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마에서 금강산까지, 그리고 1984년
    [역사의 한 페이지] 홍수의 추억② ‘물과 남북관계’
        2019년 07월 26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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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역사의 한 페이지] 1925·1971년, 홍수의 추억①

    문명 밖의 세상이었다. 거대 도시 서울이 졸지에 수중 도시로 얼굴을 바꾸었고, 날벼락처럼 당한 재난에 시민들은 비명마저 잃고 말았다. 서울·중부 지방에 폭우가 내린 9월 첫 주말. 급박한 한강 수위에 모처럼의 휴일은 박살이 났고, 외수(外水)와 내수(內水)에 가옥을 침수당해 물난리를 겪은 시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 『주간한국』, 1984년 9월 16일자

    장대비가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1984년 9월 초였다.

    1984년의 홍수는 여러 면에서 역사적인 홍수였다. 이 해의 홍수는 태풍 준(June)이 몰고 온 집중 호우(8월 31일∼9월 4일)로 인한 것이었다. 호우 피해는 전국에 걸친 것이었지만 그 중 서울의 피해가 가장 컸다. 당시 서울에서는 1일 최대 강우량이 298.4mm에 달하여 1904년 중앙기상대가 생긴 이래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한강 인도교의 수위는 위험 수위 10.5m를 훨씬 넘어 최고 11.03m를 기록하였다. 이는 20세기 이후 1925년 7월 18일의 11.26m, 1972년 8월 19일의 11.24m를 잇는 3번째 기록이었다. 이로 인해 다수의 관공서가 침수되어 공무 집행에 큰 차질이 빚어졌으며, 서울 지하철 3,4호선도 예정된 개통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홍수로 한강 주변의 저지대 다수가 침수되었는데, 그 중 강동구· 마포구의 피해가 컸다. 특히 마포구 유수지 제방이 붕괴되면서 망원동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많은 수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지금이야 망원동이 ‘망리단길’로 불리며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되었지만, 35년 전 망원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사진] 왼쪽은 1984년 대홍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한강변 아파트의 저층까지 물에 잠겨 있다. 동부이촌동 일대로 보인다.(구글코리아 사진). 오른쪽은 1984년 9월 16일자 『주간한국』이다. ‘들통에 가족을 태우고 피신하는 수재민’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표지 사진은 1984년 한강 대홍수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다. 긴박한 상황에 비해 두 부부는 연출한 사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다. (박건호 소장)

    홍수, 남북 화해의 길을 내다

    지난 글 ‘홍수의 추억’(1)에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1971년 홍수를 계기로 발견된 백제 유적을 다루었다. 홍수가 가져온 뜻밖의 결과였다. 1984년 9월 대홍수는 비록 그런 유적지 발견에 기여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남북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홍수는 1973년부터 단절되었던 남북 간의 대화가 재개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이듬해 1985년 분단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홍수가 이산가족의 상봉을 가져온 것이다. 그럼 1984년 홍수 전후의 남북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그 1년 전인 1983년 상황부터 살펴보자.

    1983년 그해는 전두환 정부 집권 3년 차가 되는 해였다.

    이 해 10월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남북관계를 뒤흔든 큰 사건이 발생한다.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 아웅산 묘소를 방문할 즈음 북한 공작원에 의한 폭탄 테러가 일어난 것이다. 테러가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도착하기 직전에 일어났기에 대통령 내외는 무사했지만, 테러 현장에 있던 부총리·장관 4명을 포함한 정부 수행단 17명과 버마인 7명이 사망하고, 총 5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진] 1983년 10월 9일 일어났던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 직후의 처참한 현장 사진.(김상영 기자 사진)

    테러 직후 군부에서는 이를 북한의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북한과 전면전을 벌이든지 아니면 최소한 암살단을 보내 김일성을 처단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휴전선에 접한 육군 1군단과 6군단은 병사들을 완전 무장시키고 북진할 준비를 마쳤으며, 일부 부대는 ‘벌초계획’이라는 김일성 암살 작전을 세우고 대통령의 최종 승인을 요청했다. 이런 요청에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준비가 한참 진행되던 당시 남북 간의 국지전 혹은 전면전이 이런 국제행사의 무산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적 경사’ 올림픽이 전쟁을 막은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전방부대를 찾아다니며 지휘관들에게 ‘내 명령 없이 한 사람이라도 움직였다간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엄포로 지휘관들의 반발을 억눌렀다. 며칠 후 발표된 특별담화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며 이번까지만 인내하겠다는 경고를 북한에 보냈다. 이런 일이 있었던 상황이라 남북 관계는 좋을 수가 없었다.

    1984년 9월 대홍수가 남한을 할퀴고 지나간 것은 버마 아웅산 테러가 일어난 지 대략 1년이 지난 후였다. 수마(水魔)는 남한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 홍수로 사망 189명, 실종 150명에 재산 피해 2502억 원의 인명과 재산 손실을 겪었고 수도권 지역 2만여 채의 집이 침수되면서 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홍수 직후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북한이 돌연 남한의 홍수에 대한 구호물자를 전하고 싶다는 뜻을 북한 적십자사를 통해 남측에 표명한 것이다. 이례적인 제안에 당시 전두환 정부 내에서는 북한의 체제 선전에 말려들 수 있다는 반대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평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한 상황에서 쉽게 뿌리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정부는 고심 끝에 북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가 자기네 제의를 걷어차 버릴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고 상투적으로 하던 작태를 다시 한 번 펼쳐 보인 것인데, 역으로 그 의표를 찌름으로써 다시는 국제 사회를 향한 장난질을 할 수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북한은 국제 사회에 대고 공개적으로 수재물자 지원 제의를 한 만큼 우리가 공개적으로 수락 의사를 밝히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주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준비도 없이 허풍을 떨다가 허둥댈 것이 뻔한데, 이번 기회에 나쁜 버릇을 고쳐놓을 필요가 있었다. 짧은 기간에 그 많은 물자를 대려면 북한 당국은 물론 많은 북한 동포들이 고생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포애’를 팔아먹으며 장난질치는 북한 당국자들을 한번 혼을 내줘야 할 일이었다.

    -『전두환회고록』 2권 453페이지, 2017

    회고록에서 밝힌 대로 북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단순히 북한의 장난에 혼을 내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평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이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홍수가 남북한 사이에 대화의 계기를 마련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 북한은 1984년 9월 8일 방송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남한 수해지역 이재민들에게 쌀과 시멘트, 옷감,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하였고, 남한도 9월 14일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9월 18일 남한의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와 북한 적십자사 부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실무 접촉을 열어 구체적인 물자 전달 방식에 대해 논의하였다.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인한 해빙 무드가 깨진 1973년 이후 11년 만에 재개된 남북 대화였다.

    회담에서는 이재민에게 물자를 직접 전달하겠다는 북한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난항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 측 주장대로 대한적십자사가 북한의 물자를 전달받아 이재민에게 배급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1984년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우리 측이 제시한 장소인 북평, 인천 그리고 판문점으로 북한은 트럭과 배를 이용하여 물자를 운송해 왔다.

    [사진] 왼쪽은 북한이 보내온 쌀을 하역하는 장면이다. (『전두환회고록』 사진), 오른쪽은 북에서 온 쌀 포대기의 모습으로 ‘입쌀’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글자가 보인다.(인터넷 사진)

    당시 이를 취재한 미국 『뉴욕타임스』 클라이드 하버먼 기자는 “무성한 잡초에 뒤덮인 낡은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수백 대의 북한 트럭이 구호품을 싣고 휴전 이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으로 넘어왔다.”고 보도하면서, 이 사건을 “1984년 올해 최고의 외교적 사건”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때 인도받은 물자의 양은 쌀 5만 석, 옷감(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과 약간의 의약품이었다. 우리 측도 북측에 대한 답례로 담요와 카세트, 라디오, 전자 손목시계 등을 전달하였다. (낙동강 변에 살았던 필자의 가족도 당시 북이 제공한 쌀과 옷감과 시멘트를 배급받았다. 쌀의 품질이 남한 쌀에 비해 많이 떨어졌던지라 많은 사람들이 그 쌀로 떡을 해먹었던 일이 기억난다. 입쌀 빈 포대기를 하나 보관해두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아쉬울 뿐이다. 당시 필자는 컬렉터의 자질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해빙 무드는 계속 이어져 1984년 10월 12일 남측은 북측에 남북 간 경제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남북 경제회담 개최를 제의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여 1984년 11월 15일 판문점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경제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은 이후 1985년 11월 5차 회담을 끝으로 중단될 때까지 1년 정도 이어졌고, 이때 논의된 내용들은 이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협의 과정에는 물론, 이후 2000년 이후 남북경제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하는 데 참고가 되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1985년 5월에는 73년 이후 중단되었던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서울에서 열렸고, 여기에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공연 등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1985년 9월 20일에서 23일까지 분단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서울과 평양에서 열렸다. 고향방문단 51명, 기자 및 수행원 50명, 예술 공연단 50명 등 151명으로 각각 구성된 남북의 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각각 방문하였는데, 이중 남한에 살던 35가구가 북한에 사는 가족 45명과 상봉했으며, 북한에 살던 30가구가 남한에 사는 가족 51명과 상봉했다. 홍수가 이산가족의 상봉을 가져왔다는 말은 정말로 허언이나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 각각 50명 정도의 작은 규모였고 단 1회성 행사로 그치고 말았지만, 앞으로 이어질 이산가족 상봉의 첫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남겼다.

    [사진] 1985년 이산가족 상봉 당시 지학순 주교와 여동생의 상봉 장면이다. 이 때 여동생이 오빠에게 했던 “우린 여기가 천국인데 왜 오빠는 죽어서 찾느냐?”는 말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국가기록원 사진)

    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대화 분위기 속에서 남북 정상회담도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남측의 제안으로 1985년 7월 11일, 7월 26일, 8월 9일 비밀 회담이 판문점에서 세 차례 열렸으며, 9월 5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은 정상회담 예비 교섭 대표로 비밀리에 남한을 방문한 허담을 대표로 하는 북한 특사단을 만나 김일성의 평양 방문 초청장을 받았다. 남한 역시 10월 16일 장세동을 대표로 하는 특사단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보냈다. 특사 장세동은 김일성을 만나 전두환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이 친서는 2년 전 아웅산 묘소 테러로 죽을 뻔 했던 대통령이 보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김일성에 대한 깍듯한 인사말로 시작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이…….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광복 후 오늘날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 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1985년 말이나 아니면 1986년 상반기에 열릴 것으로 보였다. 언제 열릴 것인가가 문제였지, 열린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사진]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극비리에 정상회담도 추진되었다. 왼쪽은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 특사단을 모처에서 만나는 장면, 오른쪽은 남한 특사로 북에 파견된 남한의 장세동 특사가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장면이다. (『전두환 회고록』 사진)

    다시 ‘물’로 파국을 맞은 남북 관계

    필자의 수집품 중에는 1980년대 남북 관계를 증언하는 영수증 3장이 있다. 1986년 12월 9일 울산 MBC 방송국에서 평화의 댐 건설 성금을 낸 양산읍 호계리 주민들에게 발행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평화의 댐’은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대응하여 우리 측에서 건설하고자 했던 댐으로 북한의 수공 위협에 댐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영수증은 당시 경남 양산읍 호계리 주민들이 울산 MBC 방송국에서 접수한 평화의 댐 건설 성금 모금에 동참하여 마을 주민들이 반(班) 별로 돈을 모아서 성금을 내고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반 별로 모아서 낸 성금은 3만에서 3만 5천원 정도이다. 요즘 물가로 환산해보면 대략 20∼25만 정도로 보면 대략 맞을 것이다. 이 영수증은 1986년 가을부터 시작된 남북 사이의 격한 대립을 반영하는 현대사 자료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앞에서 살핀 것처럼 1985년 말이나 1986년 상반기에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 아니었던가? 몇 달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6년 남북 관계가 남북정상회담 개최라는 화해의 분위기에서 금강산댐 건설 규탄이라는 반북 대결 분위기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홍수로 시작된 남북화해의 분위기가 어떻게 파탄났는지 살피기 위해 1985년 가을로 다시 돌아간다.

    그해 가을 남한에 북한의 특사단이 다녀갔고, 뒤이어 남한의 특사단도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남한 특사단이 북한을 다녀온 이틀 뒤인 10월 20일 북한 무장 간첩선이 부산 청사포 해안으로 침투하다 격침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지난 3개월간 준비해오던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되는 계기가 된다. 이 사건으로 간첩선만 격침된 것이 아니라 남북정상회담까지 격침되고 만 것이다. 남북 관계는 지금도 그렇지만 유리그릇처럼 늘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다시 전두환 회고록이다.

    내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은 것은 김일성에게 품었던 실날 같은 한 가닥 신뢰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나의 특사를 만나서 평화가 어쩌고 민족이 어쩌고 대결 지양 어쩌고 하는 그 시간에 뒤로는 간첩선을 침투시키다니…….그런 사람과 백번을 만나 천 마디 말을 나눈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486페이지, 2017

    그 후 북한은 1986년 1월 20일 ‘팀스피리트 86’ 훈련을 구실로 모든 남북 대화를 일방적으로 연기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남북 간에 짙은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1986년은 그렇게 불안하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달 뒤 터진 ‘금강산댐 사건’!

    물로 시작된 남북 간의 화해의 분위기는 물로 다시 파국을 맞고 있었다.

    1986년 10월 30일 이규호 건설부 장관은 북한이 새로 건설하고 있는 금강산댐의 높이가 200미터 이상, 최대 저수량이 200억 톤 이상이며, 댐 붕괴 시 수도권 일대를 포함한 전 지역에 가공할 수마가 덮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의 의도는 우리 수도권을 완전히 수몰시키는 것이라며 그는 북한에 금강산댐 건설 즉각 중지를 촉구했다. 이어 11월 6일 이기백 국방부 장관까지 나서 “금강산댐의 저수량이 총 9억 톤이 될 때부터 우리 안보는 중대 위협 앞에 노출되며, 그 물을 일시에 방류한다면 서울의 경우 등고선 20미터까지 물에 잠기고 2백억 톤 방류 때는 등고선 50미터까지 잠기는 등 중부 일원이 황폐하게 된다.”고 발표했다. 이어 12월 21일 문공부 장관은 평소 북한이 88 서울 올림픽 저지를 공언해 온 만큼 금강산 댐 건설이 서울 올림픽 저지를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국민을 상대로 누가 더 겁을 많이 주나 경쟁이 붙었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주장은 점점 도를 더해갔다.

    [사진] 금강산댐의 위험을 보도한 경향신문 1986년 11월 6일자이다. 이 기사에는 서울시 예상침수 요도가 실려 있는데, 국회의사당은 완전 잠기고 63빌딩은 중간까지 물에 잠기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어 방송들도 연일 금강산댐 수공의 위험성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북한의 수공 시뮬레이션을 모형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북한이 최대 200억 톤의 물을 한 번에 방류할 경우 여의도 63빌딩은 중간까지 물에 잠기고, 국회의사당은 꼭대기 정도만 남기고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위협을 과장 보도하는 데에는 신문도 뒤지지 않았다. 정부가 북치고 언론은 장구를 치고 서로 화답하였다. 요즘 말로하면 온 언론이 ‘가짜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MBC 아나운서 손석희는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나는 지금도 내가 뉴스를 진행하던 그때, 스튜디오 한쪽에 잉크를 풀어놓은, (그래야 더 실감이 났으므로) 수돗물로 찰랑대던 여의도 일대의 모형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연히 거기엔 63빌딩이 있었고 파란 잉크 물은 그 빌딩의 허리께까지 차올라 넘실대고 있었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장난처럼 하면 안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63빌딩의 중간까지 물이 찬다는 건 좀 너무 하지 않느냐, 2층 정도까지로 줄이자 어쩌자 하면서 제멋대로들 기준을 정하다가 누군가 ‘겁을 주려면 확실하게 줘야지’ 하는 말에 훅훅거리며 웃기까지 하였다. 그 광란의 시기에 과학적 사고는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우리가 내뱉은 웃음에는 무기력한 자조도 섞여 있었겠지만 그 한구석엔 또 어떤 광기도 있었던 계 아닐까. 거짓말도 계속하면 그 자신은 참말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는 그때 이미 자기 제어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손석희, 『노동자신문』, 1993년 9월 10일자

    정부의 연이은 금강산 댐 관련 발표와 뒤이은 언론의 호들갑으로 순식간에 남한 사회는 공포에 휩싸였다. 1984년 한강 대홍수를 겪은 지 2년 밖에 안 된 시점이라 국민들이 느낀 공포는 더욱 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26일 네 명의 관계 장관은 ‘평화의 댐’ 건설 계획과 ‘평화의 댐 건설 국민모금 계획을 추진’한다는 공동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12월 15일에 ‘평화의 댐 건설 범국민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본격적인 국민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전형적인 관 주도의 국민모금 운동이었다.

    서울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수공을 획책한다는 것은 사실상 선전포고로 간주할 수도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대응책으로 댐 시설물을 항공기로 폭격을 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댐 건설을 막기 위해 전쟁을 각오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북한의 댐 건설 자체를 중단시킬 수 없다면 그 대신 금강산댐 하류에 수공 방어용 대응 댐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한 댐, 곧 ‘평화의 댐’으로 이름 붙인 댐을 건설하는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 2권 526페이지, 2017

    연말의 반북 분위기는 뜨거웠다. 북한 규탄 궐기대회가 곳곳에서 열려 한 달 만에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고, 평화의 댐에 대한 포스터와 표어가 제작되고, 언론의 대대적인 홍보 속에서 6개월 만에 773억원이라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민 성금이 모였다. 이 모금운동에는 어린이, 해외 동포, 심지어 교도소 재소자들도 참여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를 ‘앵벌이’라고 표현했고, 어떤 이들은 ‘코 묻은 돈 까지 긁어모은 사기극’이라고 표현하였다.

    [사진] 평화의 댐 건설운동 당시 울산 MBC에서 평화의 댐 건설 성금을 낸 양산군 호계리 주민들에게 발급한 영수증 3장이다. (박건호 소장)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1988년 기사에서 “평화의 댐은 불신과 낭비의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고 비꼬았다. 이후 김영삼 정부는 1993년 감사를 통해 금강산댐의 위험은 지나치게 과장되었고, 북한의 댐 파괴를 통한 수공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평화의 댐은 “정권 안보 차원에서 조급한 과잉대응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결론지었다. 한마디로 금강산댐에 대응하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 운동은 한편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전두환 정부는 과장된 공포심 조장과 무리한 국민 성금 모금으로 추진한 평화의 댐 파동을 통해 무엇을 노린 것일까?

    대북 안보의 관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국내 정치적 관점에서 봐야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금강산 댐 문제가 이슈화되던 시기를 살펴보자. 당시는 1984년 정부의 유화조치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민주세력이 조직을 새롭게 정비해 1985년부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는데 특히 1985년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민당을 중심으로 1986년 초부터 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면서, 정권과의 정면 대결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이런 도전에 대해 반격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정권 입장에서는 북한 카드만한 것이 없었다. 북한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신민당과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고, 안보 불안이 고조되면 정부와 집권당에 유리해진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금강산댐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과 북한에 대한 규탄, 평화의 댐을 만들기 위해 성금을 내자는 구호가 난무한 가운데 1987년이 밝았다.

    그리고 새해를 맞은 지 채 보름도 되지 않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학생 박종철이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에 대해 조사받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하게 된다. 당시 이 박종철의 죽음이 몇 달 뒤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거대한 민주화 운동의 서막이 될 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금강산 ‘물’로 국민을 겁박하며 권력 연장을 꾀하던 전두환 정부가 다시 그 ‘물’로 인한 고문살인으로 국민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참고자료>

    돈 오버도퍼, [두개의 코리아], 중앙일보, 1998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권, 인물과 사상사, 2003

    김연철 외, [만약에 한국사], 페이퍼로드, 2011

    김성보 외,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80년대, 창비, 2016

    전두환, [전두환 회고록] 2권, 자작나무숲, 2017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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