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곳에서 최장집 교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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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25일 1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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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집 교수는 ‘정치 현실주의자’다. 현실주의자 최 교수는 민주파가 집권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이다. 하지만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를 비판하면서 ‘정치’가 복원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는 또 386세대를 준열하게 비판하지만 이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희망을 짊어진 중심세대’라고 믿는다/판단한다. 스스로 그런 기대가 허망한 것 아닌가 회의도 하지만 그 끈마저 놓치면 희망을 찾을 곳이 없다고도 말한다.

    존경받는 한 정치학자의 이런 입장, 한국 민주주의의 희망과 관련된 그의 견해 또는 기대에 기자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 말의 진정성 또는 현실적 의미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최 교수는 국민의 정부 초기의 ‘외도’를 빼놓고는 학자로서 현실적 발언을 해왔다. ‘민주적 시장경제’인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인가 하는 비대중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논쟁/선택에서 국민의 정부가 후자로 기울면서 그는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조선일보의 계산된 ‘무식함’이 직접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연구대상인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엄격히 유지하면서, 논문 이외의 형식으로 발언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제해 온 학자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그의 발언에 우리 사회는 귀를 기울여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데,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낯선 곳에서 그를 만나게 됐다. 보궐 선거 현장이 그곳이다. 7.26 선거에 나선 열린우리당 후보의 후원회장 자격으로. 어떻게 보면 낯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낯익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제자를 위해 기꺼이 나서는 스승들을 보는 건 흔한 일이다.

    그가 비판하는 핵심 대상 가운데 하나인 여당에, 또 다른 비판 대상인 386 제자가 후보로 나선 것을 지지하는 것이 어떤 일관성을 벗어났다고 얘기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혹독한 비판 자체가 기대의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스스로를 질문의 주체로 자리매김하지, 대안의 생산자 역할을 자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대안적 처방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조후보가 우리당 후보라서 지지하는 게 아니라 이런 분이 정당과 국회에 들어가는 게 민주주의에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지지한다."(경향신문 인터뷰 내용)

    첫 느낌은 당혹과 실망이었다. 그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제자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것인가. 그 사랑은 부정적 맥락에서 바라보거나,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따져보면 인맥 정치의 한 종류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발언이라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문득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김문수 현 경기도지사가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당시다. 김 후보의 서울대 은사인, 널리 알려진 한 교수는 제자 김문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쏟아냈다. ‘서노련의 김문수와 신한국당 김문수’ 사이의 설명보다는 제자 김문수에 대한 칭송과 사랑만이 넘쳤다. 당연했다. 그 자리는 아줌마 선거운동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으니까.

    그리고 그 교수는 ‘서노련 김문수’보다는 ‘신한국당 김문수’를 기꺼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것은 정치를 넘어선 사랑인가, 사랑을 빙자한 정치인가. 당시 필자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간 상념이었다. 어쩌면 서로 배척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두 가치가 행복하게 공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때의 ‘행복’은 특정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을 때만 그렇다. 그 밖으로 나가면 그건 갈등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차라리 최 교수가 열린우리당이 형편없고, 문제투성이이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희망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개인적으로는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은 지지하지 않지만, 거기 들어가는 사람에 대한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지지하라고 권유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물갈이론’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방법’의 실패는 최 교수의 이론을 통해서 밝혀지기도 한 것이다.

    최 교수는 말한다. “집권 민주파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적 보수혁명을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급격하게 추진해왔다”고. “노동 및 사회복지 정책은 말로는 몰라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민주파의 민주정부는 “노동을 소외시키고 보통사람들의 희망과 요구를 좌절”시켰다고.

    최 교수가 아끼는 제자를 이런 곳으로 보내고자 하면서 후원회장의 자리를 맡고, 언론과의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할 수 없이’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 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의 ‘확신’에 이견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견의 핵심은 최 교수의 확신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리얼리스트로서의 최 교수가 보이지 않는 발언이다. 물론 필자가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수많은 ‘확신들’이 민주파 정당에 북적대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필자는 그것이 객관적 평가든, 스승으로서의 사랑이든, 최 교수의 제자에 대한 애정을 문제 삼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럴 일도 아니다. 다만 최 교수의 제자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그의 제자가 될 기회가 없었던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도 헤아려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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