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교조'와 정면 대결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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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24일 04: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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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 전문프리랜서로 활약한 박정훈씨가 ‘신좌파를 디자인하자’는 제목으로 편지형식의 칼럼을 <레디앙>에 연재합니다. 그는 "그 동안 진보진영의 모든 교조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데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미래를 그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진보진영의 문제는 양대 정파였던 자주파-평등파를 뛰어넘는 정치세력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민주노동당의 대선 참패는 진보진영의 양대 정파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노출하였고 평등파 단독으로 창당된 사회당의 사실상 퇴출은 새로운 정파의 등장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안 세계화운동의 상징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원주민 사령관들을 특종 인터뷰했고, 브라질 룰라 정부의 집권 소식을 상파울루 현지에서 타전했으며,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정치적 파란을 겪을 때마다 까라까스 현지에서 원고를 송고했던 라틴 아메리카 전문가인 필자의 칼럼에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신좌파를 디자인하자 0]

    네루다의 부드러움과 ‘삶을 지키고 바꾸는 진보’

    진보의 이름 짓기가 한창입니다. 손학규는 ‘새로운 진보’, 유시민은 ‘유연한 진보’를 내세웁니다. 범여권의 누가 이름을 짓든 신자유주의라는 ‘유일사상’에 백기 투항한 진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와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진보진영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그대들은 내게 부드러움 외에 다른 깃발이 없다는 것을 알지 않은가!”라고 말한 것은 칠레 공산당의 열성당원 파블로 네루다였습니다. ‘친애하던 동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쿠데타 군의 총에 살해되던 독재의 시대와 교조의 시대, 안팎의 적에 맞서 싸우던 네루다는 자신이 ‘부드러움’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조에 교조로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성공할 리도 만무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필자에게 ‘갓난 진보’를 위한 작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삶을 지키고 바꾸는 진보’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지혜롭게 그간 얻은 것을 방어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한 선배가 ‘믿음직한 진보’를 주장합니다. 좋습니다. 또 다른 선배가 ‘실력 있는 진보’는 어떠냐고 묻습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강한 진보’는 안 됩니다. 우선 그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또한 그렇게 말하면서 성찰의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강했을 때 혹은 더욱 강해지리라 굳게 믿고 있었을 때 반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을 놓고 토론을 벌이자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앞으로 제가 ‘신좌파를 디자인하자’는 제목으로 쓰게 될 글들은 어떤 거창한 제안이 아닙니다. 비장한 선언문도 아닙니다. 그저 이 글들은 일련의 질문들에 불과합니다. 해답을 모를 때는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게 낫다는 금언을 충실히 따르고자 합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주제들을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그 주제들이 좌파 정치의 재생을 위한 의제들이 되고, 그것을 둘러싸고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경합하고, 그 결과 다양한 대안으로 성장해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성역 없는 혁신’은 ‘성역 없는 성찰’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교조들은 우리가 전투에서 사용해야 할 칼날을 무디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다시 그 날을 벼려야 할 것입니다.

    <추신>

    제가 생각하기에 신좌파는 무엇보다도 삶을 즐겁게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강하고 비열하고 비장한 ‘적’ 앞에서 웃으면서 떼거지로 덤벼드는 ‘즐거운’ 좌파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비장하고 엄숙한 신자유주의 묵시록으로부터 삶을 지키고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신좌파를 디자인합시다. 미래의 삶을 디자인합시다. 그래서 여기에 실릴 글들은 여러분들에게 제가 보내는 초대장입니다. 나도 거들고 싶다! 혹은 때려치워라! 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반론이나 격려문으로 제 글 사이에 끼어드십시오.

                                                          * * *

    [신좌파를 디자인하자 1]

    민주노동당은 왜 대선에서 참패했을까?

    입장은 위치니까 먼저 제 위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민주노동당의 자주파 혹은 평등파 입장에서 대통령 선거를 접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민주노동당에 우호적인 시민으로서 대통령 선거를 접근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가 외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도 당원으로서 제대로 활동할 기회도, 당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7년간의 민주노동당 역사에 있어서 저는 늘 우호적인 방관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번 대통령 선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에서 열심히 활동한 동지들은 제 평가에 대해 야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민주노동당이 실제로 한 일과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이 했다고 생각하는 일을 바탕으로 대선을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론 박수 치며 환호하고 때론 야유를 보내던 관객의 입장에서 한국 정치의 플레이어였던 민주노동당을 평가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플레이어의 의도와 관중의 해석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선수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살 골이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살 골 넣은 이의 의도를 고려해 야유를 보내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1. 대선 참패의 세 가지 이유

    열린우리당 좌파

    첫째, 민주노동당은 민주개혁 의제와 한반도 의제를 놓고 벌인 논쟁과 실천에서 늘 ‘열린우리당의 좌익’에 불과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늘 범여권에 ‘사이비 개혁 세력’ 혹은 ‘사이비 진보’라고 비판을 퍼부었지만 그들이 제기한 것과 구별되는 의제 수립 및 추진 전략을 제시한 바 없습니다. 즉 범여권이 개혁 의제를 추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지만 대안적인 추진 경로와 전략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한반도 의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좀 더 과격하게 북을 옹호하고 좀 더 격렬하게 미국을 비판했지만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실질적 대안은 범여권의 그것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일원이 ‘북핵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며 북한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는 입장을 표명하여 당을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그가 한국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실질적으로 제시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주파의 대북외교전략은 그 실천에 있어서 열린우리당판 민족주의 대북외교전략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평등파 진영은 북한 핵실험을 비판한다는 입장 외에 독자적인 대북 외교 전략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대선 때 권영길 후보는 범여권이 주도하고 있던 부패 의제에 압도되어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우호적 관중의 눈에도 민주노동당은 비판은 많이 하지만, 범여권보다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세력으로 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요컨대 뭐가 다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범여권에 대한 거침없는 공격으로 정치에 대한 냉소를 조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다른 정치를 보여주지도 못하는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한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을 한 시민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닐까요?

    이명박식 복지에 압도당해

    둘째,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복지 의제는 이명박식 복지정책에 압도당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이 무상의료, 무상교육, 대학평준화 등의 복지 의제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을 때 이명박 후보는 ‘생애주기를 고려한 복지’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이고 실현가능성이 높은 정책을 제시했습니다.

    2004년 총선 시기 민주노동당은 복지 의제를 선점했습니다. ‘부유세’가 민주노동당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실질적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부유세라는 광맥은 채굴되지도 못한 상태로 광산은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유럽산 부유세를 한국화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여 의제로서의 생명력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 민주노동당의 복지 의제는 이명박식 복지에 압도당했다. (사진=뉴시스)
     

    유럽의 사민주의 정책들은 강력한 노동자운동과 자본가의 사회적 타협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고립무원의 노동자운동과 강력한 재벌의 한국적 토양에 도입하기 위해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특히 수입품이라는 냄새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설득력 있는 대안이 없을 때 국민들은 아예 외면해버리거나 존재하는 대안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라고 판단하는 대안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위탁정치에 머물어

    셋째, 민주노동당은 정치 의제들에 대한 독자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정당이 아니라 모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진영에 떠넘기는 ‘위탁정치’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노동정치는 민주노총에 ‘위탁’했고 환경, 여성, 교육은 모두 관련 시민운동단체나 노동조합에 떠넘겼습니다. 그 결과 시민운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을 정권에 참여시키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요 의제들을 시민운동 진영에 위탁했던 열린우리당판 ‘위탁정치’와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민주노동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열린우리당이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비판만 무성했지 민주노동당의 독자적 대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위탁정치는 조직의 기반에 일차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노동조합과 시민운동단체들의 운신의 폭과 의제설정 및 추진능력에 민주노동당의 정치를 종속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립무원에 허덕이고 있는 민중운동 진영과 의제의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민운동 진영에도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독자적인 사회연대적 관점에 입각하여 부분적 이해로 사분오열돼 있는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모든 단체들의 연대를 촉진하면서 이 국면을 돌파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모든 영역들은 방치되고 말았고 민주노동당의 정치력은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상 열린우리당의 좌익에 불과했던 ‘과격한 들러리’ 정치, 먼저 의제를 제기해놓고서도 자신의 정치력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죽 쑤어 개주는 정치’,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맡기는 ‘떠넘기기식 위탁정치’의 말로는 무엇이었을까요?

    범여권의 붕괴는 민주노동당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범여권의 프레임에 갇혀 발버둥쳤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고립과 의제 빈곤은 곧바로 민주노동당의 정치력을 강타하였습니다.

    당 안의 정파들과 당 밖의 정파들 가운데 위에 열거한 실천과 다른 모습을 제시한 세력이 있을까요? ‘탈 배제 전략’을 내걸고 장애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실천한 사회당이 아마 유일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성과는 민주노동당이 고스란히 흡수했습니다.

    제 목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정치세력의 말로는 예견된 것입니다. 자신을 좌파 정당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제 목소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는 그 누구에게도 대변된 적이 없는 시민들이 아주 많습니다.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많은 출마자들이 무대에 올랐지만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으며 기권을 선택한 약 40%의 시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을 외면한 모든 시민들이었습니다.

    2. 어디에서 시작할까?

    접근법을 달리해보면 87년 이후 진보진영이 제기했던 모든 의제들이 정치적으로 실현되기는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독재 민주화의 여러 의제들(인권, 과거사 진상규명, 민주화 운동기념, 정치개혁)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의해 염가로 추진되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제기한 복지 의제는 이명박의 생애주기를 고려한 복지정책에 의해 대폭 할인되어 흡수되었습니다. 시민운동이 제기한 여러 의제들(환경, 여성)도 불만족스럽지만 정치에 반영되었습니다. 여성의제를 사들인 것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였고 환경의제를 개발주의로 변형시킨 것은 이명박-오세훈의 서울시청이었습니다.

    의제 제기보다 실천이 중요

    여기서 의제를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제를 제대로 실현시켜서 자신의 정치력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제시했으나 실천하지 못했고, 사회당이 부분적으로만 실천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좌파 정당의 독자성을 가장 잘 보여줄 것입니다. 좌파 정당의 정치력을 제고시켜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연대의제, 사회당의 어휘로 말한다면 ‘탈 배제 의제’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좌파 진영이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은행 노사가 자발적으로 비정규직 협약을 맺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그 사실만으로도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치적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환기시켜주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민주노동당 쇄신파건, 신당파건, 사회당이건 정당 밖의 좌파건 그 누구든지 간에 한국 좌파는 사회연대의 원칙에 따라 모든 의제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과거와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의제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바야흐로 우리 모두의 공동의 적, 신자유주의에 맞서 ‘삶을 지키고 바꾸는 진보’의 길을 가고자 싸우려는 모든 세력들은 먼저 자신의 교조와 맞서 싸워 이겨야 할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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