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석유가 지배한다,
    석유가 결정한 세계 정치·경제 장면들
    [책소개]『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최지웅(지은이)/ 부키)
        2019년 08월 17일 08: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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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정치와 세계경제를 새롭게 보는 석유의 현대사

    석유는 현대인의 필수품이다. 그러나 석유의 중요성은 단순히 에너지나 원료로서 쓸모가 있다는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 세계의 욕망이 집중되는 이해관계의 근원적 요소이기 때문에 현대사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1차 세계대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의 기본 구조와 국제 정치의 양상을 결정했을 뿐 아니라 9.11, 세계화, 이라크 전쟁, 금융 위기, 양적 완화와 초저금리 기조, 이란 제재 등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전쟁과 테러, 정치적?경제적 사건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렇게 석유가 현대사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던 역사 속 장면 33가지를 골라 친절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세계 최강국 미국의 패권 전략은 무엇이었는지, 석유 생산 및 유통 기술의 발전이 어떻게 지정학적 중요성을 바꿔 놓는지,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알게 된다. 더불어 현대사에서 이해되지 않고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상식들을 엮어 주고 막연히 알고 있던 문제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 준다. 그리고 셰일 혁명으로 다시 한 번 세계정세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우리가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도 제시한다.

    현대사를 한눈에 이해하는 힘, 석유

    279만 3000배럴. 2016년 기준 한국에서 하루 평균 소비된 석유의 양이다. ‘석유’하면 보통 휘발유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에 이 많은 소비량의 상당 부분이 운송 수단의 연료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운송에 사용된 석유는 32.6퍼센트 정도이고, 절반이 넘는 52.8퍼센트는 플라스틱, 고무, 화학섬유 등을 만드는 석유화학 산업에서 쓰인다. 석유 공급이 중단되면 운송은 물론이고 소비재의 상당 부분이 생산을 멈출 것이기 때문에 석유가 현대인의 경제 행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석유의 중요성은 개인의 경제적 삶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4차례의 중동 전쟁, 진주만 공습, 9.11 테러, 걸프전과 이라크전 등 현대사의 수많은 전쟁과 테러가 석유 때문에 벌어졌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이었던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하여 유럽연합을 설립하고, 1970년대 이란이 친미 국가에서 반미 국가로 돌아서고, 1973년에 서유럽, 한국, 일본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국을 비판하며 친아랍 성명을 내고, 1980년대 미국이 세계화와 금융화를 추진하고, 2003년 블레어가 ‘부시의 푸들’이라 불리면서까지 미국의 이라크전을 도왔던 배경에도 석유가 있었다.

    이렇듯 석유가 단순한 연료나 원료 정도가 아니라 국제정치와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동인이었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는 현대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로 석유를 꼽는다. 현대사에서 석유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고, 석유의 변화가 세계의 변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렵거나 접하기 힘든 탓인지 석유의 역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가 석유가 정치, 경제, 외교 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33가지만 뽑아 정리한 것도 그래서다. 이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1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현대사에서 이해가 되지 않고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지식이 꿰어지고, 익히 알고 있었던 문제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원수지간이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어떻게 화해했을까?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정치경제 연합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식민지 통치 경험에 비롯된 역사적인 문제들이 무역 분쟁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그만큼 침략과 수탈의 상처는 힘이 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2차 세계대전으로 원수가 되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함께 유럽연합 설립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 석유가 어떻게 국가 간의 외교에 영향을 미치는지가 드러난다. 유럽연합의 시작은 놀랍게도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6년 당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스완댐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한다. 당시 매일 130만 배럴의 석유가 매일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는데 이는 유럽 수요의 절반 이상이었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바라만 보기에는 그 가치가 너무 컸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갈등 관계에 있던 이스라엘까지 끌어들여 이집트를 침공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한다. 이를 수에즈 위기, 또는 2차 중동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과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 행위에 반발하며 수에즈에서 철수하라고 압박한다. 특히 소련은 “런던과 파리에 핵 공격을 할 수 있다”며 강력하게 위협한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서지 않으면서 세계 정세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자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수에즈에서 군사 대응을 한 사람들은 석유 문제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며 중동비상대책위원회의 활동 중지를 선포한다.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점령당하기 직전 바위와 시멘트를 가득 실은 선박을 침몰시켜서 막아 버린다. 당시 기술로는 인양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는 거대한 장애물이었기에 중동산 석유가 유럽으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동비상위원회는 서유럽 우방국들에 석유를 공급할 계획을 세우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기에 중동비상대책위원회의 활동 중지하겠다는 말은 에너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유럽에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이 협박에 못이긴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철수한다. 국제 정치에서 석유 제재가 얼마나 강력한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영국 재무 장관 헤럴드 맥밀런은 “석유 제재 그것이 모든 것을 끝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수에즈 위기 이후로 프랑스는 자신이 미국과 소련과 같은 반열의 강대국이 아님을 인식하고 새로운 외교 전략을 수립한다. 독일과의 화해를 추진하여 1963년 독불 화해 협력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조약이 훗날 유럽연합의 출발점이 된다.

    사우디가 미국 달러를 지켜주었다?

    우리는 왜 국제 거래를 할 때 미국 달러를 사용할까? 그 기원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범이다. 1944년 브레튼우즈라는 미국의 소도시에 44개국의 대표가 모여 전후의 통화 질서와 금융 제도를 논의하는데, 여기서 달러를 국제 통화로 하되 그 가치를 금에 고정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세계 최대의 금 보유국이었던 미국은 금 1온스의 가치를 35달러로 정하고 이 비율로 달러와 금을 교환해주겠다는 ‘금 태환’을 약속한다. 바로 이 금 본위제를 통해 달러는 국제 통화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금 본위제가 무너진 지금도 달러가 국제 통화로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금 태환은 심리적 장치에 가까웠고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힘이 달러의 가치를 유지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손쉽게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달러 체제’가 위기에 처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시에 실제로 달러 체제가 무너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미국은 크게 위기감을 느꼈다. 바로 1971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금 태환 포기를 선언하며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을 고했던 ‘닉슨 쇼크’ 순간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서유럽 경제 복구를 위한 마셜 플랜과 베트남전 수행에 막대한 달러를 지출했고, 서유럽과 일본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쌓고 있었다. 달러의 금 태환 가능성에 의문을 품은 프랑스, 스페인 등이 금 태환을 연이어 요청하자 결국 닉슨은 금 태환 포기를 선언한다. 금 태환 포기는 계획적이었다기보다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조치였기에, 경제 규모를 키운 서유럽과 일본이 달러의 사용을 줄인다면 달러가 국제 통화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달러를 구하는 흑기사가 등장했으니,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1973년 닉슨은 석유의 결제 통화로 달러를 써줄 것을 사우디에 부탁한다. 1974년 미국 재무 장관 윌리엄 사이먼은 사우디로 날아가 파이살 국왕에게 석유 판매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국채를 대거 매입해 달라고 요청한다. 사우디는 이 요구들을 모두 받아들였고 더 나아가 OPEC의 다른 회원국들도 석유 결제 통화를 달러로 통일하도록 유도한다. 이를 통해 미국은 국제 수지 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달러는 기축 통화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석유는 금보다 거래량이 많은 보편적 가치가 있는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달러 체제는 사우디의 도움을 받아 유지되었고, 그 위에 세워져 있는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은 석유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셈이다.

    9.11 테러는 ‘문명의 충돌’이 아니었다

    2001년 9월 11일, 두 대의 여객기가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충돌하는 장면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미국인이건 아니건 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당시에 이미 출간된 지 5년이 넘었던 책 한 권이 다시금 주목받았다. 바로 1996년에 출간되었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다. 9.11 테러를 서구 문명이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로 보급되어 이슬람 문명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비극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9.11 테러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서방에서 나고 자랐거나 유학한 무슬림 학생들이었다. 그런 이들조차 모든 것을 내던지고 테러에 참가하도록 이끌었던 분노는 한 국가에 국한되기보다는 중동 지역 이슬람교도들 전반에 퍼져 있는 종교적 분노에 가까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9.11 테러에서 나타난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을 종교나 문화의 차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문명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나 테러를 일으킬 만큼의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중동 지역 이슬람교도들의 강력한 반서구 정서의 근원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근본적인 출발점은 팔레스타인 문제였고, 그 이후로 진행된 석유로 인한 갈등과 분쟁, 부패와 빈곤” 때문이었다.

    영국은 이란으로 진출해 석유 회사를 세우고 그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가져갔고, 밸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주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이란의 무함마드 모사데크는 영국이 세웠던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를 국유화하겠다는 공약을 걸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미국과 영국의 ‘아작스 작전’으로 축출된다. 이후 권력을 쥔 팔레비 왕가는 석유 수익을 기반으로 급속한 산업화와 서구화를 추진하지만 그 과정에서 양극화가 심해져 거대한 사회적 불만을 낳는다. 이는 결국 정권의 전복으로 이어져 서구화에 대한 반동으로 강한 반미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이외에도 4차례의 중동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등 중요한 갈등의 순간마다 미국은 개입했다. 중동의 최대 산유국이자 친미 국가인 사우디를 지키기 위해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에 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이는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을 향한 성전을 결심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렇듯 빈 라덴이 테러를 계획하게 된 배경에도, 그의 주장이 공감하며 테러에 동참했던 이슬람교도들의 분노에도 석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석유가 지배한다

    이렇듯 석유는 전쟁과 테러, 정치와 경제를 막론하고 현대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이는 비단 과거의 일이 아니다. 바로 지금도 석유는 국제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7년 트럼프가 취임한 이래로 미국의 대외 정책은 대단히 공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2017년에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포해 중동 지역의 정세를 흔들었고 2018년 5월에는 이란 핵 협상을 파기하여 더 엄격한 핵 협상을 요구했다. 2018년 12월에는 시리아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최근에는 9월부터 중국산 제품에 10퍼센트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히며 미중 무역 전쟁에서 타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왜 갑자기 미국은 기존의 자유 무역 기조와 중동 지역 안정을 위한 노력을 파기하고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트럼프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이 역시 석유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셰일 혁명’이다. 셰일 오일 시추 기술은 2000년대 초반에 개발되어 있었지만 투자 자본 확보가 어려워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융 위기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이 초저금리를 장기간 유지하면서 많은 셰일업체들이 셰일 오일 생산에 도전했고, 그 결과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다. 셰일 오일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하여 2018년에 이르러 미국은 하루 11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등극했다. 저자는 바로 이것이 미국의 외교 정책이 달라진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동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 지역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01년 아들 부시 대통령은 미 국무부, 재무부, 내무부 등이 참가한 국가에너지정책 개발연구단을 꾸리는데 이 태스크포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자국 석유 소비량의 20퍼센트도 생산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걸프 지역을 비롯한 중동 석유에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었다. 이런 진단이 내려졌으니 중동 정세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셰일 혁명으로 자급은 물론이고 수출까지 가능해지면서 미국은 중동에 대해 예전과 같은 절박함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세계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면서 우호국과 적대국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전통적인 ‘역외 균형 전략’으로도 충분해진 것이다. 트럼프는 이 역외 균형 전략을 바탕에 두고 자국의 이익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셰일 혁명’ 이후 미국이 가지게 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은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에 대해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만 ‘석유 한 방울도 안 나오는 나라에서 자원 개발은 필수’ 같은 구호만 크게 들린다. 최근에는 석유의 자리를 새로운 신재생에너지가 대체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주목받은 적이 있다. 석유가 나지 않는 한국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지금이 석유의 시대라는 명백한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시대를 잘못 읽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여전히 석유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따라서 과거 석유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다양한 일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석유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당분간 석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산유국의 이익이 한국의 이익과 긴밀하여 연결되도록 하는 방향을 제안한다. 이 역시 석유의 역사 속에서 나오는 방안 중 하나다. 2008년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스끄지가 피살되면서 미국이 사우디를 제재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우디는 이에 반발하며 더 강한 대응으로 미국에 맞서겠다고 했지만 《뉴욕 타임스》는 그러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미국이 사우디보다 원유 생산량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우디의 주요 이익이 미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 최대의 석유 공장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석유 공급을 중단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우디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는 현재 에쓰 오일 지분의 63.4퍼센트를 확보하여 최대 주주인 상태고 현대오일뱅크의 지분도 17퍼센트 매입했다. 이는 사우디가 점유율의 확보, 즉 석유를 팔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저자는 이런 상호의존 관계를 한국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강화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그럴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2004년 대우인터내셔널은 미얀마 바다에서 석유 탐사에 성공했는데, 이는 “광권 계약 체결부터 탐사 활동, 가스전의 발견 및 개발 그리고 석유 생산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한국 인력이 주도”한 쾌거였다.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상황은 분명 앞으로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석유의 역사를 잘 살핀다면 그 문제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하는 길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그리고 한국은 이미 지금까지 석유 문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극복한 경험을 쌓아놓고 있다.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석유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착각하여 이 경험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힘주어서 강조한다. “석유는 전 시대의 유물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명백한 트렌드이고, 최소 한 세대의 범위 안에서는 미래의 비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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