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에 웬 오키나와?
[정의당 청년당원의 오키나와 기행①] – 평화의 섬, 투쟁의 발자취
    2019년 09월 02일 10: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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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갈등이 갈수록 심화 확대되는 요즘, 8월 16일~20일 정의당의 학생당원들이 일본의 오키나와를 찾았다. 물론 관광 목적이 아니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 투쟁과 진보운동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도영 정의당 국민대학생위원회 위원장의 방문기를 2회에 나눠 게재한다. 게재에 오재영추모사업회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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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여름에 오키나와 갈래?’

여행의 시작은 그저 이 짧은 한 줄이었다. 6월쯤이었던가. 함께 정의당의 국제연대 당원모임에서 활동하며, 정의당 서울대학교 학생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 친구가 갑자기 던진 뜬금없는 제안. 누구보다도 국제적 진보운동에 관심 많은 그 친구의 메시지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그렇다. 오키나와. 필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소위 ‘휴양지’로 불리는 여행지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여행을 가면 그 곳의 문화와 역사를 경험하고 무언가 바뀌어서 돌아와야 되는 게 아니냐는 쓸데없는 기준 탓에 남들이 흔히 가서 놀다 오는 보라카이니, 괌이니 하는 곳들은 검색조차 한번 해 본 적 없으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전까지 오키나와도 그런 류의 흔하디 흔한 휴양지 중 하나로만 여겼을 뿐이다. 일본 열도 남쪽의 조그마한 섬. 그런 섬에 볼 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이런 시국에 일본 여행? ‘NO JAPAN’ 현수막이 거리에 내걸리고,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서조차도 삿포로와 아사히 재고가 쌓여만 가는 지금 오키나와라니.

불매운동을 위시한 반일 국면 속에 오키나와 행을 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것은 물론이고, 정당인의 입장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혹여나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실제 함께 가기로 했던 당원들 중 다수는 일본의 한국 백색국가 제외 결정이 있은 직후 여행을 취소하기도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도대체 이 시국에 어떻게 일본을 갈 수 있지?

그러나 친구의 선택은 옳았다. 수많은 우려의 시선을 뚫고 오키나와를 다녀온 지금 저 질문에 대답하자면, ‘이 시국이기 때문에’ 이 여행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고 답하고 싶다. 그 어디보다도 깊고 긴 투쟁의 역사, 일본 정부와 미군에 맞서 평화를 위해 싸워 온 오키나와 민중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의 섬

가벼운 여행가방을 들고 인천에서부터 2시간을 조금 넘게 날아가니 어느덧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현청 소재지이자 최대도시 나하에 있는 국제공항에 내리자, 한국 이상으로 덥고 습한 날씨에 숨이 차온다. 그렇다면 반일 국면과 후텁지근한 날씨를 뚫고 찾아온 이 섬은 과연 어떤 곳일까. 저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 속에는 어떤 역사와 문화를 숨기고 있는 걸까.

상공에서 바라본 오키나와

일본 최남단의 행정구역 오키나와 현(沖縄県)은 류큐 열도를 포괄하며, 본섬인 오키나와 섬을 비롯한 다수의 크고 작은 섬들이 속해 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키나와 섬의 면적은 1,206㎢. 대충 제주도의 3분의 2만한 크기의 섬이다. 지구본에서는 찾아보기도 어렵고, 세계지도를 펼쳐 놓아도 눈을 찌푸려 가며 간신히 찾아낼 만한 크기의 작은 섬. 그렇다고 동아시아 3국 사이의 별 볼일 없는 섬으로만 치부하기엔 이 섬은 너무 길고도 드라마틱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류큐 왕국 –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언뜻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만한 이름. 오키나와 섬이 역사의 페이지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세기 경부터다. 부족국가의 형태로 시작한 류큐의 역사는 14세기 경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에 남산(南山), 중산(中山), 북산(北山)의 세 왕국이 수립되는 시점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세 나라는 곧 통일되어 현재 나하 시 근처 슈리(首里)에 도읍을 둔 류큐 왕국의 성립으로 이어지고, 17세기 규슈에서 내려온 사쓰마 번의 침공 전까지 류큐 열도는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주권을 영유했다.

사쓰마 번의 침공 이후 류큐 왕국은 명목상의 독립국으로서 명과 청에 계속 입조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 본토의 식민지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왕국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창설해 류큐를 병합했으며, 류큐는 형식상으로 일본 제국의 내지(內地)였으나 실제 그 대우는 식민지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 동아시아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일제의 병참 기지로 사용된 것은 물론이요, 오키나와 전투에서 주민들을 징집하여 총알받이로 동원하기까지 한 참혹한 역사는 전쟁의 참상을 되새기는 일화로 아직도 회자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의 결정으로 주권을 유지하게 된 일본 본토와 달리 류큐 열도는 미군이 점령하게 된다. 전쟁 내내 일본군과 싸우며 오키나와를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하게 된 미군은 동북아시아의 거점으로 오키나와를 이용하고자 했으며, 오키나와는 다시금 제국주의적 열강의 군사기지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와 미군의 합의 하에 철거된 주일미군 기지는 그만큼 더 오키나와로 옮겨졌다.

1970년 일본으로 복귀한 후 현재도 전체 주일미군의 75%가 일본 영토의 0.6%에 지나지 않는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 오키나와의 현실이다. 이쯤 되면 주일미군이 아니라 ‘주 오키나와 미군’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으로의 복귀가 미군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믿고 복귀운동을 펼쳤으나, 도쿄의 중앙정부는 인구 140만의 표조차 되지 않는 이 작은 섬을 철저히 배신했다. 그래서일까, 오키나와는 막강한 세를 자랑하는 집권 자민당이 절대 정치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흔치 않은 지역이다.

섬의 남쪽에는 1975년 조성된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전몰자들을 기리며 평화의 가치를 알리는 곳이다. 전쟁의 참상을 극복하고 아름다움을 되찾은 동북아 한가운데의 평화의 섬, 그 이면에는 아직까지도 미군과 일본 정부에 맞서 평화를 찾기 위한 주민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평화의 섬’에서 정작 주민들은 아직도 평화를 얻지 못하고 있다니.

평화롭던 어촌을 찾아서

2019년 지금, 오키나와 현 전체에서 가장 큰 사회적 쟁점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헤노코 기지 문제다. 헤노코(辺野古)는 오키나와 섬 북부 나고 시에 위치한 어촌 마을이다. 고작 인구 1500여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은 전혀 뉴스에 나오거나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곳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평화로웠다. 이 곳이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상징하는 후텐마 비행장의 이전 후보지로 선정되기 전까지는.

오키나와 현 최대도시 나하의 번화가, 국제거리.

오키나와 현 최대도시인 나하 근처 기노완(宜野灣)에 위치한 후텐마 비행장은 수십 년간 오키나와 미군의 대표적 공군 기지로 운용되어 왔다. 도시 한가운데 형성된 기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비행장’이라 불리며 주민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파괴했다. 긴 세월 동안 쌓여 온 수많은 문제들은 1995년 마침내 폭발했다. 후텐마 비행장에 주둔한 미 해병 2명과 해군 1명이 12세 소녀를 집단성폭행한 사건이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나하에서는 8만 5천여 명이 참여한 집회가 열려 미군에 대해 쌓인 분노를 토해냈다.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미군의 후텐마 비행장 반환 결정을 이끌어냈다. 모든 사람들은 오키나와의 미군이 철수하거나, 혹은 일본 본토로 옮겨가리라 믿었다. 문제는 비행장 반환이 조삼모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주일미군의 철수는 미, 일 정부가 원하지 않았고, 본토로의 기지 이전은 오키나와 사람들을 뺀 모두가 원하지 않았다. 결국 이루어진 것은 주민들을 배제한 밀실 합의였다. 1996년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총리는 후텐마 비행장을 헤노코 근방에 이미 존재하던 미군 기지 캠프 슈와브 근처로 확장 이전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후 2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도록 비행장 신축에 반대하는 헤노코 주민들과 오키나와 사람들의 시민 항쟁은 계속되고 있다.

시골 마을 헤노코는 벽지에 위치해 있다. 제주도보다 작은 오키나와 섬이지만, 나하 도심에서부터의 체감 거리는 서울에서 충청도쯤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과 철저히 남부 중심인 오키나와의 버스 시스템 탓일지도 모른다. 혹시나 방문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나하 버스 터미널의 5번 플랫폼에서 77번 버스를 타고 제2헤노코 정류장에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미군 기지 캠프 슈와브의 입구에 있는 헤노코 농성장에 도착한다. 소요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요금은 편도 1,780엔.

버스에서 내리자 마치 우리네 시골 마을을 연상케 하는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조금만 걸어가면 푸른빛의 바다도 멀찍이 보인다. 농성장은 수많은 피켓들로 인해 수백 미터 앞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그 중 해양 포유류 ‘듀공’을 그린 피켓이 눈에 띈다. 전설 속 인어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귀여운 동물이다. 헤노코 마을이 위치한 오우라 만은 본래 이 듀공의 최북단 서식지였으나, 미군 비행장을 짓기 위한 간척 사업으로 인해 얕은 바다에서 서식하는 듀공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만 간다고 한다.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군사기지의 확장은 민중의 삶뿐만 아니라 동물의 삶조차 가차없이 파괴한다.

2시간 반이나 걸려 헤노코에 도착했지만 안타깝게도 농성 중인 주민들을 만날 순 없었다. 8월의 오봉 연휴 기간이라서인지. 아니면 그저 주말이라서인지. 혹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헤노코 비행장 설치에 반대하는 야권단일후보 다마키 데니(玉城 デニー) 오키나와 현지사가 당선되어 상황이 호전되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후자라면 매우 다행이고 또 23년이란 상상도 되지 않는 오랜 투쟁에 주민들이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주민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또 연대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산된 점은 매우 아쉬웠다.

헤노코의 미군기지 캠프 슈와브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확장공사가 진행 중이다.

미군의 경고문과 주민들이 붙인 ‘NO NEW BASE’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캠프 슈와브의 비행장 신축공사는 농성장에 혼자 앉아 있는 동안에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공사는 아베 정권의 강행으로 작년 11월 1일 재개되었다.) 텅 빈 농성장과 바닥의 피켓들, ‘하야쿠 하야쿠’를 연발하는 공사장의 모습,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 필시 오키나와 사람들일 – 무뚝뚝한 경비원들은 묘한 대조를 이뤘다. 국가란 이렇게 시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그저 무시하는 존재라는 말인가. 저기 서 있는 이들에게는 과연 오키나와인이라는 정체성이 존재할까, 아니면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존재할까. 이 싸움에서 과연 주민들은 이길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연휴 기간이라 텅 비어 있던 헤노코 농성장의 모습.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을까. 결국 농성장을 찾은 주민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기에는 너무 아쉬웠으므로 편지를 썼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번역기의 도움을 받았다. 함께 가져간 당 배지를 꽂아 놓고, 옆의 재떨이로 테이블에 눌러 놓았다. 멀리 한국 땅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이들의 투쟁에 누군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이런 당의 당원이었다는 것도. 뭐 언젠가는 다시 올 기회가 있겠지. 언제일지 몰라도 그 때는 저 앞의 미군 기지가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래는 짧은 편지의 전문.

‘하이사이(ハイサイ, 안녕하세요의 류큐 토착어)!

우리들은 한국에서 왔고, 한국의 진보정당 정의당의 당원들입니다. 우리는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제국주의와 싸우는 여러분의 투쟁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직접 만나 연대하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아무도 계시지 않아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곳에 왔었다는 증표로 우리 당의 배지를 놓고 갑니다.

여러분의 싸움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합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기지가 사라지는 그 날까지 한국에서 우리도 계속 여러분과 연대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아쉬움을 대신하여 짧은 편지를 남겼다.

연대, 그 무엇보다도

오키나와의 역사를 살펴보고 헤노코 마을에서 투쟁의 현장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이들의 역사에 우리의 현대사가 너무도 쉽게 오버랩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도, 비교적 근래의 사드 배치 사태까지도. 우리가 주한미군으로 인해 겪었던 수많은 문제들을 이들 역시도 똑같이 겪고 있고, 그 원인은 결국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적 패권주의에 있다.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여 군대를 보유하려는 아베 정권 역시도 철저히 그런 행보를 걷고 있으며, 이는 그저 동아시아 각국의 군사화를 추동하여 위험한 길로 이끌 뿐이다.

최근의 불매운동을 위시한 반일 조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것은 ‘노 재팬’이 아니라 ‘노 아베’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민족주의가 진보적 성격을 띠고자 한다면 그것은 일본의 수많은 시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 확대를 노리면서 제국주의적 행보를 일삼는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것이어야만 하지 않을까. 자신들을 대변해 주지 않는 정부에 맞서 누구보다도 긴 싸움을 이어온 오키나와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 만한 투쟁의 방향성을 온 몸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일관계가 긴 터널 속을 걷고 있는 지금 이 시국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진보적 의식을 공유하는 한일 노동자 민중 간의 연대일 것이다. 우리 사회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오키나와의 투쟁을 바라보며 진정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평등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런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필자소개
정의당 국민대 학생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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