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노동운동 상호 비판 통해 제대로된 연대를
        2006년 07월 21일 01: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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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두 차례 이재영 위원의 글에는 시민단체의 사회협약 참여의 자격 일반을 문제 삼는 비판과 ‘저출산 고령화 대책 사회협약’의 타당성 및 시민단체의 역할을 문제제기 하는 논점이 섞여있다. 지난 글에서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반론을 폈다고 생각했으나 부족 했던 듯싶다.

    나는 노동조합이 사회협약의 ‘우선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이 ‘혁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을 뚫고 ‘피’로 획득한 시민권을 인정한다. 때문에 노동조합을 포함한 노·사·정 3주체에 60%의 의결권을 부여한 ‘저출산 고령화 대책 사회협약’의 주체구성은 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만이’ 사회협약의 주체라는 논리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지난 글에도 밝혔듯,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Social Corporatism)의 선험적 원론에 입각해서 볼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경제사회 시스템과 사회적 대표성에 근거해 판단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직화된 자본주의’나 ‘조율된 자본주의’로 볼 수 없는 한국의 경제사회시스템에서 노·사·정 3자가 중심이 된 북유럽식 협약체제는 작동 근거가 미약하다. 10%의 노동조합 조직률 아래 있는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서구와 같은 전형적 협약체제를 강제할 힘이나 그 ‘배타적 선수’임을 자임할 근거가 없다. 때문에 한국에서의 사회협약은 경제사회적 위기에 대한 압력과 대처로부터 나오는 독특한 모델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위원이 언급한 남유럽 국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중해형(Mediter- ranean type)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들 중 노동조합 조직률이 한국보다 떨어지는 프랑스는 협약 국가가 아니며, 노사정 관계가 비교적 제도화되어 있는 이탈리아는 30%대의 조직률을 갖고 있다. 최근에 주목받는 스페인도 상대적으로 낮은 17%대의 조직률을 보이지만, 산업수준의 단체협약 적용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이 60%에 가까우며,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집중화된 단체교섭 제도를 갖고 있다.

    포괄적 협약체제가 작동하기 힘든 조건에서 사회협약에 참여하는 단체의 기준은 ‘구체적 협약’의 내용과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타당하다. 출산과 양육의 사회적 환경조성, 노후소득보장체제의 구축을 중심으로 한 협약에 오랜 기간 여성과 가족 이슈를 다루어 온 여성단체나 권리로서의 사회복지를 운동화 시켜온 참여연대가 참여한 것을 요식업중앙회가 불참한 것과 빗대어 대단히 임의적인 것이라 비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만약 이번 협약이 자영업 활성화 대책이나 식품안전 대책에 관한 것이었다면 요식업중앙회의 참여가 타당했을 듯싶다.

    사회협약의 핵심은 교환에 있다. 주고받을 것이 명확할수록 협약정치는 능동적으로 작동한다. 이 위원은 노·사·정과는 달리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러나 ‘말 봉사’라고 폄하된 행위는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 정책적 입장을 세우고 실천하는 시민운동의 고유한 행위양식이다. 노총들이 산하 노조에게 임단협 지침을 내리듯 시민운동은 대중을 향해 발언하고 행동한다.

    나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협약의 사회적, 정치적 정당성은 이해당사자들만의 참여가 아닌 공론영역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시민운동의 참여로 더욱 견고해 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공식성을 획득한 노동조합운동이나 정당으로서는 당최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시민운동의 이 같은 위치와 실천이 자본주의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조직되지 않은 한국사회 동학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간 ‘영향의 정치’에 충실했을 뿐 ‘진입의 정치’를 금기시 해온 시민운동을 ‘옵저버’로 인식하는데 이의가 없다. 때문에 시민운동이 권력과 자본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듯, 노동의 역할에 개입하고 비판하는 것 또한 주저할 이유가 없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제대로 된 연대를 위해서도 상호 비판의 날은 더욱 날카로워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토론을 ‘옵저버’가 아닌 노동조합운동의 간부와 생산적으로 이어보고 싶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이 위원이 ‘천만의 말씀’이라고 단언한 것과 달리 많은 시민단체의 활동가들도 칼끝에 선 심정으로 이 시대와 매 상황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믿었으면 한다. 이 사람들에게 ‘쫓겨날 걱정’없는 속편한 존재라는 규정은 비판의 도를 넘어선 언사다.

    이 글은 <시민의 신문> 659호에도 같이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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