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규제가 소재 국산화 걸림돌?
“일본 수출규제 업고 기업 이익 추구”
환경·시민사회단체, 화평법·화관법 개정 추진 비판
    2019년 08월 20일 04: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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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대책으로 기업의 유해 화학물질 생산과 수입·유통 등에 관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을 둘러싸고 환경·시민사회단체 등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환경회의, 화학물질감시네트워크는 20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화학물질 관련법 완화는 안전시계를 거꾸로 돌려 우리 사회를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전으로 되돌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환경시민단체의 화평법 화관법 개정 반대 회견(사진=유하라)

우리는 또, 화학물질 참사를 겪어야 하나

일본이 반도체 관련 3개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한 후, 국내 기업들은 소재 국산화를 위해 화학물질 평가·등록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개정을 요구했다. 화학물질 규제 때문에 핵심소재의 국산화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화평법은 기업들이 화학물질이 함유된 제품의 유해성에 관한 심사·평가를 받고, 화학물질 정보를 생산·활용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화관법 또한 화학물질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유해화학물질의 취급 기준을 강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화학물질 관련 규제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후 참사 유해 정보 없이 유통되는 화학물질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로 만들어진 법이다. 기업의 안일한 화학물질 관리와 정부의 허술한 관리·감독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정부가 인정한 결과였다.

당시 가습기 살균제 가해 기업들은 원료 화학 물질에 호흡기 유해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알리지 않은 채 제품을 생산·판매했고, 그 결과 이 제품을 사용한 14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피해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환경·시민사회단체들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가족을 잃었고, 그 피해의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확한 피해의 정도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피해 보상마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화학물질과 화학제품으로 인한 사회적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기업은 오히려 화학물질 관련 규제를 완화해 화학물질 정보 생산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안전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는 소비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 모두가 피해자다. 최근 삼성 SDI에서 반도체용 감광액 개발 업무를 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연구원 노동자나 구미 불산 누출사고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는 화학물질 규제 완화로 이득을 보는 쪽은 화학물질을 다뤄 이윤을 내는 기업뿐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화학물질 규제가 소재 국산화 걸림돌?
“일본 수출규제 업고 사회적 책임 무시…이익 챙기려는 기업 전략”

환경·시민사회단체들은 화평법과 화관법이 국내 소재산업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기업들의 주장은 “근거 없는 억측”이라며 “일본의 수출규제를 뒤에 업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마저 무시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기업의 고도화된 전략”이라고 반박했다. 소재의 수입이 보다 경제적이라는 기업의 판단이 깔려 있었을 뿐, 화학물질 규제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이 단체들은 “일본의 수출 규제와 반도체 산업의 간의 연결 고리는 강화된 환경규제가 아니라 산업 구조에 있다”며 “고순도 불화수소는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필수 소재임에도 생산 기술이 아니라 생산 비용과 판매 비용의 문제로 외면 받았다. 국내 생산보다 수입이 더 경제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순도 불화수소 등 온전한 소재 국산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은 “한국은 자원 부족 국가로 결국 필요 소재를 또 다시 수입할 수밖에 없다. 결국 또 다른 수입 의존도를 높이는 상황이 될 것”이라며 “국가 간 분업과 협업이 기반이 되는 글로벌화된 산업 구조에서 소재 수입과 완제품 수출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여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선택의 과정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소재 국산화의 대책으로 화학물질 규제 완화라는 재계의 요구를 수용한 정부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이 단체들은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는 정치·외교적 문제로 시작해, 그 해결도 결국 외교적 차원에서 풀어낼 수밖에 없다”며 “긴급한 원료 확보의 문제는 행정 절차 기간의 축소와 한시적인 수입 완화 조치를 통해 해결하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요구처럼 환경규제 완화를 근본적 대안으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진단을 통해 엉뚱한 처방전을 휘둘러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내 화학물질 규제, 강력하지 않다

환경단체 등에 따르면, 국내 화학물질 규제는 선진국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일례로 미국은 화학물질 신고·평가에 관한 규정은 느슨하지만 사후 관리에서는 화학물질 관리와 제품 생산이 기업의 존폐를 좌우할 정도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통해 기업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부 업계에서 화평법이 유럽연합의 규제보다 강하다고 주장엔 환경부까지 나서서 “화평법은 EU(유럽연합)의 화학물질 규제보다 강하지 않다”, “화평법이 한일 기술 격차의 원인이라는 것은 억지 주장”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환경단체 등도 유럽과 비교하면 정책 후발주자인 한국은 등록 정보의 질에서도 차이가 날 뿐 아니라, 고형 제품에 대한 관리가 빠지면서 반쪽자리 관리 규제라고 비판했다.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화평법과 화관법은 굉장히 유연한 법률이다. 기업들도 지킬만한 하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전했다. 김 부소장은 “화관법은 기업의 인력 중 정부 교육을 이수하면 화학물질 안전 담당자로 승인받을 수 있고, 화평법은 이마저도 명시하지 않았다”며 “회계·영업·구매담당자가 있듯이 화학물질 관련 담당자를 둬서 관리해야 하지만 현행법은 당장 담당자 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소비자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담당자를 만들어보자고 기업에 따뜻한 말 걸기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사무총장은 “화평법과 화관법을 강화해서 기술개발이 안 된다는 것은 축구 경기에서 오프사이드 룰 때문에 골을 못 넣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며 “전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이 따르고 있는 기본적인 안전관리 규정까지 어기면서 발전하는 기술 경쟁력이 어디에서 통용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필자소개
유하라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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