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민족’ 틀을 넘어
    민주·인권의 보편 가치로!
    한일 갈등 정의당 부산시당 토론문
        2019년 08월 23일 04: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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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문재인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하면서 한일 관계 및 한반도와 한미일, 북중러 등을 둘러싼 정세의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불투명성이 더 짙어지고 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관련 판결, 일본의 수출규제 등으로 예각화되고 있는 한일 갈등과 관련하여 정의당 부산시당에서 19일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의 발제문을 필자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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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관과 비관이 나름의 근거를 갖거나 아예 없거나를 막론하고 떠돈다. 유투버들은 믿거나말거나 극과 극을 치달리며 돈을 긁는 중이다. 독립운동가가 된 듯한 당이 있는가 하면 친일파로 낙인찍힌 것 같은 당도 있다. 꾸준하기로는 불매운동이 있다. 여기 편승한 민족주의가 대세처럼 보인다. 정의당은 GSOMIA 파기로 반짝 하더니 이후로는 별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별 수 없이 우리라도 머리를 맞대고 말을 나눠보기로 했다.

    발제문은 먼저 이 문제를 민족주의로 접근할 때 생기는 문제를 짚어본다.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일본 ‘알기’를 시도한다. 아베는 왜 저러고 있고 일본 시민들은 또 왜 저렇게 조용히 추종하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거기 우리와 통할 누군가는 없는 걸까? 있다면 누구고 거기 닿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어서 정의당의 방침을 비판적으로 살핀다.

    이로써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역사’나 ‘민족’처럼 일본과 영원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가치가 아니라, 일본 사회와 통하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시민과 통할 수 있는 가치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보편 가치가 파괴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믿음에서다. 아베는 그 가치를 깨뜨린 것이고 우리는 그 가치를 회복하는 싸움을 벌여야한다.

    민족주의로 접근하면 안 되는 까닭

    – 한일 정권이 민족주의로 충돌하면 양쪽 모두에 정권+재계(재벌)이 상층부에 자리 잡고 노동자, 중소기업, 영세업자들이 바닥에 위치하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삼성과 SK가 졸지에 ‘애국기업’이 되고 어제까지 범죄자 취급 받던 이재용이 애국자가 되는 걸 보고 있지 않은가. 52시간 노동시간에 예외가 생기고 환경 규제 완화가 거론된다. 이 수직적 위계질서는 각종 개혁을 가로막고 경제민주화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한일 양쪽에서 서로 연대해야 할 시민사회는 민족주의에 휩쓸려 단절되고 만다. 심지어 적대적 관계로 돌입할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 한국이 반일민족주의에 매달릴수록 아베 정권은 한국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 “틈만 나면 과거사를 들고 나오는 나라”로 몰아붙인다. 우리는 우리대로 “말로만 사과하는 나라”, “했던 사과도 번복하기를 반복하는 나라”로 일본을 규정한다. 영원한 적대다. 해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방위백서 따위로, 3년 간격으로 역사교과서 문제로 싸울 것이니 ‘분란의 정례화’라 할 것이다. 이 구도는 동북아시아에 ‘내셔널리즘 도미노 현상’ 같은 걸 빚는다. 지금은 한국이지만 중국이나 북한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권력이 불안하거나 아베처럼 무언가를 이루고 싶을 때 어김없이 민족주의를 동원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결과는 ‘동북아 신냉전 질서’의 고착화다. 남과 북은 각각 ‘한미일 / 북중러’ 대립 구도의 밑바닥을 차지할 것이고, 남북 평화는 요원해 질 수밖에 없다.

    일본 ‘알기’

    1. ‘전후’라는 이데올로기

    – 전후를 놓고 일본사회에 말이 많다. 미군정이 끝날 때까지, ‘경제백서’를 통해 “이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56년까지,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냉전 후 잃어버린 20년에다 급기야 3.11까지 겪으면서 “아직도 전후” 등. 봐서 느끼겠지만 일본에게 전후란 벗어나야 할 어떤 시기처럼 보인다. 그들이 애써 피하는 표현이지만 전후란 ‘패전 후’를 뜻하기 때문이다. ‘전후 / 탈 전후’라는 구별은 딱히 객관적 기준이 있어서라기보다 아베를 비롯한 (극우)보수 세력의 기어이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반영한 것이다. ‘전후’를 이데올로기화하고선 거기서 벗어나자는 거다. 그들에게 ‘탈 전후’는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의 내일이다.

    – 당신은 중산층입니까? 물었다. ‘그렇다’가 58년에 72.4%, 64년에 87%, 73년에 90.2%였다. 긴장한 미국의 강요로 85년 플라자합의가 이뤄졌다. 달러당 235엔(85년)이던 것이 1년 후에는 120엔까지 떨어진다. 급격한 엔고를 버티려고 금리 인하를 단행하고 버블경제가 시작된다. ‘1억 명 모두가 중산층’ 신화가 만들어졌다. 미국을 통째로 사들일 것처럼 덤비고, 나라 전부를 갈아엎기 시작한다. 그 끝은 아시는 대로 ‘버블붕괴’(92년부터)고 ‘잃어버린 20년’이다. 그 틈을 중국이 치고 들어서더니 2010년대 초반에는 젖혀버렸다. 한국도 바짝 추격했다. 이게 다 ‘전후(민주주의)’ 때문이라는 게 신보수우파의 진단이다.

    – 평화헌법으로 대표되는 전후민주주의 덕분에 고도성장을 구가해놓고선 왜 갑자기 거기 시비를 거는 걸까? 이유는 그 민주주의란 게 미국이라는 승전국이 가져다 준 외부요인이라는 것이다. 평화헌법과 쌍을 이루는 안보조약 역시 외부에서 온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에 의존해서 전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고 결국 미국 때문에 경제가 무너지게 됐다는 논리다. 그 바람에 일본 민족의 무구함이라는 공동성에 기반한 내향적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정체성의 회복이 과제로 떠오른다. 천황제 회복(“원수이자 상징”- 자민당 개헌 초안 제1조), 메이지 회귀, 전쟁할 수 있는 나라…

    – 금년에도 아베의 8.15 담화에 과거사 사죄는 없었다. 310만 전몰자를 추모하면서 그들이 죽인 아시아 2천만 명은 입 끝에도 올리지 않는다. 전몰자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작동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적의 가치관으로 전향해서 번영을 누렸다는 뉘우침이다. 이들 신보수우파는 왜 그들이 ‘전후’에 갇혀버렸는지를 모른다. 진정으로 전후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과거를 청산했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않은 탓이다. 원폭은 대량학살이었고, 전범재판은 승자에 대한 패자의 굴복이요 치욕이었다. 태평양전쟁은 대동아공영을 위한 성전이었고 아시아인들을 위한 해방전쟁이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무수한 죽음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전범들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된 사흘 뒤인 52년 5월 1일부터 범죄자가 아니게 된다. 사형수들은 형사가 아니라 공무사, 법무사(死)로 처리되고 유족 연금, 군인 연금을 받는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자기반성이 없는데 청산이 있겠으며 사죄가 있겠는가.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역사 교과서는 ‘자학사관’을 퍼뜨리는 독이다. 역사를 지우기로 한다.

    – 흔히들 독일과 일본을 비교한다. 차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독일은 모든 죄를 히틀러와 나치에게 덮어씌워버렸다. 거기 동조하고 유태인 착취와 학살에서 이익을 얻었던 거대한 국민 집단은 상대적으로 짐이 가벼워진다. 게다가 그들이 공격한 서유럽 5개국에 둘러싸였기도 해서 사죄 없이는 재건 자체가 힘들었다. 그들이 강제징용 배상을 21세기 들어서야 했던 것도 피해자들이 미국 법정으로 그 사건을 들고 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학살자들을 대신하여 사죄함으로써 털어낼 수가 있었다.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을 억울한 패배자, 실패한 영웅으로 본다. 천황도 살려냈다. 그러면 그 죄를 누구에게 물을 건가? 그들 모두가 패배자가 되기로, 용케 살아남은 자가 되어 경제 발전으로 ‘보은’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 외부의 틀에 의존하여 경제 발전을 이끌어온 보수본류들은 버블 붕괴를 겪으면서 신보수우파에게 밀려난다. 신보수 이데올로그들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가져온 상대성, 균형감각 결여, 개인화, 정체성 상실을 질타한다. 그 자리에 국가와 역사를 들이민다. 유구한 전통에 기반한 문화공동체, 그로써 숙명으로 주어지는 정체성, ‘일본인’이다.(장인성, <‘잃어버린 20년’과 보수의 미학>, ≪탈전후 일본의 사상과 감성≫, 박문사, 2017 참조.)

    1. 민주주의 전통 결핍

    결국 일본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가볍게 여김으로써 민중을 이해하기는커녕 간단히 무시해버렸고 그 덕에 국가의 경제 성장을 우선시할 수 있었다. …… 돌연 경제 성장이 멈춰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민음사, 2014, 306,7.)

    – 에도막부야 뭐 봉건제니까 그렇더라도, 메이지유신도 말만 근대화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립부터가 쿠데타 아니었던가! ‘국민’이 필요하니까 신분에서 풀어주었을 뿐 실상 그들은 ‘신민이었다. 헌법 첫머리부터 천황을 신격화하고 삼권분립 따위는 무시해버리는데 무슨 입헌군주제였겠는가. 시민권을 뭉개고 부국강병으로 치달았다. 잠시의 ‘자유민권운동’ 시절, 아주 잠깐의 다이쇼 민주주의 같은 흉내를 냈을 뿐, 저 역사에는 민주주의란 게 없었다. 저항이라 해도 쌀 파동 때 덤벼든 사건 한두 차례뿐이다. 군부는 언제라도 천황 권력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여차하면 그들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쿠데타 일으키고 그걸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여길 정도였다. 천황도 그렇게 봤고, 제 신하들이 죽어나가도 눈감아줬다. 그렇게 총동원체제로 들어섰다.

    – 패전 후는 민주주의인가? 전쟁 직후 세대(단카이)는 냉전기를 맞아 미국의 틀 안에서 안전하게 경제 성장만 추구한 세대다. 그를 떠받친 정치 체제가 곧 55년 체제다. 55년, 분열했던 사회당이 통합하자 재계는 강력하게 보수 정당의 통합을 촉구했고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쳐서 자민당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거의 40년 간 1.5당 체제, 즉 자민당 1.5 대 사회당 1 구도가 성립한다. 좌파가 겨우 개헌을 막아내는 구실로 축소되는 것이다. 4050세대는 ‘1억 모두 중산층’을 구가했던 세대다. 90년대를 거치면서 버블이 꺼지는 아픔을 맛본 세대이기도 하다. 물론 ‘하나만 판다’로 전문성을 갖추었고, 어마어마한 경쟁사회를 버텨낸 세대이기도 하다. 2030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다. 젊은이들 40%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내일이 없으니까 지금이 행복하다.

    – 좌파는? 60년 안보투쟁과 72년 적군파 자폭으로 몰락했다. 이케다 정권이 ‘소득 배가’를 중심에 놓고 ‘탈정치=경제’의 시대를 연출하자 대중은 환호하며 환영하였다. 좌파 운동은 대중에게서 괴리되고 그만큼 첨예화되고 몰락했다. 노동현장에도 노사협조 노선이 득세한다. 확대된 소득을 노동자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총평(노동조합총평의회)이 몰락하고 그에 기대던 사회당이 쇠퇴해간다. 국철과 우정국 민영화를 거치면서 노동운동은 거의 기업에 흡수되다시피 했다. 94년 사회당 무라야마 내각이 자민당과 연정하여 집권하는데, 바로 이때 자위대 합헌, 일장기(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공식 인정하고 비무장・중립 노선을 포기한다. 그리고 사회당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한다. 일본은 문화보수주의, 일본주의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 혁신 세력이 약화되고 국민의 견제도 없어진 지금 일본 정치는 주로 보수정당끼리 경쟁하는 구도다. 아베를 추종하는 젊은 정치인들은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있다. 그럴수록 정당 리더십이 강해지고 지도부, 특히 총리의 권한이 대폭 강화될 수밖에 없다. 4연임설이 슬슬 흘러나오는 중이기도 하다. 개헌을 밀어붙이기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의 적이다. 역사의식과 민주주의 전통이 희박하면서(이거야말로 우민화 아닌가!) 내일이 불안한 일본 대중에게 던질 미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한국이다. 일본이 지긋지긋해하는 역사문제를 다시 건드렸다고 널리 퍼뜨린다. 내셔널리즘만큼 가성비 좋은 무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타깃을 정하는 것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권력이 독점하고 있으니, 그래도 아무런 저항이 없으니 금상첨화다.

    – ‘萬世一系’, 천황은 자연처럼 영원하다. 가부장제에 입각한 국가질서의 재도입, 메이지 유신이 이루었던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말살이다. 주권재민의 근거인 사회계약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다. 국가와 개인의 대등한 합의는 없다. 신보수의 내셔널리즘이 달리려는 그곳, ‘아름다운 나라 일본’이다.

    강제징용 판결의 본질, 식민지배의 불법성인가 헌법 10조인가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시사인> 623호(2019.8.27.), 천관율, ‘우리는 왜 그와 함께 싸우나’를 꼭 읽어보기 바란다.)

    – 대법원에서 내린 배상의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이고 다른 하나는 ‘헌법 10조’다. 전자에 따르면 이번 사태는 민족주의로 가게 된다. 아베 정권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내부 결집용으로 아주 좋다. ‘국가 간 약속 위반’을 앞세우는 전형적인 패턴을 반복할 것이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

    – 중앙일보 권석천이 칼럼에서 말한 것처럼 이번 판결의 핵심이자 강력한 무기는 헌법 제10조(‘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다. ‘불가침의 기본 인권이 침해됐음을 확인해서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라면 마땅히 해야할 의무다!’, ‘너네 나라는 안 그러니?’ 당당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인권 보장은 과거사도 정치도 그 무엇도 건드릴 수 없는 원칙임을 우리뿐 아니라 일본인도 알아듣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요는 지금 문제의 본질은 역사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틀어쥐고 ‘경제전쟁’을 빌미로 개혁을 후퇴시키려는 정부여당과 재벌의 책동에 맞서야 한다. 민족주의를 앞세워 반민주・인권적인 본색을 은폐하는 아베 정권을 폭로하고 그에 맞서는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해야 한다.

    불매운동은 민족주의?

    – 운동을 시작부터 지금껏 끌고 온 데는 젊은이들의 활약이 아주 컸다. 무관심층 쯤으로 여겼던 이들이 왜 이렇게 폭발적인 관심을 가질까? 우리는 이미 박근혜 탄핵 집회 때 이들의 폭발력을 경험한 바 있다. 평소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다가 문득 터지는 힘 말이다. 여기에 앞서 인용한 책(≪절망의 나라의≫)의 저자가 말한 ‘moral economy’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던 가치관이나 규범의식이 침해당했을 때 터지는 것이다. 역사든 정치든 간에 왜 그걸 상관도 없는 경제로 보복하느냐는 거다.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깨뜨린 놈들이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하냐는 거다. 적반하장은 이럴 때 쓰라는 말이다. 이를 북돋운 계기도 몇 차례 있었다.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오히려 “나 때문에”라며 미안해하는 모습, 유니클로 임원의 깔보는 발언, 이어지는 산케이 전 서울지국장의 망언… 이 일련의 일들이 공유된 가치관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한국이든 일본이든 젊은이들은 꽤 큰 사회적 이슈라 해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일본 대지진 때는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젊은이들이 피해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한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이기심을 꾸짖던 어른들이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 에너지의 근원에는 사회에 무언가 기여하고 싶다는 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공공성’이라 한다면, 그것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거기 ‘친밀성’이 덧붙을 때 기꺼이 움직인다. 이번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파괴하는 부당함에 분노하면서 그것이 구체적이고 충분히 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면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 또 하나, 일본을 대하는 젊은이들의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한국인들은 일본을 ‘너무 크게’ 아니면 ‘너무 작게’ 본다. 이번만 해도 경제보복을 엄청나게 키우거나(기술력 차이가 50년 난다) 아주 가소롭게(이참에 국산화해서 일본 망해버리게) 보는 양 극단을 보인다. 언론들이 특히 심하다. 젊은이들은 일본을 한국과 ‘대등하게’ 본다. 꿀릴 게 없으니까. 그 대등성이 더 도발에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이런 몇 가지 까닭에서 지금 사태를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이더라도 동기나 방식은 그렇지 않다. 보편가치 파괴에 대한 분노가 본질이다. 진행 과정을 보면 사이트 ‘노노재팬’이 갈수록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엉뚱하게 피해 입는 사람이 없게 한다든가, 관공서에서 일제 필기구 모아서 버리는 것이나 서울 중구청장이 피켓을 거리에 내걸 때 항의하는 것, 일식집이더라도 한국인이 한국 재료로 만드는 데는 찾아가는 것, 노 재팬에서 노 아베로 진화하는 것 들은 민족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다.

    – ‘노 아베’가 맞다. 일본과 아베를 떼어놓음으로써 분노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예스로 다가갈 통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것이 소수일지라도 가능성을 차단할 일은 아니다. 초기에 우리 당 지도부에서도 ‘친일’ 비슷한 발언이 있었고, 어떤 정치인은 ‘토착왜구’ 같은 말까지 내뱉는다. 그런 흐름을 경계하고 꾸짖어야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제로 여기 접근하는 것이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다. 반복하지만 내셔널리즘이나 과거사에 이 문제를 가두지 말고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보편 가치 영역으로 끄집어내자. 그럴 때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와 그들이 속한 나라까지로 연대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GSOMIA 파기에 관하여

    – 이 쟁점은 ‘동북아 신냉전 분쇄’의 맥락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 이 협정 자체가 한미일 동맹을 전제로 한다. 그럴수록 북중러를 결속시켜서 남북을 각 진영의 수직계열화 맨 아래로 처박는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든 동북아공동체든 간에 수평적인 평화질서를 이루려면 반드시 벗어던져야할 굴레가 신냉전 질서다. 비단 이번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평화를 지향하는 진보정당으로서 마땅히 파기를 주장해야할 것이다.

    65년 체제 청산에 관하여

    –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연장선상에서 시작하여 14년 간 끌어오던 한일협정의 핵심 쟁점은 식민지배의 합법성 여부와 그에 따른 배보상 문제였다. 일본은 처음부터 한국과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의 요구에 밀려 할 수 없이 협상에 임했지만, 이번에는 강화조약의 연장선상에서 할 의사가 없다 했다. 식민지배 자체가 문제로 등장할 것이고, 배보상 문제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미국이 개입하여 강화조약의 연장선상에서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일본은 배상은 물론 보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배상은 식민지배를 불법으로 보는 것이고, 식민지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은데 일본인들에게 하지 않는 보상을 따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청구권’이라는 용어를 넣느냐 문제로 번졌다.

    – 김종필 중정부장과 오히라 외무대신이 총액 타결 방식에 합의를 봄으로써 협상이 마무리된다. 한국측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청구권’이라는 용어가 들어간다. 협정문에 대한 일본측 해석의 요지는 이렇다.

    “경제협력의 증진과 청구권 문제의 해결은 동일한 협정의 내용이 되어 있으나 …… 양자 간에는 아무런 법률적인 상호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명문화된 협정의 내용을 말하면 제1조에 규정한 5억 불의 자금 공여는 한국 측이 말하는 것과 같은 한국의 대일청구에 대한 채무 지불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인 바, …… 어디까지나 경제협력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공여와 병행해서 재산 및 청구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양국 간에 어떠한 문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제2조의 취지이다.”(장박진, <일본 정부의 한일회담 인식과 교섭 대응>, ≪한일협정 50년사의 재조명Ⅳ≫, 동북아역사재단, 92쪽.)

    경제협력으로 제공할 자금이 법률적으로 청구권과 무관하다 해놓고는 ‘병행’해서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불가사의한 해석이다. 그 바람에 피해자들은 사과도 배보상도 받지 못한 채 법적으로 아무 상관없는 경제협력 자금에 휩쓸리는 처지가 돼버렸다.

    – 지금 와서 두 국가가 취하는 태도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기어이 ‘청구권을 넣자’고 한 한국은 개인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고, 필사적으로 ‘청구권과 무관하다’고 우겼던 일본은 이것을 유일한 청구권협정이었던 것인 양하고 있다.

    – 이런 문제들을 들어 ‘신한일협정’을 맺자고 정의당은 주장한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50년도 넘은 협정을 지금 와서 건드리는 것도 그렇지만, 또다시 식민지배의 합법성 여부로 공방을 벌이는 것은 낭비다. 평행선을 그을 것은 불 보듯 빤하지 않은가. 따라서 이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합법이냐 불법이냐 하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로 싸우기보다 ‘한국은 불법, 일본은 합법으로 본다’는 인식의 차이에 합의를 보자는 말이다. 65년과 다른 것은, 그때는 서로의 차이를 봉합해서 제각각 딴 해석으로 자기 국민을 기만했지만 지금은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그 사실을 양 국민들이 정확히 알게 한다는 점이다. 지금 해소할 수 없는 차이라면 미래 후손들에게 과제로 넘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결론

    1. 강제징용 판결의 본질은 과거사 청산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파괴를 막고,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를 보장하는 것이다.

    2. 지금 사태의 진단과 대안을 민족주의에서 찾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한일 양국에 수직적 위계질서를 만들어 개혁을 후퇴시키고 경제민주화를 가로막는다.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를 단절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동북아에 민족주의 도미노 현상을 불러서 신냉전 질서를 고착시킬 것이다.

    3.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의 인식 차이는 당분간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연장선상에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타협을 하자. 역사 인식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보편적 가치, 인권, 민주주의’라는 더 강력한 무기가 있다.

    4. 이상에 동의한다면, 강제징용 피해 배상을 한국이 한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고 본다. 패배가 아니라 문제를 일단락 짓고 더 큰 싸움을 벌이기 위함이고 일본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시민사회와 연대하기 위함이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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