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제문과 100년 전 부부의 사랑
[역사의 한 페이지] 어느 아내의 슬픈 사부곡(思夫曲)
    2019년 08월 19일 10: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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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아버지에게

당신은 늘 날더러 이르기를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이 먼저 가셨습니까? 나하고 자식은 누구에게 의지하여,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셨습니까? 당신이 나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며 나는 당신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둘이 한자리에 누워서 늘 제가 당신에게 이르기를 ‘이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 같을까요?’라고 하며 당신에게 속삭이고는 하였지요. 어찌 이런 일들을 생각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고 멀리 가십니까?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래도 난 살수가 없어서 빨리 당신에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가십시오…….

1586년 남편 이응태를 사별한 아내(‘원이 엄마’)가 애끊는 슬픔을 담아 쓴 한글 편지의 일부 이다. 편지는 1998년 안동에서 이응태의 무덤 이장 중 다른 유품들과 함께 관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남편 이응태의 시신 가슴팍에 올려져 있었다.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요절한 남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빽빽하게 쓴 원이 엄마의 이 한글 편지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편지 중간 중간에 남겨진 눈물 자국도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현재 안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430여 년 전의 이 한글편지는 죽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슬픔과 그리움을 표현한 글로서는 우리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작품일 것이다. 이 편지는 [National Geographic] 등 외국의 유명한 잡지에도 소개되어 우리나라를 너머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왼쪽은 ‘Locks of Love’란 제목으로 원이 엄마의 편지를 소개한 [National Geographic] 2007년 11월호이다. 여기서는 편지 사진은 따로 실리지 않았지만 편지와 함께 발견된 미투리가 더 중요하게 소개되었다. 이 미투리는 남편이 건강하게 낫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원이 엄마가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오른쪽은 [Archaeology Magagine] 2010년 3/4월호에 ‘Korean Love Affair’라는 제목으로 실린 원이 엄마의 사연이다. 제목 위에 실린 사진이 원이 엄마가 남긴 한글 편지이다. (‘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hology’ 블로그 사진)

아내 황씨가 남편을 기리며 쓴 한글 제문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한다.

그들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할 것’을 서약한다. 그들은 부부의 사랑이 영원할 것을 믿는다. 자식도 낳고 알콩달콩 가정을 이루어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세상의 거친 파도를 막아준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하고 사랑할지라도 죽는 시간을 같이 맞출 수는 없는 법!

누군가는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다. 홀로 남은 이는 이 현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늘이 무너진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님이 떠난 빈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커져간다. 홀로 남겨진 남편 혹은 아내는 먼저 간 배우자가 원망스럽고 그리울 것이다. 때로는 그 그리움이 사무쳐 전전반측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붓을 들어 원망과 그리움을 토해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배우자에 대한 제문(祭文)이 쓰여 진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배우자에 대한 제문은 남편이 죽은 아내를 위해 쓴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남성들이 오랫동안 문자를 독점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아내에 대한 남편의 그리움과 생전의 미안함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내의 남편에 대한 그리움도 그 못지않았을 터인데,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대략 난감이다. 원이 엄마의 편지와 같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는 제문은 남아 있기는 한 것인가?

수 년 전 어느 집안의 한글 제문 몇 점을 수집하였다. 수집한 한글 제문은 어느 여인이 자신의 친정 부모, 시부모에 대해 쓴 제문들이었는데, 그 속에 죽은 남편에 대한 제문도 한 장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작성된 보통의 제문들은 한문으로 되어있고 주로 남성들이 쓴 것인데 비해, 한글 제문은 대부분이 여성들이 쓴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한글로 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한글은 조선시대 언문이나 암클로도 불렸다. 여성이 한글로 제문을 쓰는 특이한 풍습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었고, 주로 경상도 그것도 안동이나 예천 중심의 경상북도 지역의 양반가에서 있었다. 일종의 규방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이러한 제문들은 대체로 18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20세기까지 쓰여 졌다. 이러한 한글 제문을 통해 우리는 이 지역 양반가 여성들의 애절한 삶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필자가 수집한 한글 제문은 긴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있는데 세로 30cm, 가로 2m 60cm의 규격인데, 세로로 14∼18자로 한 줄을 채워 총 85행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갔다. 이 제문은 사투리를 포함하여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흘려 썼기에 중간중간 해독이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뜻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목은 한글로 ‘제문’으로 되어 있다. 제문은 어떤 이가 죽었을 때 그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아 쓴 글을 말한다. 천지신명에게 축원을 드리는 글인 ‘축문’(祝文)과는 보통 구별해 쓰는 표현이다.

[사진] 사별한 남편 구씨가 떠난 지 100일을 맞이하여 아내 황씨가 쓴 한글 제문이다. 세로 30cm, 가로 2m 60cm이다. 왼쪽의 펜들을 보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박건호 소장)

이 제문은 ‘임술년 3월’에 죽은 남편 ‘창원 구씨’의 백일을 맞이하여 그 해 6월에 아내가 쓴 것이다. 종이 재질이나 표현들을 감안해보면 이 임술년은 서기로 1922년으로 추정된다. 제문 내용 중 자식 교육을 언급하면서 ‘소학 대학을 시켜내어’라는 대목으로 보아 임술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1862년 임술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과거제도가 폐지된 것이 1894년이므로 자식들에게 소학(小學) 대학(大學)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그 이전의 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이 단순히 관용적인 표현일 수도 있으니 쉽게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부부가 살았던 지역에 대한 정보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으나 이런 제문이 주로 쓰였던 지역이 경상도, 특히 경상북도 지역이므로 그 곳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이 글을 쓴 여인이 경상도 출신으로 타지로 시집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지역에 시집가서 살았더라도 경상도 지역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이런 제문을 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료를 수집할 때는 출처 정보가 중요한 것이다. 이 한글 편지가 어느 지역 어느 집안에서 나온 것이 명확하다면, 이런 식의 추측은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쓰인 말투가 경상도 사투리가 곳곳에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경상도 출신의 여인이 쓴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제문의 앞부분부터 살펴보자.

유세차 임술 6월 을사색 임자 초 팔일 병인즉
우리 가군님 창원 구공(公) 백일지일이라.
이실인가숙 창원 황공은 가군님 은공을 못 갚아 두어줄 상서로다.

글을 쓴 아내의 성씨는 ‘황씨’이다. 아내는 남편을 ‘가군’(家君)이라고 깍듯이 높여 부르고 있다. 가군은 ‘집안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이전에 여인들이 가장인 남편을 부를 때 흔히 썼던 표현으로 가부장적 가족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 제문에서는 남편의 호칭으로 대부분은 가군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가끔은 ‘이 양반’, ‘낭군님’, ‘영감’이라는 표현도 섞어 쓰고 있다.

앞머리 셋째 줄에 나오는 ‘이실인가숙 창원 황공’은 해석이 쉽지 않다. 아마도 ‘이 실(室;집)의 가속(家屬)인 창원 황공’이라는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은 가군의 밑에 속해있는 존재들이라 가속으로 불렸으니 가군과 가속은 서로 호응하는 단어인 셈이다.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는 ‘창원 황공’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보통 딸들이 친정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한 제문을 쓸 때면 ‘김실이가…’ ‘이실이가…’ 이런 식으로 쓰는데, 아내 황씨가 남편 구씨를 위한 제문을 쓰면서 자기 본명을 쓰는 것도 어색하고, ‘구실(具室)’이라고 쓰기에도 남편에게는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호칭을 고민하던 부인 황씨는 주로 남성들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창원 황공’이라는 어색한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표현을 통해서 이 글을 쓴 여인이 창원 본관을 가진 황씨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앞머리에 이어지는 다음 부분으로 나가보자. 아내는 자신을 두고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부터 시작한다. 수십 년 같이 산 남편의 죽음은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사진] 황씨의 한글 제문의 앞 부분이다. 오른쪽 첫째 줄 가운데 부분에 ‘오호 통재 가군님아’로 시작하는 글귀를 확인할 수 있다.

오호 통재 가군님아
원통하고 가련한 이 양반아.
어찌 그리 바뿌던고.
말 한마디 안 전하고 야속키도 무정하고
무슨 길이 그리 바빠 그리 바삐 떠나셨소.
80 장명(長命) 하실 줄을 태산같이 믿었건만 60도 못 채우고 그리 바삐 가시었소.
생전에 하는 말이 아버지 어머니 수하에서 내림으로 80 장명 살 거라고
자만하고 맹세하더니만 자기 명도 모르고서 그리 그럼 자랑을 하옵던가.
임술년이 액년인가 삼월달이 액달인가 가운이 불길턴가 귀신이 미웠든가
황천도 무심하고 귀신도 야속하지
아침나절 성턴 몸이 저녁나절 황천객이 된단 말이 웬일인고.
그리 바삐 떠날 줄을 어느 누가 알았을고. 내사 정말 몰랐구나.
꿈인가 생시인가 분별을 못차렸나. 정신을 못차려서 가군님을 잃었는지.

남편은 60세가 되기 전에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로서는 요절했다고 볼 수는 없는 나이지만, 이 여인에게는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나절 성턴 몸이 저녁나절 황천객이 된단 말이 웬일인고”라는 말을 통해 남편이 지병이 있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심장마비나 뇌출혈 같은 이유로 급작스럽게 죽은 것으로 보인다. 준비 없이 황망하게 죽은 터라 아내의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이어서 아내는 남편이 며칠만 더 살았더라면 어떻게 약이라도 써보고, 무당을 불러 굿이라도 해 보았을 텐데 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남편 죽은 것이 자기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다.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순정을 드러내고 있다.

오호 통재 가군님아
무당봉사 데려다가 경문이나 읽었으면 굿덕이나 보았을런가.
애고 애고 답답하고 서러워라.
2∼3일만 더 살았으면 동서남북 다 댕기면서 이약 저약 구하여서
구완이나 하였으면 효력을 보지 않았을까.
애고 애고 원통해라.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자신을 자책하던 아내는 자식들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린다. 이제 남편 없이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하는 그 현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막막함은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표출된다. 제문에 따르면 황씨는 남편과 전부 5남매를 두었는데, 둘은 다 키웠고, 나머지 셋은 아직 미성년자로 추정된다. 큰 아들은 경주 이씨 집안과 혼인했고, 둘째 딸아이 호점이는 혼기를 놓쳐 아직 결혼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얼른 다 이름을 부르고 떠나려고 막내 호숙이 이름을 그렇게도 불렀던가”라고 회고하는 대목을 통해 죽은 남편은 막내 딸 호숙이를 유난히 귀여워했음도 알 수 있다. 다섯 중 나머지 두 명의 자식은 제문에 언급이 없다.

5남매를 탄생하여 호의호식 길러낼 제 괴로움도 모르시고
장명을 보존하와 만재미를 누리면서 소학 대학 시켜 내여
좋은 가문 가려내어 성취를 시키려고 태산같이 믿었던만
겨우 남매 성취시켜놓고 삼남매는 누구한데 다 밀어놓고
그리 바삐 떠나셨소. 애고 애고 답답하오.
장남은 경주 이씨 가문 출가하야 자부(며느리)는 보았으나
사랑도 못 때우고 어찌 그리 바쁘든고.
둘째 저 여식 호점이는 과년한 저 여식을 누구한테 다 밀어놓고
사위도 아니 보고 걱정없이 떠나갔소. 애고 애고 답답해라.
사랑하는 막냉이는 어찌 잊고 가시었소. 들면 날면 부르면서
호숙 갖고 부른 소리 어찌 그리 불렀던고.
얼른 다 부르고 떠나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불렸던가.
그리 바삐 떠날 줄을 알았으면 군담이나 않았으면 여한이나 없을 것을.
백세 해로하오려고 짓천 곳천하였더니
가슴에 못이지고 애고 애고 서러워라.
오호 통재

[사진] 죽은 남편을 위해 쓴 제문에서 부인 황씨는 ‘가군(家君)’이라는 극존칭을 쓰다가도 때로는 ‘이 양반’, ‘우리 낭군님’, ‘우리 영감’ 등 자신의 감정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호칭으로 남편을 부르며 그리움과 원망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주야장천 기다려도 소식 흔적 돈절하고

아내는 이렇게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에 남편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나 돌아올 수 없다는 절망감과 남편 떠난 후의 외로움, 홀로 산중에 누워있을 남편에 대한 걱정을 글로 담아낸다. 오늘이면 소식이 올까 내일이면 살아 돌아올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은 없다. 밤이 적막하다. 밤바람이 문풍지를 때리고 지나가도 그것이 남편이 오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수 십 년 같이 살았던 사람의 흔적이 그렇게 쉽게 지워지겠는가. “논에 가나 밭에 가나 당신 누운 자리 만날 쳐다보고 군담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라는 대목에서 아내에게 남겨진 깊은 외로움과 슬픔이 전해진다. 남편이 누워있는 산소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대화를 나누었을 아내 황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그럭저럭 버텼지만, 내일은 어떻게 또 버틴단 말인가. 자신이 없다. 아내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속마음을 토해낸다.

“어이할고 내일이야”

가군님아.
형용은 눈에 삼삼, 성음은 귀에 쟁쟁
오늘이나 소식 올까 내일이나 흔적 올까.
주야장천 기다려도 소식 흔적 돈절하고
어언간 백일이 당도토록 소식이 끊어져버려 영영이별이 되었는가.
어이할고 내일이야.
오호통재라 오호 애재라.
송풍을 울(鬱)을 삼고 잔디 옷을 입고
두견새 벗을 삼고 첩첩한 산중에 홀로 누워 자탄하는 이 양반아.
그 심회가 얼마나 외로우리오.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논에 가나 밭에 가나 당신 누운 자리 만날 쳐다보고
군담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동방에 부는 바람 가군님의 한숨인가.
서방에 오는 비는 가군님의 눈물인가
눈물모아 물이 되여 황해가 넘치는 듯
한을 모아 뫼가 되어 태산고액이 정지갔소.
달 떨어진 대숫불에 헬헬이도 다니는 듯
오호 통재 이 양반아
만산에 초목들은 서리단풍 잦아져도 명춘이면 도생하고
산천에 비조성(飛鳥聲)도 갔다가도 돌아오고
달이라도 그믐달은 초승이면 돌아오고
새라도 연자새는 춘삼월에 돌아온다.
우리 낭군 영감님 가신 곳은 노소간 한번 가면 다시 올 줄 모르는고
허무하고 허무하네.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아시나요. 모르나요.

아내의 넋두리는 어느덧 막바지다.

아내는 이쯤에서 슬픔 감정을 추스르고 남편에게 말한다. 저승에 가서 친부모, 처부모 상봉해서 그동안 나누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회포를 풀라고. 그런데 특이한 것은 보통의 한글 제문에서는 거기에 가 있으면 나도 곧 따라 갈 테니 기다리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좋은 가문의 좋은 배필을 만나서 백년해로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왜였을까?

자신이 남편에게 제대로 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아니면 이승의 인연을 굳이 내생에서까지 잇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 말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구천에 들어가서 친부모와 처부모와 처남들과
동서들과 모두 상봉 다 하였소?
이질 만건이도 만났소?
모두 상봉하야 그 정만단설화를 다하시고
이승에 맺힌 한을 저승 가서 헐헐이 다 푸시고
좋은 가문 가려서 좋은 배필 구하여서
화목하게 백년해로 누리소서.

[사진] 황씨의 제문 후반부의 일부이다. 아내는 잘해주지 못한 자신이 미안했던지 “좋은 가문 가려서 좋은 배필 구하여서 화목하게 백년해로 누리소서.”(줄친 부분)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제 제문은 남편에게 하는 부탁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남편이 남아있는 자식들에게 복을 주고, 우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이다. 이런 류의 제문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끝난다. 죽은 사람은 이왕지사 죽었지만 이승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잘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남아있는 유족들이 큰 우환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아내는 남편에게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끝부분이다.

오호 통재 가군님아.
당신의 못다 산 명(命) 자녀들께 전하여서
팔십 장명하옵기로 빌어주고
아들이나 여식이나 분별없이
동서남북 다 다녀도 해재(害災)없고
재수있길 빌어주기 소원이고
이승전 삼남매는 좋은 배필 구해주고
친손이나 외손이나 흥손하고 수명장수 빌어주기 소원 성취 비나이다.
오늘밤 촛불 앞에 어찌 다 고하리오.
어간이 막막하고 애통이 앞서거늘 대강 고하나이다.
오늘밤 호소하고 나면 어느 곳에 호소할고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상향(尙饗)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죽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애절한 사부곡 한편을 살펴보았다. 100년 전 한 여인의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그리고 사랑의 절절한 마음이 녹아있는 글이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표현한 글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한글 제문들은 우리 문학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이렇게 아내의 남편에 대한 사부곡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를 장식하는 것이 이러한 사부곡이라는 사실이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임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속으로 들어가셨네.
원통해라, 물속에 빠져 죽은 임.
아아, 저 임을 언제 다시 만날꼬.

공무도하가로 더 잘 알려진 [공후인]이다. 이 노래는 중국 진(晋)나라 때 최표(崔豹)가 쓴 《고금주》(古今注)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이 노래에 대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고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새벽 일찍이 일어나 나루터에 가서 배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머리가 새하얗게 센 미치광이 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병을 끼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늙은 광부(狂夫)의 아내가 쫓아오면서 남편을 부르며 말렸으나 그 늙은이는 깊은 물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기어코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때 그 아내는 들고 오던 공후를 끌어 잡아 타면서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랫소리는 말할 수 없이 구슬펐다. 노래를 마치자 그 아내 또한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고 말았다. 곽리자고는 집에 돌아와 아내인 여옥에게 자기가 본 사실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 노래의 사설과 소리를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여옥은 눈물을 흘리며, 공후를 끌어안고 그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물을 금할 수 없고 울음을 터뜨리고는 했는데, 여옥은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 여용(麗容)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고, 또한 노래 이름을 〈공후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 문학은 죽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절절한 슬픔을 표현한 [공부도하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이 작품은 기념비적인 작품인 셈이다. 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와같은 애절한 사부곡은 시간을 징검다리 삼아 띄엄띄엄 남겨져 각각 한 시대를 대변해주고 있다. 수 천 년 전 고조선 백수광부의 처와 그 가슴 아픈 사연을 애절하게 표현한 여옥, 430 여 년 전 남편 무덤 속에 편지를 써 넣었던 원이 엄마, 1920년대 남편 구씨를 먼저 보내고 제문을 지었던 황씨……..그들 모두 시간으로야 다 제각각 멀리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야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한결같이 절절하고도 애절하다.

그래서 그들의 사연과 글은 모두 다 아프고 모두 다 슬프다.

[사진] 2014년 개봉된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포스터이다. 진모영 감독 작품이다. 진 감독은 70 평생을 같이 살다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의 심정을 고대 시가 [공무도하가]에 빗대 제목으로 달았다.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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