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란 서로 친구가 되는 일
‘여린 자’들의 만남과 기억, 교류·연대
[기고] 부산역사교사모임과 청소년들, 일본과 만나다
    2019년 08월 13일 11: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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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사교사모임과 한국 청소년들은 8월 일본 고치현 츠가댐 공사에 동원된 강제징용 한국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평화기념비 건립 10주년 행사에 다녀왔다. 이 기념비는 일본 지역 주민들과 한일 관련 단체들이 힘을 모아 2009년에 세웠다. 한국과 일본 교사·청소년들의 역사교류는 시작된 지 벌써 20여년에 가깝다. 이번 행사뿐 아니라 한일 역사교류와 관련한 활동에 대해 부경고등학교 구준모 선생님이 글을 보내와서 게재한다. 조금 긴 글이지만 나누지 않고 게재한다. 더불어 츠가댐 평화기념비 10주년 행사에 참여한 한국 고등학생 공소현 학생의 방문기도 이어서 게재할 예정이다. 기사 게재에 오재영추모사업회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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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자들을 위한 빈자리

지금 여기는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잊힌, 그리고 소외된 가장 여린 존재를 위한 빈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국가에 의해, 전쟁이라는 야만에 의해 ‘강제 동원’ 되었고 모두에게 잊혀졌던 ‘여린 존재’이였던 그 사람들. 일본에 오기 전에 공부했던 <군함도> 속의 그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곳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곳에 잊힌 체 잠들어 있을 수많은 ‘여린 사람들’.
평화는 그러한 ‘여린 자들’을 애써 기억하고, 함께 아파하고, 그런 일을 결코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과정이 아닌가 합니다.

– ‘평화의 비’ 건립 1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고등학생 대표 인사말 중 일부

일본의 경제침략에서 시작된 한일 갈등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모양새이다. 아베 정부는 기어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불매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제2의 독립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 사태의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번 일이 있기 전 한국에서는 일본이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음에도 가까운 이웃국가로 신뢰해왔다. 과거사 청산 문제, 복잡한 정치문제를 제외한다면 오히려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화, 음악 등에서 일본의 문화를 접하고 전제자품, 옷 등의 제품을 사용해왔다. 일식이 주요 외식 메뉴 중 하나로 등장하고 일본 여행이 국내 여행 못지않게 간편해지는 시대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권력자들의 정치적 이익이나 민족 감정과 별개로 자유로운 문화적 소통과 인적인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으로써 평화, 인권, 사랑 등 보편적인 가치를 함께 지켜나가는 세계시민 국가로 서로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는 믿음이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가들은 오직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만을 위해 한일 양국이 그간 쌓아온 신뢰와 새로운 세대들의 우호를 깨어버리고 말았다. 자국민을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물들게 만들어 전 세계를 전쟁과 야만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 제국주의의 시대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해치고 이간질하는 자들의 수법은 언제나 동일하고 그래서 더욱 악랄하다. 권력은 장막 뒤에 숨어 무고하고 선량한 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빨아먹고 산다. 이럴 때 일수록 ‘여린 자’들이 함께 모여야 한다. 권력을 가진 ‘강한 자’들에 맞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우정을 나누며 미래를 그려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소모되지 않도록 ‘여린 것들의 빈자리’를 만들어내고 ‘함께’ 싸우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만의 방식으로 싸우려 했다. 이번 여름 부산역사교사모임과 함께한 ‘여린 자’들과의 만남은 이 싸움에 희망을 보여 주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 만남에 대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반성하는 일본인의 모임 – NO MORE 倭亂

1992년, 나고야성터에서 낯선 일본인들이 모였다. 큐슈지역 일본인, 재일교포 1세, 2세, 기독교인,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모두 일본에서 소수자였다.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년이 되던 해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진정으로 반성했다면 근대 일본의 침략은 없었을 것’이라며 이제라도 침략의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일본이 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NO MORE 倭亂’이라고 이름붙인 그들이 왜란과 근대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사실을 바르게 알기위해 한국은 찾은 것은 2000년이었다. 이후 매년 한국의 임진왜란 전적지를 돌며 희생자를 위로하고 일본 선조의 잘못을 사과해왔다. 부산역사교사모임은 지역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이들의 활동에 함께해 왔다.

올해는 그 활동이 20년째가 된다. 7월 22일, 특별히 무거운 마음으로 한국을 찾은 그들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초량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었다. 소녀상을 둘러보던 중 계획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가와모토 요시아키(77)씨는 소녀상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어루만지며 엎드려 용서를 구한 것이다. 그는 ‘소녀상 앞에 서니 저절로 무릎이 꿇어졌다’며 ‘일본의 침략으로 큰 상처를 받은 할머니들에게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역사 인식이 바로 설 때만 한·일간 평화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22일 오전 ‘NO MORE 왜란 실행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부산을 방문한 가와모토 요시아키 목사가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강선배 기자 ksun@- 출처는 부산일보 2019.7.22.

거제도 일원을 돌아보는 일정을 마친 후 부산역에 있는 한 식당에서 한국의 고등학생, 교사들과 간단한 간담회를 가졌다. ‘NO MORE 倭亂’ 활동에 대해 한국의 학생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소 미디어를 통해 극우 인사의 망언과 함께 혐한 서적과 혐한 시위 등 일본 측의 역사 왜곡과 파렴치한 대응에만 노출되어 있었던 학생들에게 이 간담회는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부산의 만덕고, 문현여고, 부경고, 부산여고에서 온 8명의 학생들은 모두 입을 모아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일본인은 처음이었다’라고 말했다.

부경고의 공소현 학생(17)은 ‘얼마 전에 읽은 <군함도>라는 책에서 일제 강점기의 식민피해를 보며 분노해왔다. 특히 강제징용 등 식민지 수탈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무척이나 미웠다. 그런데 오늘 간담회에서 만난 분들의 활동을 보고 듣고 나니 일본 정부와 달리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일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어 놀라웠다.’ 며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활동들이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나도 친구들에게 이런 활동을 알리고 힘을 모을 생각이다.’ 라는 감상을 남겼다. 간담회 막바지에는 만덕고 학생들은 ‘임진강’이라는 노래를 선물해 활동에 참가한 재일교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일본 정부가 한일관계를 제대로 바로 잡고 싶다면 ‘NO MORE 倭亂’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잘 것 없지만 작은 나무를 꾸준히 심어 평화라는 숲을 만들고, 씨앗을 뿌려 공생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는 이들의 작은 발걸음들이 더욱 소중하다.

미래 세대를 위한 한일 교류 – 평화와 공생의 여행

일본의 청소년들이 자기 지역의 조선인 강제 징용 희생자들에 대해 조사하고 그 피해자의 유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은 2003년이었다. 이들의 여행에 한국의 청소년이 함께하자는 제안에 시작된 평화와 공생의 여행이 올해로 17년째를 맞았다.

여행의 출발지는 일본의 시코쿠(四國) 고치현(高知현) 하타(幡多)지역의 청소년 단체 ‘하타 고교생 평화세미나’이다. ‘하타제미’라 부르는 이 단체는 1983년 지역의 문제를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키니섬 수폭 시험’에서 피폭된 하타 지역의 피해자들을 만나 조사하면서 반핵-반전 운동에 눈을 뜬 그들은 피해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의 선조가 했던 가해의 역사를 추적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해의 역사를 발견했다.

고치현 하타지역은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가장 먼 곳이라고 한다. 신칸센이라는 고속열차가 닿지 않는 곳으로 오사카에서 기차로만 7시간 가량 걸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훗카이도(北海道)가 더 가깝다고 하니 우리로 치면 강원도 철원이나 양구쯤 된다. 이곳에는 일본에서 마지막 남은 맑은 강이라고 불리는 시만토(四萬十) 강이 흐른다.

이 시만토 강의 상류에는 일제 말기에 만들어진 댐이 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전력을 충당하기 위해 건설된 이 댐의 이름은 츠가(津賀)댐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험지에 급하게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수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는데 이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조선인 징용자들의 몫이었다.

공사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희생자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시신 처리나 무덤도 없이 야산에 버려졌다. 그나마 함께 동료들이 시신을 모아 매장하고 야산에 흩어진 돌들을 모아 이곳에 사람이 묻혀있음을 표시해 둔 것이 최소한의 성의 표시였다.

‘하타제미’ 친구들은 1990년부터 츠가댐에 버려진 수많은 묘지들이 누구의 것이며 이곳에 묻힌 이유가 무엇인지를 조사했다. 당시의 호적 관련 장부와 학교의 재적 명부를 뒤지면서 명부에 조선식 이름이나 창씨개명의 흔적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자신들의 선조가 과거에 했던 일을 알게 되었다.

많은 희생자들 중에서 이름과 고향이 정확하게 확인된 무덤이 하나 있었다. 박이동이라고 불리는 조선인의 무덤이었다. ‘하타제미’는 자신들에게 어두운 역사이지만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와 관련된 활동을 자신들의 중심 테마로 삼았다.

그 활동의 일환으로 1995년 지역사회에 자신들의 탐구 성과를 알리며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에 대해 기억하고 이를 추모하기 위해 박이동 위령비 세웠다.

왼쪽은 박이동씨의 묘소 앞 참배. 오른쪽은 박이동 위령비

‘이 도로는 박이동씨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의 피와 땀과 눈물의 존엄한 희생으로 건설되었다’
– 박이동 위령비 중 일부

위령비 건립은 2003년 부산역사교사모임과 함께 박이동씨의 유해를 유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유골 반환의 여정’으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유골 반환의 여정’을 기회로 시작된 한일 양국 청소년들의 교류를 이어나가고자 미래 세대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함께 과거의 역사를 치유하고 희망찬 미래를 노래하려는 ‘평화와 공생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평화와 공생의 여행’을 통해 한일 양국의 청소년들은 매년 두 차례의 교류를 진행했다. 양국의 과거사 문제의 해결방안을 고민하고 나아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교류의 결실은 2009년 일제가 강제징용 노동자에게 자행한 피해의 실상을 명백하게 밝혀 이를 진정으로 사과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평화기념비’를 강제징용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츠가댐 옆에 세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고향인 조선반도에 돌아갈 수 없었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이 땅이 국경을 넘어 우정과 평화가 널리 펼쳐지는 장소가 되기를 기원하며’ – 츠가댐 평화기념비 비문 중 일부

평화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본 측에서는 지역주민들을 설득하고 행정 기관과 전력회사, 지역주민의 성금을 모아 비용을 마련했다. 한국 측에서 전교조 부산지부와 부산역사교사모임 등의 후원 속에서 비용 마련하고 부산 민예총의 협조를 구해 위령제를 지낼 준비를 하는데 6년의 시간이 흘렀다.

기념식 당일에는 징용자들의 억울한 마음이 하늘에 전해진 걸까 흐린 하늘 아래 폭우가 쏟아졌다. 이런 날씨에도 평화 기념비 건립과 위령제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부산 민예총의 살풀이는 이곳에서의 회한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징용자와 그의 후손과 가해자와 그들의 후손 모두 이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울며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가상의 체험을 하게 했다.

그리고 올해, 2019년은 이 평화 기념비가 세워진 지 10주년이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의 고등학생과 교사들이 바다를 건너 츠가댐이 있는 하타지역으로 향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교류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기념비 건립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의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 기억의 전면에 세우고 반성과 사죄를 한 것으로 교류를 끝내지 않은 이유는 미래 세대가 과거를 되돌아보는데 만 그치지 말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의 따스한 정을 나누는 교류를 해야 한다는 소중한 마음이 모였기 때문이다.

10주년 기념식의 날씨는 ‘매우 맑음’이었고 하늘은 어느 때보다 밝고 아름다웠다. 10주년 기념식이 조금 더 특별했던 것은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시만토쵸의 든든한 후원과 함께 지역 대표가 많은 관심을 보여왔고, ‘하타제미’에서 길러낸 교사와 학생들이 현의원과 시의원으로 지역사회에 부름을 받아 활동하여 기념식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의 ‘하타제미’활동이 민간의 영역을 넘어 지역사회와 공공기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진실한 반성과 화해, 교류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의 활동이 하타지역을 넘어 고치현으로, 나아가 시코쿠 지역과 일본 본토 전역에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미이다. 지난 평화와 공생의 여행이 해온 노력이 헛되지 않았기에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 정부에 대항할 새로운 희망이 이곳에서 자라고 있음에 안도가 되기도 했다.

지역의 시민과 시만토현 관계자, 하타지역 관계자, 민단, 징용자 후손, 하타제미 등이 참석한 10주년 기념식의 마지막은 한국 학생들의 특별공연과 대표인사로 마무리 되었다. 한국 학생들은 각 지역의 ‘아리랑’을 메들리 형식으로 준비한 노래와 함께 간단한 댄스를 선보였다.

10년 전 민예총의 살풀이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한’이라고 하는 한국적 정서를 풀어낸 것이라면 이번 학생들의 공연은 암울했던 과거를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듯 흥겨웠고 힘찬 느낌을 주었다. 학생들은 이 공연에 징용자 문제를 연약한 피해자의 하소연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를 제기하며 싸우는 투사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힘든 싸움을 즐겁게 해나갈 것이라는 다짐을 담았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들은 한국학생 대표 인사에 고스란히 담겨져 일본 측에 전달되었다.

어쩌면 한 명의 고등학생인 저 또한 ‘여린 사람’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여린 자들이 함께 기억하는 것은 그 어떤 강한 사람들의 힘보다도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전 여린 고등학생들의 도전이 지금 이곳까지 이어진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예전의 선배들과 함께 그리고 이곳의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한 명의 자랑스러운 ‘여린 사람’이 되어 평화를 위한 도전을 해나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우리의 도전이 10년 뒤의 후배에게도 전해져 우리의 미래가 공생과 평화로 만들어져 나갈 수 있도록 미약한 힘을 보태보겠습니다.

– ‘평화의 비’ 건립 1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고등학생 대표 인사말 중 일부

학생들의 마음이 전달된 것인지 참가자들은 너도나도 슬픈 곡조의 아리랑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기념식을 취재하러 온 여러 언론들이 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며 서로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으니 거짓말을 아니었으리라. 학생들의 공연과 인사말은 10주년 기념식이 또 다른 시작이 되는데 중요한 의미를 던졌다.(청소년들의 아리랑 공연 영상 링크)

고치일보, 고치민보 등 지역 신문과 요미우리신문과 같은 중앙지에서도 앞다투어 우리의 교류활동을 기사로 실으려 했다. 지역 케이블 방송에서도 뉴스의 단신으로 다루어주었다. 평화를 위한 노력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요미우리신문의 경우 아베 정부의 입장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신문에 싣는 것을 데스크에서 거절했다고 했다.)

왼쪽은 고치신문 기사. 오른쪽은 고치민보 기사

평화와 공생의 여행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여행이 20년 가까이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양국의 학생들이 서로 만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기념식이나 위령제는 별책부록 중 하나일 뿐이다.

첫날부터 ‘하타제미’ 학생들은 우리와 일정을 함께 했다. 양국의 학생들은 정부 간의 갈등 따위는 상관도 않고 금세 친구가 되었다. 천혜의 자연을 가진 시코쿠 섬에서 낚시도 하고 잡은 고기를 스스로 손질하며 음식도 준비했다. 늦은 밤까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한복도 입혀주는 등 오랜만에 다시 만난 고향의 친구 같은 시간을 보냈다.

양국의 학생들이 만나는 장면은 늘 놀라움을 주는데 어쩜 저렇게 빨리 친해지는지 그들이 신기하고 대견해보인다. 공통의 관심사인 연예인 이야기, 노래 이야기부터 작은 행동과 말투처럼 별것 아닌 일에 꺄르르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이것이 평화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장난스럽게 놀다가도 진지한 장면에서는 한없이 숙연해진다. 강제징용 피해자 후손의 증언을 함께 들을 때는 기자처럼 세세한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평화 기념비 옆에 놓을 긴 의자와 새집을 함께 만들며 디자인 할 때는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쓰는 예술가와 같았다.

헤어질 땐 서로 준비한 선물을 나누며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서로 한동안 부둥켜 앉고 아쉬워하더니 이내 내년에 부산에서 꼭 다시 보기를 약속했다. 우리의 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은 사람간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었음을 헤어지는 자리에서 확인하게 된다. 내년에는 이들과 부산에서 새로운 만남을 가진다. 한일 양국의 평화를 여는 3막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한국인 피폭자를 위한 위령 –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위령 및 평화기념식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한 원자폭탄 피해국으로 매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날에 대규모 추도식을 거행한다.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해서이다. 이날만큼은 일본 전역에서 반핵과 함께 전쟁반대 즉, 반전의 구호가 전국적으로 터져 나온다.

아베 총리도 ‘일본은 유일한 전쟁 피폭국’이라며 ‘핵무기 없는 세계 실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폭 피해를 불러온 침략 전쟁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심지어 히로시마 시장이 일본과 히로시마가 앞장서서 핵확산 금지를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며 ‘핵무기 금지조약’에 서명하고 이를 비준할 것을 촉구했으나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원폭 피해로 수십 만 명이 목숨을 잃고 생존자들 또한 피폭 후유증을 겪고 있으니 이런 비극이 결코 반복돼선 안 된다’ 외침은 그래서 공허할 뿐이다. 오직 피해만을 외치는 기념식은 일본이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한다.

전 세계 그 누구도, 어쩌면 우리 스스로도 주목하지 않지만 사실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라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노동하던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조선인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피해자의 고통과 비극을 이야기하던 일본 정부를 비롯한 위령 및 평화기념식 관계자들은 약 7만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의 피해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눈감았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보상해줄 때에도 조선인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치료와 보상을 얻어내기 위한 오랜 싸움이 불가피했다. 1970년 세워진 위령비는 평화공원 내 설치를 거부당해 평화 밖에 설치되었다가 1999년에 와서야 이곳으로 이전했는데 이는 곧 조선인 피해자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지난한 투쟁일지와 같다.

우리는 2014년, 2016년 2년에 걸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찾았다. 매년 8월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서 번갈아가며 열리는 ‘전국고교생평화집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 집회에는 일본 전국 각지의 반핵평화운동을 하는 동아리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성과를 보고하고 공유하는 행사로 일본 현지에서 명성이 아주 높다.

2012년과 2014년에 우리는 특별 분과를 맡아 한국의 피폭자에 대한 현황과 함께 김형률로 대표되는 피폭자 2세, 3세의 유전 피해문제를 조사, 발표하였다. 한국의 학생들이 담당한 분과는 평화대회에서 처음이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조선인 피폭자 문제의 경우 이 자리에서 처음 접한 일본 학생들이 대다수였기에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왼쪽은 2012년 나가사키 오른쪽은 2014년 히로시마의 전국교교생평화집회

올해 집회는 ‘하타제미’와의 교류일정으로 불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8월 6일 히로시마를 지나가는 입장에서 위령 및 평화기념식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그간 일본의 원폭문제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궁금한 마음에 다시 히로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여전히 8월 5일, 위령 및 평화기념식이 열리기 전날 조선인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파란 한복치마를 입은 합창단이 위령의 노래를 부르고 민단 소속 재일교포들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우리도 한켠에 서서 한국에서 가져간 소주를 바닥에 적시며 마음을 다해 피해자들을 위령했다. 조선인 희생자 위령제는 대단히 뜻 깊은 행사였지만 불편한 감정은 숨길수가 없었다. 정식 행사인 위령제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조선인들의 실상에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진정한 추모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왼쪽은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앞, 오른쪽은 원폭 피해자 위렵 및 평화기념식장에서의 사진

이 기간 히로시마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있다. 행사장은 분주하게 준비를 이어가고 위령탑과 원폭돔(히로시마 원폭 당시 유일하게 남은 구조물)에는 일본 각지에서 접어온 종이학들이 걸리고 묵념하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8월 6일 당일에는 8시 15분, 원폭이 터진 그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추모와 헌화가 이어지는데 보통 2시간이 넘어서야 그 행렬이 끝날 정도이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일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과거사 문제는 일본에게 동아시아 지역을 이끌어 나갈 국가가 될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일으킨 독일이 어떻게 유럽연합을 이끄는 대표국가가 될 수 있었는가. 자신들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고 피해국과 피해자에게 진실로 사과할 때 국가적인 신뢰 회복을 넘어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한다면 현 일본이 그렇게도 원하는 경제와 정치, 문화를 선도하는 아시아의 대표국가이자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우뚝 설수 있지 않을까. 역사와 정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침체된 일본을 다시 활기찬 국가로 만들 모멘텀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갈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추모 기념관에는 피폭의 실상을 전하는 유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이 열렸다. 유품의 주인공들 사진을 함께 전시해 사람들의 감정을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형태였다. 이 기념관의 시작은 1945년 8월 6일. 위령 및 평화기념식과 마찬가지로 그 이전의 역사는 없고 오직 피해의 역사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는 늘 그래왔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넘겼지만 마지막 출구에서 다시 가슴이 내려앉는다.

영어와 일어로 설명된 판넬 마지막은 평화를 위한 히로시마의 노력 설명하는 부분인데 이 판넬만 한글로 번역을 해두었다. 그리고 그 하위 챕터에는 ‘한국인피폭자 치료지원’이라는 제목의 설명문을 걸어두었다. 누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반핵과 평화를 위해 전세계 피폭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설명에 허탈감을 느꼈다.

그렇다. ‘여린 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20여년을 싸워나가도 ‘강한 자’인 주류의 통제와 왜곡은 여전히 공고하고 강인하다. 우리의 연대가 지속되고 발전해야함을 일본의 주류들의 성지 히로시마에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평화란 서로 친구가 되는 일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경제 강국이 아니다’며 ‘우리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며 사람을 중시하는 평화협력의 세계 공동체를 추구해 나갈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지난 5일 ‘일본은 경제력만으로 세계의 지도적 위치에 설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의 연장선에 있는 발언이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와 연대하면서 책임과 역할을 다할 것’이며 ‘대한민국은 경제력뿐만 아니라 인권이나 평화 같은 가치의 면에서도 모범이 되는 나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도 졸렬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옆 나라를 보니 문 대통령의 이 발언은 반가움을 넘어 고마움을 느끼게 했다. 한일 간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폐쇄적 민족주의가 활개를 칠 이때 균형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일본 정부의 부당한 경제 침략에 대해 불매 운동 등 다각적으로 이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양국 국민 간의 우호와 교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린 자’들이 ‘강한 자’들에 속지 않고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연대하고 소통하는 일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여행 중 한 선생님은 ‘평화란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 친구가 된다면 싸울 일도 없고 싸우더라도 화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가 극으로 치닫고 있는 이때, 한국과 일본의 좋은 사람들이 모여 좋은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이 전쟁과 갈등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는 방법일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혜안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서 한참동안이나 마음에 남았다.

일본인 중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 임진왜란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20년째 한국을 찾는 사람들의 헌신은 ‘악인이 많음이 아니라 의인이 한 사람도 없음을 슬퍼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일본의 권력자들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일본의 양심적인 많은 의인들이 있는 한 희망이 있지 않을까. 다만 우리는 그들과 연대하여 평화 공존의 관계를 지향하여 언젠간 일본 전역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믿고 인내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만나 교류해온 고치현에는 ‘꽃은 바람을 거역해서 향기를 낼 수 없지만 선하고 어진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바람을 거역하여 사방으로 번진다’는 법구경의 구절에 딱 알맞은 선생님들이 계신다. 이미 연세가 70이 넘어 교직에서 은퇴하신 야마시타, 가미오카 선생님과 정년이 얼마 남지 않으신 사카시타, 모리, 아즈마 선생님을 뵐 때면 늘 감동을 받는다. 언제나 호기심 가득한 두 눈은 젊은이들보다 밝게 빛나고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열정은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계시기 때문이다.(주량도 세다!) 늘 즐겁고 행복하게 활동하는 그 에너지는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이들을 한번 본다면 조그만 시골 마을인 하타에서 출발한 ‘하타제미’가 마을을 넘어 지역을 바꾸고 지역을 넘어 시코쿠라는 섬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타제미’는 이미 일본의 전국적인 학생동아리로 이름이 높아 전일본 최우수 학생 단체로 여러 번 선정되었고 몇 편의 다큐 영화도 제작을 한 경험이 있다.)

바다 건너 이역만리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는 이들이니 일본 전역을 뒤흔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다림도 오래가지 않겠지.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여린 자들을 위한 빈자리’를 만들고 이들을 기억하며 ‘여린 자’들과 함께 연대해 나가는 이 길을 계속 걸어 나갈 것이다. <끝>

필자소개
부경고등학교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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