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갈이'하자던 민주노동당, 지금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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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28일 02: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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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는 제갈공명을 만남으로써 날개를 얻는다. 그 전의 유비 3형제는 의기는 충천했으나 여기저기 쫓겨다니는 유비의 모습은 흡사 상가 집 개라는 평을 들은 공자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도 흉중에 대의를 품은 듯한 태도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 제갈공명의 초상화
     

    상가 집 개처럼 쫓겨 다니지만 마음 속에 대의를 품는 것으로 치자면 1987년부터 독자후보노선과 진보정당운동에 매진해 온 분들이 그런 마음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경험도 힘도 없지만, 대의와 명분 하나로 시대흐름과 맞섰던 분들의 모습이 쫓겨다니던 유비와 상가 집 개처럼 주유하던 공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진보정당의 대의 앞에 어려움과 시련, 모욕은 사소한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의 당선을 방해한다 하여 2002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를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으로 지칭한 민족민주운동권 인사마저 있었으니 적은 항상 가까이에 있는 모양이다.

    상가 집 개와 같이 떠돌던 유비는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로 드디어 전략을 얻게 된다. 한왕조의 후손이라는 의리와 명분을 최대한 깨뜨리지 않으면서 조조와 손권 등과 다툴 수 있는 묘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나라 시절 지금의 촉 지방이 얼마나 개발되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천하삼분지계는 유비로서는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어찌되었든 수비 하나는 쉽게 할 수 있으니 조조의 압도적 군사력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황제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믿고 유비와 그 일당은 자신의 역량을 투여하였고, 유비의 한중왕 등극 등으로 일부 가시화되기도 한다.

    2004년 총선 당시의 당시 노회찬 후보가 제기했던 판갈이론은 초보적인 천하삼분지계를 연상시킨다. 판갈이론은 비례대표제와 탄핵사태의 열려진 공간 속에서 진보정당을 염원하는 국민들과 새로운 세력을 지지하는 흐름이 중간에 있었고, 민주노동당의 3당 도약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이 당내 정당 비례대표 후보선거에서 당원 1인당 4표(일반후보 2표, 여성후보 2표-편집자)만 행사하도록 한 것은 실제로 당선권이 네 명 정도라고 예측한 민주노동당 내부의 각 정파들이 주판알을 튕기며 합의한 것이라는 점을 볼 때 민주노동당의 3당 도약은 당내에서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판갈이론은 단순히 원내진출에만 목말라 있던 민주노동당과 그 지지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아스팔트 위를 제외하고 언론과 시민단체, 국가기관 등 모든 힘 있는 곳에서 상가 집 개처럼 왕따를 당하던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이라는 소극적 목표 대신 판갈이라는 적극적 목표를 가지게 된 것이다.

    2003년도 9시 뉴스에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이 세 번인가 나왔다고 하는 통계는 사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의 미스터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차상인보호운동과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으로 기초체력을 닦은 민주노동당은 판갈이론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숨겨져 있던 힘을 총선과정에서 최대한 끌어 올린다.

       
    ▲ 2004년 5월 31일 민주노동당 의원단의 첫 국회 등원. ⓒ연합뉴스
     

    총선이 얼마남지 않았던 주말, 진짜 불판을 들고 윤중로를 선거운동원이 되어 나섰던 필자는 노회찬 의원이 제기한 판갈이론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였다. 당이 주관한 행사 중에 가장 호응이 많았던 이 행사는 노회찬 의원이 KFC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 인형처럼 당시 수백의 인파들과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감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은 판이하게 전개된다. 판갈이론은 얼마 되지 않아 개혁공조와 2중대론에 묻혀 버렸고, 그것은 진보개혁세력 세대교체론으로 완전히 변질되어 버렸다. 판을 갈자고 주장하더니 그 갈아야 할 판 주인의 부하가 되겠다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갈아야 할 판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 민주노동당의 아이러니는 두고두고 진보정당의 역사에 희극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민주노동당의 천하삼분지계는 실현될 기회도 없이 거의 사장되어 버렸으며, 자신의 거점도 마련하지 못한 채 다른 세력의 손만 들어 준 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모범 의정활동을 하지 않았어도, 과거 지향적이기는 하지만 완강하게 버티면서 3당으로서의 전략을 끝까지 고수한 민주당의 복귀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보면 더더욱 뼈아픈 것이다.

    천하삼분지계는 제갈공명 머리 속의 단순한 창작물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소수 세력이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략 중의 하나이며, 별다른 자원이 없는 집단에서 채용할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인지도 모른다. 이를 발판으로 천하양분지계이든지 천하통일지계를 세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전략을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발로 차 버린 민주노동당의 지도부는 두고두고 정치사가의 연구대상이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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