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대 심화되는 한일 갈등,
    노동권·인권·평화의 브레이크가 필요
    [상선여수] 무엇이 강화되고 무엇이 약화되고 있나
        2019년 08월 27일 02:1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식민 지배를 당한 우리에게 일본은 가깝지만 먼 나라다. 특히 해방 이후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내부의 문제와 침략전쟁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이라는 외부의 문제가 겹쳐지면 언제나 ‘적에 가까운 나라’로 발전한다. 최근의 사태 전개는 양국 관계가 거의 적대국 관계로 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12년에 이어 2018년 강제동원 노동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이 배상 판결을 확정한 것을 계기로, 2019년 올해에는 일본이 수출 규제와 화이트리스트 국가 배제 등의 경제보복을 자행했다. 한국도 이에 맞서 경제적 대응조치를 취하고 최근에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종료 등 양국의 역사·경제 갈등은 점점 첨예해지고 있다.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 일본은 더 나아간 대응조치를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나는 항상 자본이 무섭다. 한번 사냥의 실패가 어떤 굶주림을 가져오는지를 잘 아는 맹수가 아주 작은 짐승을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듯, 자본은 언제나 ‘집중’한다. 그들은 위기를 부추기고, 이를 자본축적의 기회로 삼는 데 유능하다. 최근 사태도 마찬가지다. 일본에 대한 분노가 강화될수록 경제적으로 극일(克日)을 위한 자본의 대응이 중요해진다. 정부가 나서서 ‘경제전쟁’ ‘경제침략’으로 규정 선동하고 이를 빌미로 자본에게 유리한 여러 정책과 조치가 단행된다. 그리고 애국심에 고취된 국민들은 이런 정부 조치에 ‘상황의 논리’를 핑계로 문제점들에 눈을 감고 지지한다.

    자본은 때를 맞춰서 핵심부품 소재 개발 등 R&D 분야 프로젝트에 주 52시간제를 넘는 추가연장근로 허용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정부는 R&D 분야의 특별연장근로 허용과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재량근로제 적용 지침을 마련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화답한다. 자본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의 규제 완화를 촉구한다. 그들은 이들 법률이 “소재와 부품의 국산화를 막는 망국병”이라 부른다.

    정부는 최대 3천억원의 추가경정예산 반영은 물론 부품‧소재‧장비산업 육성을 국가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 중의 하나로 삼겠다고 답한다. 필요한 경우 각종 법률의 완화도 추진할 것이다. 일본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며 의료민영화의 일환인 바이오헬스 혁신전략 관련 입법도 추진한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를 만들자는 논리가 상황을 지배하는 제1의 가치가 되고, 이런 극일 항쟁(?)의 선봉에는 삼성 등 대기업이 우뚝 선다. “국정농단, 노조파괴, 삼바 분식회계 범죄자” 이재용의 재구속은 물 건너가는 분위기이다. 극일의 선봉 기업 총수를 어떻게 다시 구속할 수 있으랴.

    그러나 사태의 원인을 알아야 올바른 대응이 가능하다. 이번 2018년 대법원 판결의 가장 큰 의의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불법성과 강제동원 강제노동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명확하게 규정했다는 점과 소위 1965년 한일협정체제(청구권협정)의 근본적 문제와 한계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일본 아베 총리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65년 협정에 근거한 한일 관계의 근본을 부정하고 훼손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베 총리가 경제보복 조치의 이유로 한국 대법원 판결을 직접적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이유이고 배경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현실적으로 한국 법원이 판결에 근거하여 압류 등의 법적 강제조치를 취할 수 있는 대상은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으로 당연히 제한되어 있다. 한국에 있는 신일철주금(구 일본제철)의 경우 설립자본금은 130억원이고,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235억원이다. 이 가운데 주식 8만 1,075주, 약 4억원이 압류 대상이다. 한해 매출액 60조원인 회사로서는 별 게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법원이 적법한 판결에 근거하여 관련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행정부에서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게 한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것이 하나의 단순한 판결과 집행 문제가 아니라 65년 협정에 대한 재해석에 근거하여 일본 기업의 자산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며 이는 한일 관계의 기본 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양국 사이 갈등의 뇌관인 것이다.

    현재 양국 갈등의 해소와 완화, 나아가서 해결을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조건이 존재한다. 해방 후 우리는 일본과의 교전국, 승전국 지위에서 배제되었고, 또 중국과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48개국이 맺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불안정성과 모호성, 한계들을 규정하는 기본 요건이 되었다. 결국 일본을 냉전 체제 하에서 동아시아의 대 사회주의 전진기지로 재구축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식민지배의 청산, 제대로 된 한일 간의 관계 정립을 가로막고 비틀어버리는 규정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해석이 50년이 넘게 서로 상이하게 평행선을 달려왔던 배경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후 진행된 50여년의 과거를 지워버릴 수 없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갈등이 극한적으로 전면적으로 확산되는 게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야 되는 이유이다.

    대중들의 분노는 현실의 누적된 모순이 폭발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분노는 그 자체가 문제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일본에 대해 ‘경제침략자’, 자유한국당에 대해 ‘토착왜구’라 부르면서 대응하는 것은 심리적 위안을 줄지언정 진정한 문제 해결에는 방해가 될 뿐이다. 침략자라는 규정에는 오직 방위전쟁이라는 논리만이 살아남고 왜구라는 비아냥에는 박멸만이 해법으로 제공된다. 진정 그것이 해법인가? 얼마 전 공식적인 대중 집회 자리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토착왜구, 친일파, 박멸 등의 언어와 몸짓 공연을 하는 것을 보면서 공감이 아니라 우려와 걱정이 앞서는 것은 과한 반응일까?

    일본제품 불매, 일본관광 자제 등의 대중행동과 흐름은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 왜곡과 경제 보복, 우경화·재무장에 대한 우려와 반발이 정서적으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왜곡의 역사를 풀고자 하는 대중적 열망이 묻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일본인에 대한 폭행 등 맹동적이고 무절제한 행동에는 비판적인 게 국민들의 일반 정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성적인 대중의 열망과 흐름을 “경제 한일전으로 규정하고 총선에서 활용”, “일본과의 갈등은 북한 도와주기이고, 친일을 해야 경제가 산다”는 식의 정략적 접근으로 왜곡하는 것은 오히려 정부와 정치권이다. 이런 식의 대응은 문제를 꼬이게 할 뿐이다.

    최근의 갈등 사태를 보면서 무엇이 강화되고, 무엇이 약화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국의 갈등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요소로 적극 활용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애국심의 이름으로 노동권과 인권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려는 조치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민주당과 자유당은 친일과 반일로 정쟁을 벌이면서도 이 지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일본에서는 북한과 더불어서 한국을 문제집단으로 규정하면서 일본 우파의 염원인 평화헌법 개정, 재무장과 우경화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고 있다. 강화되는 것은 자본과 보수의 논리이고, 약화되는 것은 노동권과 인권, 평화의 논리이지 않을까? 맹동을 넘어서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양국의 노동자들과 민중들이 함께 주장하고, 요구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을 고민하고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 정책실장. 정치위원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