시 ‘일국양제’라는 창조적인 제도를 제기할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이 중공이 가지고 있었던 설득력, 동원력 그리고 조정과 통합 능력은 어쩌다 위기에 빠지게 되었는가?

우산운동에 대해서 이 글은 외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지만, 홍콩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분석은 내재적 시각에서 쓴 것이다. 즉 나의 고찰은 이 관계의 변화에서부터 출발하려고 하는 것이지, 추상적인 ‘민주’, ‘독재’와 같은 범주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중공 체제에 대해 고찰할 때 나는 중공의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이해를 이론 자원 중 하나로 삼아 그 변화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중공의 담론을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내부에서 역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담론은 홍콩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 본토에서도 비현실적인 신화로 간주된다. 하지만 역사가 해석할 수 없는 황당한 웃음거리가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의 곤란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운동의 발생과 사건화는 홍콩 내부의 많은 사회 모순과 역사 간의 관계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운동의 발생과 사건화를 허구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매우 실질적인 사회적 결과를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현재 홍콩과 중국의 관계가 경색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홍콩의 2014년과 대만의 2014년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대만의 해바라기 운동(***) 또한 유사한 거대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의 이러한 새로운 정세는 우리를 거의 해결 불가능하고 소모적이기만 한 곤란한 상황으로 이끌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에 대한 토론이 일단 정체성 문제로 전환되면 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와 공론, 다원화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모두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협소하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이미 각지에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시기에는 인류학의 다양한 개입이 필요하다. 우리는 미시적이고 치밀한 민족지적 글쓰기도 필요하고 주류의 인식틀에 직접적으로 도전해서 사회 구성 과정 중의 연결들을 새롭게 다시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10)

2017년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 방안은 이번 운동의 중심 의제였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2014년 6월 10일 <홍콩특별행정구에서의 ’일국양제’의 실천>이라는 제목의 백서를 발표해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은 반드시 ‘애국애항(愛國愛港)’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8월 31일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 방안에 대한 결의를 통해, 먼저 추천위원회가 2~3명의 후보를 추천하고 모든 후보가 각각 추천위원회 위원 중 50% 이상의 승인을 얻으면 홍콩에서 등록된 모든 유권자는 1인1표를 행사해 직접 선거로 행정장관을 선출하도록 했다.

2017년의 추천위원회는 현재의 선거위원회의 연장으로 4개의 서로 다른 집단(11) 대표들이 1200명의 대표단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대표들은 각계에서 지정한 투표인들이 분배된 정원에 따라 선거로 구성한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추천위원회의 정원 분배와 선거 방법이 홍콩의 사회 구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사실상 공상업계와 소위 ‘친북경파’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후보가 추천위원회 위원 중 50%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사실상 민주파의 집권 가능성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애국애항(愛國愛港)’ 요구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기본법이 보장한 홍콩의 고도의 자치권 보장이라는 근본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행정구 행정장관 후보자는 시민들이 직접 추천하거나(‘공개추천’) 아니면 각 정당들이 추천한 후에 선거권을 가진 모든 홍콩 시민들이 직접선거하는 방식, 즉 ‘진정한 보통선거’를 제안했다.

‘민주와 자치’는 단지 선거 방안 문제만이 아니다. 점령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다른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한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선 사람들은 홍콩 사회의 경제 구조, 특히 극대화된 빈부격차와 청년 세대(즉 ‘제4세대’)의 기회 박탈 문제에 대해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부동산 산업과 금융업의 번영은 보통 서민들의 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대학 졸업생은 “최근 20년 동안 대학 졸업생의 임금 상승은 제한적이었지만 집값은 거의 10배가 올랐다”고 나에게 말했다.

적지 않은 홍콩 사람들은 중국 중앙이 홍콩을 통치하기 위해 홍콩의 부동산 산업 및 금융 자본과 연계를 맺고 그들을 지지해서 사회 불평등이 더 심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이 ‘민주’와 결부된 것이다.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는 사실상 ‘상인(商人)에 의한 홍콩 통치’였던 것이다. 게다가 중공의 고위직들이 홍콩을 불법 자산 처리 기지로 삼은 것이 중국 본토의 반부패 정책 중 끊임없이 드러났는데, 이로 인해 홍콩 사람들은 붉은(‘사회주의’를 의미-역주) 집권 세력과 자본이 공동으로 홍콩을 통치하는 것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됐다. 최근 폭로된 홍콩 공무원의 부패와 전통 주류 매체(특히 TV 방송국)의 중립성 결핍 역시 중국 본토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한 결과로 인식되고 있다. 일부 홍콩 사람들은 진정한 보통선거가 실현되지 않으면 홍콩 정부는 홍콩인들의 의견을 중시하지도 않고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홍콩 사람들의 민주에 대한 절박함은 홍콩의 국내 및 국제 지위의 하강에 따른 위기의식과 관련이 있다. 홍콩의 GDP는 이미 상해, 북경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곧 광주, 심천에도 추월당하고 있다. 홍콩 사람들이 내내 깔보았던 싱가포르도 홍콩의 국제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12) 이러한 위기감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홍콩에서의 일반적인 추측은 홍콩이 중국 경제에 점점 덜 중요해진 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점점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황금알을 낳던 백조가 반갑지 않은 새끼 오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중앙의 정책은 더이상 지원이 아니라 문제 처리에 속도를 내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2003년 이후 특히 2013년 이후의 중앙정부의 정책은 점점 강경해지고 있어서 마치 이러한 추측이 확인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파는 행동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경제적 이점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정치적 압력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13)

재차 말하지만, 홍콩 시민들의 중국 본토 사회에 대한 심리적 간극과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 정서는 무시할 수 없다. 중국 본토와 관련된 홍콩자유여행, 중국 본토의 보따리 상인들, 홍콩 원정 출산, 공기 오염, 취업 경쟁(14) 등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든 보통선거 방안에 대한 토론 중에 터져 나온 반감 정서는 상당히 뚜렷하다. 예를 들어 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은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8월 31일 방안이 후보자에 대한 제한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보통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격렬히 반대한다. 그들은 홍콩 사람들이 1인 1표를 행사해 선거에서 선출하기 전에 후보자를 통제하는 것이 홍콩 유권자들의 정치적 인격과 존엄에 대한 무시라고 생각하며 보통선거를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긴다. 한 대학생은 나에게 “(중국 정부는-역주) 무엇을 근거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우리 입에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그 결의를 발표하기 전에 홍콩의 각계는 정부에서 주최한 자문회의에 참여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기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민대표대회의 결의는 이러한 의견들을 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의 가장 가혹한 방안을 선택한 것으로 본다. 심지어 약간의 타협적인 제스처조차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후보자가 추천위원회 성원 중 50%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북경은 이미 이전과 동일하게 행정장관 선거를 통제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온건 민주파와 심지어 친북경파도 인민대표대회의 결의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무원의 ‘백서’는 홍콩에 대한 더욱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대립적 감정이 운동의 이후 발전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점령파의 민주와 자치권에 대한 요구는 허구적인 면도 있고 실질적인 면도 있다. 실질적인 면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허구적인 면은 그것이 다양한 사회 정서를 모아서 절충해버렸다는 것이다. 민주 담론은 이번 운동 중 특히 실질적인 것을 통해서 허구적인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으로써 거대한 동원력을 형성했다. 또한 직접적으로 중앙정부를 향한 저항적 구호로서 강력한 외향성으로 이어졌다. 민주의 내부 과정과 실질적 효과-보통선거는 어떻게 홍콩 경제의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가? 민주는 어떻게 홍콩의 경제 구조를 고도화할 수 있는가? 특히 현재 상황에서 홍콩의 다양한 사회 역량은 어떻게 효과적이고 질서 있는 민주적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가?-가 반드시 명확한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내부의 모호함 때문에 점령 운동은 대외적으로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번 운동의 합리성과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외향성을 분석해야 한다.

외향성은 홍콩 민주화 과정 중의 한 역사적 특징이다. 현재 홍콩의 민주 정당은 중국 본토의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서 1990년에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원래 홍콩 사회와 별로 관계가 없었던 사건인 1989년은 홍콩 민주운동의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1992년 크리스 패튼(Christopher Francis Patten, 彭定康, 영국인, 1992~1997년까지 홍콩 총독 역임-역주)이 홍콩에 부임한 후 그는 전임자와 중국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모종의 이해관계와 런던 측의 의문을 무시하고 정치 민주화를 빠른 속도로 추진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 측은 홍콩에서 정치단체와 정당을 육성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민주주의자가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애국자가 되었다.

오늘날 ‘민주파’와 ‘건제파(建制派)’는 대립하면서 홍콩의 정치 구조를 결정하는데, 그들이 홍콩 사회 내부를 얼마나 대표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홍콩 민주의 외향성은 또 형식적 정치 민주(실질적 경제 민주 및 사회 민주와 상대되는 개념인)에 대한 강조와 연계되어 있다. 홍콩의 기본 사회 복지와 법치주의, 정치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래 홍콩의 영국 정부 통제 아래 형성되었다.(15) 이러한 권익은 현재 민주화 운동의 목표는 아니며 민주화는 처음부터 중앙 정부와의 관계 문제였다. 이 또한 민주 운동의 강령이 추상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한 한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중환 점령 계획이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제출한 방안의 수정을 강조한 원인 중 하나는 그것이 ‘국제 표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 민주파는 다른 나라와 중국 간의 대립 관계를 이용해서 중앙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로 홍콩 문제를 국제화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을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외향성은 민주화운동이 외적 요인의 영향을 받고 그 지향이 홍콩의 외부를 향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가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은 현행 체제를 부정함으로써 일련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현행 체제의 내부 메커니즘과 반동의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의미하는 것이다.(16) 이와 관련하여 1989년 중국 본토의 학생운동은 깊은 교훈을 남겼다. 1980년대 후반 중국 민중들의 통화팽창에 대한 공포와 관료의 부패에 대한 증오, 가속화되는 사회 불평등에 대한 불안 등 이 모든 것들은 정치 민주에 대한 요구로 표현되었다.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마치 일단 민주의 빛이 비추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정치와 평등 관념에 기반해서 당시 권력 주도의 시장화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지만, 운동 중에는 오히려 사회주의 제도에서 벗어나라는 요구로 표현되었다. 어떻게 민주화를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어떠한 구체적인 구상도 없이 개별 책임자가 물러나라는 요구만 했다. 구체적인 사회 모순은 민주주의의 미완성으로 추상화됐다. 이는 오늘날 중국에 대해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사회문제에 대한 단순화는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고도의 일견 일치를 조성했다. 이에 따라 정치적 태도는 계속해서 급진화됐고 정치 요구는 계속 높아졌다. 그래서 결국 학생들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해버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운동의 칼날이 점점 개별 권력자를 겨냥하게 됐을 때 국가 내부의 고위층은 분열되었고 이것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전면적인 폭력 진압이 결정되었다.(17)

둘째, ‘민주’ 담론이 1980년대 초 조금씩 드러난 각종 사회 문제를 덮어버렸고, 그 결과 이러한 사회 문제는 오랫동안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에 대한 꿈이 산산조각 난 후, 지식인이나 경제인들, 관료들, 학계의 학자들, 어용학자들 모두 운동의 긍정적 요소와 한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진행하지 못해서 이후의 사회 변화에 대해 분석적인 참조점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셋째, 급진운동과 그에 대한 반격이 조성한 사상적 공백 상태를 통해 1989년 이후 중요한 위치를 맡게 된 관료들이 1989년에서 1992년 사이(1989년 ‘천안문 사건’에서 1992년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사이를 의미. 등소평의 이 남순강화를 통해 중국은 ‘천안문 사건’ 이후의 혼란에서 다소 벗어나 개혁개방 정책을 더욱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로 평가된다.-역주)의 동요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혁명 전통과의 밀접한 관계가 단절되어버렸다. 또한 그들은 서방의 정치 이념까지 배척하면서 그 결과 현존 제도 유지와 현실적인 이익 추구만을 중심으로 하는 임무를 자임하게 됐다. 1992년 이후 시장화는 더욱 맹렬히 진행되어 가공할 힘을 얻게 되었고, 경제 불평등은 전에 없이 가속화되었다. GDP가 계속해서 기록을 세우는 사이 자본과 권력 동맹은 각계각층에서 조용히 동맹을 맺었다. 따라서 중국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89년 운동의 발발과 그 후과로 분석한 왕휘(汪暉, 왕후이, 1997; 2008)의 주장은 핵심을 찌르는 분석이다.

당연히 오늘날 홍콩의 상황은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도대체 홍콩의 금융과 부동산 자본의 현황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 것인가? 불합리한 경제 구조에 도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계기를 찾을 수 있을까? 홍콩과 중국 본토,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관계는 역사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이에 대응해야 할까? 보통선거는 이러한 문제들에 결코 대답할 수 없다. 반대로 형식적인 정치 민주의 문제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진정한 문제들은 오히려 은폐될 수도 있다. 운동이 끝난 후 정치체제 형식이 어떻게 변화했든지 간에 핵심 이익 집단은 약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화될 수도 있다. 격렬한 운동은 어쩌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보수 세력에게만 합법성을 제공하게 될 지도 모른다.(계속)

  • 항표(项飚, 샹뱌오)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문화인류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경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졸업했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인구 유동과 사회, 경제적 변천에 대해 연구해왔고, 최근에는 중국 동북 지방 출신 주민들의 이주에 대해 연구했다. 대표 논저로 Making Order from Transnational Migration: Labor, Recruitment Agents and the State in Northeast China, Global Body Shopping, 『跨越邊界的社區―北京「浙江村」的生活史』와 이 책의 영문판인 Transcending Boundaries Zhejiangcun The Story Of A Migrant Village In Beijing 등이 있다.

<각주>

* 이 글은 대만에서 발행되는 학술지 <고고인류학(考古人類學刊)> 2015년 제83기에 게재됐던 글이다.

** “잔중(佔中, 점중)”은 중환(中環) 지역 점령을, “잔중(佔鐘, 점종)”은 금종(金鐘) 지역 점령을 의미. 이 둘의 중국어 발음은 ‘잔중’으로 똑같기 때문에 중국어로 ‘잔중’이라고 할 때에는 ‘중환 점령’을 의미하는 것인지 ‘금종 점령’을 의미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역주

1. ‘중환’과 ‘금종’은 일상용어로는 이 두 동명의 지하철역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이 두 지역은 모두 홍콩섬의 중서구(中西區)에 속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중환은 홍콩 금융의 중심 지역이고 금종은 2011년에 홍콩정부청사 건물을 완공하면서 행정 중심 지역이 되었다.

2. 9월 22일 월요일 홍콩의 25개 학교는 일주일간 수업 거부를 시작하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8월 31일 결의와 다른 의견을 발표했다. 수업 거부는 중환 점령 계획의 일부분이 아니었고, 게다가 학생들의 요구는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의 방안과 비교적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더욱 급진적이었고 중환 점령 방안보다 시민들의 지지를 적게 받았다. 26일 금요일 마지막 날에 학생들은 금종에 있는 정부 건물 근처 첨마공원(添馬公園)에 모였다. 같은 날 홍콩의 중고등학생 조직 학민사조(學民思潮) 역시 같은 이유로 하루 수업 거부를 진행하고 금종으로 모였다. 하지만 그날 다른 한 단체가 정부의 허가를 얻어 건국기념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시민광장(公民廣場)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시민광장은 원래 개방된 공공 공간이었지만 2012년 7월 ‘반국민교육’ 시위가 진행된 후 주변에 담이 쳐졌다. 26일 밤 100~200명의 학생들이 담을 넘어 광장으로 넘어 들어갔는데 74명이 경찰에 의해 포위되었고 학생 지도부 몇 명이 체포되었다.

본문의 ‘중환 점령’에서 ‘금종 점령’까지 발생한 일련의 정보는 홍콩과 각국(각 지역)의 중문 및 영문 매체, 특히 <남화조보(南華早報, South China Morning Post)>를 통해 수집했고, 나 자신이 10월 5일부터 8일까지 홍콩 현지에서 관찰한 것을 통해 취득했다. 그리고 탁가건(卓嘉健)과 량아천(梁雅茜)에게 중요한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3. 경찰은 9월 26일부터 최루스프레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에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방어하기 시작했다. ‘우산운동’이라는 말은 27, 28일 사이에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우산의 사용 규모는 28일 이후 갑자기 증가했고, 심지어 시위대가 우산으로 경찰을 공격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4. 량국웅(梁國雄)은 현재(2015년 당시-역주) 입법회 의원이고, 홍콩혁명마르크스주의동맹의 핵심 성원이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신봉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운동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입법회에서 여러 정치단체를 수차례 조직하고 탈퇴했다. 머리가 길기 때문에 별명이 ‘장발(長毛)’이다.

5. South China Morning Post, ‘Occupy Central is on: Benny Tai rides wave of student protest to launch movement’(Sung et al. 2014) 
<남화조보(南華早報,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홍콩과 중국 본토,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온 기자와 편집단이 이번 운동을 보도하는 중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보여주었고, 각 주체들의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남화조보팀’은 홍콩과 중국 본토 사회가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보여주었다.

6. 종족론은 홍콩 사람은 특수한 한 종족(혹은 민족, ethnicity)이라는 주장으로, 이는 홍콩의 언어, 문화, 역사, 사회구조는 중국 본토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홍콩은 중국 본토와 명확한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7. 홍콩 사람들이 비난하는 ‘자유여행’ 정책은 2003년 ‘사스’ 후의 홍콩 경제가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했다.

8. 본토론(localism) 논리에 따르면 홍콩은 당연히 주권을 가져야 한다. 급진적 본토론은 기본적으로 홍콩 독립을 주장한다.(본토론은 기본적으로는 추상적 측면에서 자기 지방의 역사와 문화 전통 등에 특별한 애착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여러 정치적 함의를 갖는 용어가 되었다.-역주)

9. 2011년 10월부터 2012년 9월 사이에 소수의 홍콩 청년들이 홍콩상하이은행 총본부 건물 앞 광장을 점령하면서 ‘중환 점령’ 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홍콩 정치경제 문제의 핵심을 직접 겨눈 운동이었지만 참여자는 보잘 것 없이 적었고 시민들에게는 전혀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2014년의 정치화된 중환 점령 운동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2014년 대만과 중국 본토 사이의 ‘서비스무역협정(海峽兩岸服務貿易協議, CSSTA)’에 반대해 일어난 대규모 항의 운동. 3월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무려 23일 동안 대만의 국회에 해당하는 입법원을 대만 역사상 최초로 점거했다. 시위 참여자들이 대만에서 희망을 상징하는 해바라기꽃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면서 일명 ‘해바라기운동’으로 불린다. 이 운동에서도 반중국, 대만 독립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했다.-역주

10.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은 홍콩 민주화가 홍콩 사회 내부의 역량에 의해 추진된 것(예를 들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서 민중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서 정치 참여의 통로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홍콩과 중국 본토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리고 홍콩의 ‘국제도시’로서의 지위(따라서 ‘국제’ 기준에 맞춰야 한다)를 유지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민주화의 동력이 홍콩 사회 내부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거나 내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요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민주화는 중국 본토에 대한 홍콩의 자기 보호 조치이자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조치이다. 소위 ‘외향성(externally oriented)’은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1. 이 네 집단은 각각 (1) 공상금융업계 (2) 전문업계 (3) 노동, 사회, 종교계 (4) 정치계를 의미한다.

12. 광주(廣州, 광저우)에 있는 중국 싱크탱크 ‘트리거 트렌드(智穀趨勢, Trigger Trend)’의 2014년 8월 보고에 따르면, 1997년 홍콩의 GDP는 중국 총 GDP의 15.6%를 차지했지만, 2013년에는 단지 2.9%만을 차지했다. 2010년 상해(上海, 상하이)의 GDP는 홍콩을 추월했고 2011년에는 북경(北京, 베이징)이 추월했다. 2017년이 되면 광주와 심천(深圳, 선전), 천진(天津, 톈진)이 모두 홍콩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Lu 2014)

13.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이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홍콩의 본토주의파는 이것이 중국 본토가 고의로 홍콩을 모함함으로써 압력을 가하고자 하는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전히 중국이 인민폐 역외 사업 개발 등에 대한 전략적 고려 사항에서 홍콩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홍콩은 과감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의 자본주의화 촉진에 대한 홍콩의 기능과 민주 가치에 대한 홍콩의 추구를 직접 연결시킨 것이다.

14. 보따리 상인(水貨客)이란 자가 사용이라는 명목으로 홍콩에서 휴대전화, 가전제품, 트렁크 가방, 식품 등을 구매한 후 세관 신고 없이 중국 본토로 운송해서 개별 판매업자들에게 되파는 것을 의미한다. 보따리 상인은 국가 간 무역 중 오랜 역사를 지닌 현상이다. 2012년부터 중국 본토의 보따리 상인들이 홍콩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하면서 홍콩의 분유 부족으로 시민들의 사회적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임산부 조산실 침대 문제는 2001년 이후 중국 본토의 임산부가 홍콩에 와서 출산하는 수가 늘어나서 조산실 침대가 부족해 홍콩 현지의 임산부가 조산실을 이용할 수 없었던 문제를 가리킨다. 2011년 이후 문제가 심각해져서 일부 홍콩 시민들이 시위를 하거나 중국 본토의 임산부들이 홍콩에 오는 것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15. 홍콩은 민주적이지 않고 ‘행정이 정치를 흡수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본적 권익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모든 역사적 과정이 비정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70년대에 홍콩 사람들의 생활이 개선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중국 본토에서 진행된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1967년 폭력성을 동반해 일어난 ‘영국 폭정 반대’ 운동이었다. 홍콩의 영국 정부는 이 운동을 통해 교훈을 얻어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 조치를 채택했다.

16.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을 제기하는 것이 홍콩 시민들이 실질적 민주화를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시의 공공 업무에서부터 대학 캠퍼스 생활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에 대한 추구는 매일 존재한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정당의 부상으로 대표되는 공식 민주화와 2003년 이후 운동의 전개이다.

17. 추당(鄒讜, TsouTang, 쩌우당)은 1990년 쓴 <천안문>(1994)에서 1989년의 비극적인 결과를 전능정치(全能政治, totalism) 체제 하 협상 체계의 결핍 때문으로 결론 내린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든 주체가 후퇴는 곧 패배이고 패배는 곧 죽음이라고 믿기 때문에 정치 게임은 생사를 건 사투가 된다. 추당은 그 글에서 자신의 희망을 국가와 사회의 화해와 재건에 기탁하며, “당국은 도덕적 오류와 이데올로기의 고갈로부터 도덕적 구제와 자신의 갱신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일부 학생들은 극단적으로 무책임한 태도에서 벗어나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 자신을 새로운 시민이자 충성스러운 반대파로 변모시켜 결국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당-국가와 사회의 화해는 중국과 세계 여론의 화해를 촉진할 것이다.”라고 썼다.(추당 1994: 203) 이 점에서 홍콩은 1989년의 북경보다 훨씬 낫다. 추당의 글을 알려준 담동학(譚同學)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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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Occupy Central is on: Benny Tai Rides Wave of Student Protest to Launch Movement. South China Morning Post, http://www.scmp.com/news/hong-kong/

article/1601625/hong-kong-students-beat-us-it-benny-tai-declares-start-occupy-cent ral?page=all, accessed April 10, 2015.

필자소개
项飚, 샹뱌오,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문화인류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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