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 몸집 키우는 단계서
    나락 맺을 준비를 하는 때
    [낭만파 농부] 기후위기와 농업·농촌
        2019년 07월 19일 10: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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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중하순. 누구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 노래했지만 그런 고장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고, 벼 전업농이면서 조금 늦게 모내기를 한 우리로서는 좀 애매한 때다.

    벼로 말하자면 새끼치기가 절정에 다다라 영양생장에서 생식생장으로 넘어가는 국면이다. 다시 말해 몸집을 키우는 성장을 끝내고 열매(나락) 맺을 준비를 하는 때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기를 지나 어른으로 접어드는 나이인 셈이다.

    당연히 그에 걸맞는 체력을 갖춰야 하고 그러려면 뿌리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 튼실한 뿌리로 영양분을 양껏 빨아들여 좋은 이삭을 맺도록 하는 것이다. 뿌리가 잘 자라도록 흙속에 산소를 충분히 공급하는 게 핵심인데 이를 위해서는 그 동안 논배미에 흠씬 대주던 물을 빼줘야 한다. 흔히 중간물떼기라고 하는 공정이다.

    모내기를 시작으로 모 때우기, 김매기, 깊이 물대기로 숨 가쁘게 달려온 벼농사가 한 숨 돌리는 시점이다. 아침저녁 두 차례, 하루도 거르지 않던 물보기도 이제 한 번으로 줄였다. 반경 4킬로미터에 흩어져 있는 논배미를 둘러보는 데만도 한 시간이 족히 걸린다. 논둑이 터지거나 구멍이 나지는 않았는지 살피고, 물이 끊겼다 싶으면 수문을 열고, 물꼬싸움에 숨바꼭질이라도 벌어질라 치면 두어 시간 훌쩍이다. 이제 논바닥이 드러나더라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으니 그 해방감을 짐작이나 할까?

    하긴 올해는 가뭄이 심해 고생을 좀 했다. 물이 모자라 며칠 동안 논바닥을 드러냈던 논배미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온갖 논풀이 올라왔다. 물이 얕으면 우렁이도 힘을 못 쓰니 손으로 매주는 수밖에 없다. 물달개비 수북한 곳은 아예 포기를 했더니 사흘 반나절 만에 김매기가 끝났다. 시간으로 치면 26시간. 걱정했던 것보다는 선방이다.

    그렇게 건성으로 김매기를 끝내고 났더니 우리 벼농사두레가 벌이는 양력백중놀이가 기다린다. 올해는 판을 키우기보다는 회원들끼리 실속 있게 놀자는 취지로 진행했는데 그래도 쉰 사람 가까이 몰렸다. 만경강변 맑은 물가에 그늘막을 쳤다. 닭백숙으로 기운을 챙기고 신명나는 풍물굿 한판, 보물찾기와 퀴즈풀이, 미리 준비한 질문지를 뽑아 자신을 드러내는 ‘당신은 누구시길래’. 아재들 물수재비 뜨고, 아짐들 다슬기 잡은 강물을 따라 여름 한 나절은 그렇게 줄래줄래 흘러가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잔치는 끝났고 우리는 다시 논배미로 돌아왔다. 오늘은 ‘친환경 농산물 인증 현장심사’를 하겠다며 심사원이 찾아왔다. 간단한 서류심사(영농일지와 생산계획서 점검)를 거쳐 해당 논배미를 둘러보는 방식이다. 올해는 농약이 검출되는지 보겠다면 벼를 여남은 포기나 채취해갔다. 나락 맺을 벼포기를 낫으로 싹둑 베어내는 그 께름칙함이라니.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밝혔지만 사실 난 이 인증제도라는 게 영 마뜩치가 않다. 물론 땅과 자연생태를 망치는 농약과 화학비료 같은 독성오염물질을 쓰지 않는 생태(유기)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국가인증제도는 거북하기 짝이 없다.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심사과정이 몹시 불쾌할뿐더러 판에 박힌 서류 작성, 불합리한 몇 가지 판정기준도 거슬리는 까닭이다.

    그러니 유기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증신청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내가 짓고 있는 논배미 가운데는 이미 유기농 인증을 받은 상태로 물려받은 곳이 있다. 제도가 맘에 안 든다고 부러 인증을 반납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안 그래도 유기농법을 쓰고 있으니 거북함을 무릅쓰고 인증을 계속 유지(갱신)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기후위기’ 때문에 가슴이 타 들어가는 요즘이다.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욕망을 채우겠다고 인간은 자연생태를 야금야금 파괴해왔다. 그 결과로 오늘 지구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고 급기야 ‘30년 뒤 인류문명 대부분 파멸’이라는 진단서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세상은 어찌 이리도 요지부동인가.

    이 고장만 해도 환경파괴 이슈가 꼬리를 물고 있다. 완주군은 고화토라는 오염물질 매립을 허가해주고 업자는 방비도 없이 마구 파묻는 바람에 페놀과 비소, 구리 등 발암물질과 치명적인 독성물질이 허용기준치를 넘는 침출수가 하천으로 흘러드는 바람에 지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안 그래도 악취를 뿜어대는 퇴비고장, 사료고장에 대기오염이 심각하다. 급기야 지난달에 다뤘던 대규모 돼지농장은 주민들의 거센 반대를 무시하고 기어이 재가동 절차에 들어갈 태세다.

    기후변화가 몰고 올 끔찍한 더위도 더위지만 이래저래 숨 막히는 여름, 잔인한 계절이 흐르고 있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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