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
    이를 우려하고 경계한다
    한국이 적입니까? 일본이 적입니까?
        2019년 08월 01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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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진보연대에서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에 대한 우려와 경계를 담은 글을 발표했다.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글이다. 지난 글에 이어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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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적입니까’

    7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군의 일본 지식인집단이 “한국이 적입니까”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대립하더라도 특별하고 신중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는다. 그러면서 “일한청구권협정은 양국관계의 기초로 존재하고 있는 만큼 존중받아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아베 정권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사례로 2015년 체결된 ‘한일위안부합의’를 드는데, 그 역시 한일청구권협정의 불완전성을 일본이 인정한 셈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 합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한국이 이미 재단 해산을 결정했다는 사실도 명기한다.) 또한 한국도 노무현 정부에서도 법률을 제정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실시한 만큼, 한국과 일본 쌍방이 납득할 만한 타협점을 찾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 않겠는가 주장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스스로 보상책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실 1960년대 한일교섭이 진행될 당시, 일본에서도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운동 중에는, ‘우파’적인 흐름의 표현으로 ‘어업, 독도문제에서 한국에 지나치게 양보했다’라든지, ‘싼 임금으로 혹사시킬 수 있는 한국 노동력 때문에 일본 노동자가 고생한다’, ‘일본인 한 명당 3,200엔의 혈세로 박정희 정권을 구제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그 ‘좌파적’ 흐름에서는 한일협정이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를 단죄하는 정신으로 체결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뚜렷하게 등장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서명운동도 한일협정에 대한 일본 내 좌파적 비판이 담겼던 정신을 계승하는 한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 시점에 이르러, 양국이 한일협정을 매개로 하여 지난 시기 형성된 한일관계라는 큰 틀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곧 각국 민중은 적대적, 배타적 민족주의의 흐름을 경계하고,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합의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일본 서명운동 페이지 캡쳐(https://peace3appeal.jimdo.com/)

    그렇다면 ‘일본이 적입니까’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7월 11일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는 글을 발표했다.(관련 글은 레디앙에도 게재되었다.) 그로부터 20일 지난 현시점의 상황은 어떠한가?

    7월 30일 자 한겨레에 실린 <대중문화로 번진 일본 불매운동>이라는 기사를 보자. 케이블TV 프로그램은 수개월 전 약속된 일본 음악인의 출연을 취소시키고, 교육방송 ‘세계의 명화’에서는 일본영화 편성을 방영 직전 바꾸었다. 유투브 방송에서는 일본 화장품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진행자가 사과해야 했고, 예술의 전당에서는 어떤 관객이 일어서서 일본인 연주자를 향해 일본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외쳤다.

    내가 한국에서 일본상품을 구입하거나, 일식당에 가려고 할 때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는 일종의 ‘자기검열’이 시작된 단계다. 나아가 그런 행동을 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데 내가 동참하지 않는 것마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면 이제 ‘상호검열’이 시작되는 셈이다. 한겨레의 기사를 보면, 현재는 최소한 ‘자기검열’이 시작된 단계다. 이러한 분위기가 더 맹렬해져 상호검열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게 된다면 반일 민족주의의 맹목성은 더 이상 어떤 구속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현재와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마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발언일 것이다. 7월 20일 조 수석은 2012년,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지난 7월 11일 사회진보연대의 글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이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국내 개인, 집단마저 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글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바로가기) 불과 10일 후, 바로 정확히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발언이 청와대 민정수석의 입을 통해 나왔다. 청와대에서 이른바 ‘문심’, 즉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대변한다는 민정수석의 강경한 발언은 반일 민족주의적 흐름이 고조되는 데 분명한 확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출발하자

    반일 민족주의가 발화점을 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20세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겠으나, 일단 이번 글에서는 이번 사태의 직접적 발단이 된 한일청구권협정과 민간/개인청구권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지난 7월 11일 글에서는 이 문제를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번 기회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박정희 정부와 ‘민간청구권 보상’

    기실 피징용자 보상 문제의 기본 방향은 민주당 장면 정부가 진행하던 한일교섭에서 그 틀이 잡혔다. (5·16 군사쿠데타 직전인 1960년 5월 10일 한일교섭) 이때 한국 측은 보상대상으로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했으며, 이 보상은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일본 측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을 말하는가”라고 질문했고, 한국 측은 “국가로서 청구하며 개인보상에 대해서는 한국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답변했다. 즉 정부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포함하는) 개인 보상금을 받아서 국내에서 이를 집행하겠다는 기본 틀이 이미 장면 정부 당시 설정되었다는 뜻이다.

    실제 한일청구권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1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출했다.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1970년대까지 국민소득을 배가시키고 이를 위해 청구권자금을 공평하게 사용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민간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야당이 이에 문제제기하면서, 결국 1966년 2월에 공포된 법은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만 명기했다. 1967년 두 번째로 대선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되면 곧 보상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71년 1월에 이르러서야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증거자료 수집을 위한 법률이었고, 보상을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때 신고대상 중에는 피징용자와 관련된 것은 △우편저금, 진체저금, 우편연금(곧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군인·군속·노무자로 소집·징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자라는 항목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에서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보상금이 지급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신고기간이 너무 짧았고 확실한 증거서류를 구비한 신고만 접수했다. 또한 이 기간에 지급 청구를 하지 않은 경우, 그 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 예를 들어 인명관계 신고수리가 8,910명이었는데, 한일교섭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망자를 77,603명으로 제시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 적은 수치였다. 또한 보상액수도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컸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떤 이유든 간에 박정희 정부가 피해실태를 철저히 조사할 의사나, 보상할 의사가 크게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와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노무현 정부는 2004년 2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입법했고, 여러 과정을 거쳐, 2007년 12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리 자문기구로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의 2005년의 검토 결과,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는 결론은 지난 글에서 이미 인용한 바 있다.)

    그 1조는 이 법이 “국가가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급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그렇다면 왜 보상금(또는 위자료)이 아니라 ‘위로금’이라는 표현을 썼는가? 이는 한국정부가 이미 1975년에 시행한 보상으로 인해, 정부의 법적 보상 의무는 없지만, 그 보상이 불완전, 불충분하였다는 것을 정부가 인정하여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에 대해 위로금 또는 지원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기존 보상을 보충하는 인도적 지원으로, 보상의 성격을 담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법적 보상은 아니라는 복잡한 논리 구조를 동반했다.

    그렇다면 2007년의 ‘지원’은 1975년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신고자 수가 크게 늘어나 22만 건 이상의 신고를 접수해, 11만 건에 대해 지원이 이뤄졌다. (현재까지 대략 6,000억 원 이상의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사망자뿐 아니라, 생존자, 부상자, 미수금 피해자를 지원대상에 포함시켰다. (생존자는 위로금 2,000만 원, 부상자는 위로금 1,000만 원, 생존자에게는 연간 80만 원의 의료지원. 미수금은 1엔당 2,000원으로 환산) △ 유족범위가 후순위 유족인 형제, 자매로 확대되었다. △정부의 적극적 조사로 피해자의 입증 책임이 경감되었다.

    노무현 정부 ‘희생자 지원’의 이면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만사형통이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없는 논란도 동반되었다. 첫 번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다. 왜 이런 일이 있었나? 애초 정부와 국회 행정자치위가 합의한 원안은 생존자에 대한 지원으로 매년 50만 원의 의료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생존자에게 500만 원의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라는 내용의 수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하여 통과된 결과,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수천억 원대의 추가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며, 특히 생환 후 사망한 분들과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실제 생환 후 사망자의 유족에게도 위로금을 지급할 경우, 재정투입이 조 단위로 증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는 노무현 정부의 거부권 행사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그 후, 생존자 위로금은 다시 삭제되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2월에야 다시 법안이 통과되었다.

    또 하나의 논란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문제였다. (국내 징용에는 ‘일반징용’과 이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현원징용’이 포함된다. 현원징용은 조선총독부가 중점산업으로 인정한 공장의 현직노동자를 고용장에서 그대로 징용하는 방식이다. 즉 기존 공장에서 계속 일하되 이직이나 퇴사가 금지되는 셈이다. 여기에 연간 연인원 수백만 명에 이르는 근로보국대나, 징용령 이전 시기부터 존재하던 ‘관 알선’ 노동자도 포함된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불거진 이후로, 최근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19년 7월 11일에도 서울행정법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가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보상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을 각하했다. 이미 2011년 2월 헌법재판소는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을 제외하는 게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국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법을 제정해 국내 강제동원자들도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로 지정해 희생을 기리는 조치를 한 점 등을 고려하면 국가의 지원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전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5년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은 국내 동원을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 근거는 △국내강제동원은 연인원 650만 명으로 대상자 수가 너무 많아 정부의 재원에 문제가 있다는 점. △한일협상 당시 일본에 요구한 보상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실 여기서 제시한 두 가지 쟁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2007년의 지원법의 불가피성을 재확인하든, 아니면 그 미흡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든 무언가 판단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역대 한국 정부가 취한 조치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미룬 채, 모든 문제를 일본 측에 미루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방송화면 캡처

    스스로 되돌아보자

    일본 지식인계에서 일본 자신에 대한 비판과 자성을 촉구하며 사회운동의 흐름을 형성하려고 노력한다면, 현 시점에 한국에서도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의 절규를 시종일관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한국 정부와 한국인은 무엇을 했던가.

    2007년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 우리는 이 법률 제정의 역사적 함의에 대해 명확히 인식했던가. 다시 말해, 1975년의 보상 이후에 한국 정부가 추가적인 지원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인가. 당시 법률제정 이면에도 다양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는 그 문제들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한 논의가 필요했다. 만약 2007년 지원책에도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현재의 한일 갈등을 파해하는 외교적 합의점의 도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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