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부의 '독재적 광기' 또는 '마초적 파시즘'
    2006년 07월 19일 09: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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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라고 노무현대통령은 말했다. 이 말은 “권력은 경제부처가 주무르는 괴물적 신자유주의로 넘어갔다”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정동채 전 문화부장관은 재경부의 축소 발표 직전까지도 스크린쿼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킨다는 얘기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왔었다. 재정경제부는 지난 7월 13일 해당 부처인 문화부의 의견을 묵살하고, 이해 당사자인 영화인들에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기습 발표해 버린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을 부처간 갈등해결 우수사례로 선정, 보고했다.

영화계뿐 아니라 이 나라의 문화계, 진보진영을 연일 성명과 집회, 농성으로 이어지게 했고 갈등과 분노를 조장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이다. 이를 두고 어처구니없는 자화자찬에 빠져있는 재경부는 이성적 판단에 마비증상이 와 독재정권의 광기에 빠져들고 있는 마초적 파시스트의 서막을 보여준다.

   
 ⓒ연합뉴스
 

그들로선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던 문화논리를 단칼에 꺾어버린,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소아적 자족감을 오버액션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재경부는 영화인들과 싸움에서 패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98년 서슬퍼런 외환위기 시절, 미국은 투자를 빙자하여 스크린쿼터 폐지를 요구했었다. 막대한 외자가 유치된다는데, 감히 영화인들이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한국 내 대미감정 악화를 우려한 클린턴 정부는 협정을 중단시켰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있던 대표적 친미 관료 한덕수 전경제 부총리는 이때부터 스크린쿼터 저격수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후 자리를 옮기면서도 한덕수의 스크린쿼터 축소를 위한 행보는 계속됐다. 산업연구원장으로 재임하던 2003년 스크린쿼터 무용론을 펼치는 <스크린쿼터제, 영화산업 사활을 쥔 열쇠인가>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게 했는데 이 연구는 잘못된 통계에 근거한 졸속 연구물로 판명이 나기도 했다.

같은 해, 주한미상공회의소(암참)는 그간 미국의 이해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한덕수에게 제1회 암참상을 수여한 일도 있었다. 마침내 2005년 경제부총리로 임명된 그는 1년 뒤 자신이 직접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발표함으로써 스크린쿼터에 맺힌 한을 풀었다.

재경맨들에겐 스크린쿼터 때리기가 충성의 척도라도 되는 듯, 권태신 차관도 그의 장관을 거들어, 적잖은 스크린쿼터 어록을 남겼다. “우리 사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에 관계없이 스크린쿼터는 없어져야 한다.” 그가 지난 3월 했던 이 발언은 재경부발 스크린쿼터 죽이기를 위한 어불성설 논거의 맥을 잇고 있다.

정권은 짧고 경제관료는 길다

외환위기 시절 금융자본과 다국적 콘체른, 미국의 시녀 역할을 해온 IMF의 요구에 한국정부는 충실히 따랐고, 그 결과 한국사회는 신속하게 신자유주의적 사회구조로 개편 되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노무현 정부를 회생불가능한 참패의 늪으로 몰아넣은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 구조의 당연한 결과로서 괴물처럼 양극화된 이 사회의 비참이다.

경제활동인구의 10분의 1이 신용불량자이고, 비정규직은 800만에 달하는 반면, 전세계에서 백만장자 증가율이 가장 가팔랐던 이 나라는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라도 나올 법한 나라처럼 모든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믿기도 힘들다.

그런데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상황을 조장하는 무리들은 여전히 심판받지 않은 채, 이 사회를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단 한 번도 IMF구조조정과, 그 당시 산업은행이 주도해 들이부은 168조원의 공적자금 투입의 과정이 과연 정당했고, 제대로 관리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인 재판을 하지 않았다. 몇몇 좌파 언론들과 몇몇 다큐멘터리들이 울분을 터트리듯 사안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명백히 범죄와 오판이 자행되는데도 그것이 버젓이 합법적으로 반복되는, 이 알 수 없는 사회적 무책임의 결정판은 아마도 론스타 사기매각인 듯하다. 재경부 인맥과 론스타가 만나는 접점으로, 외환은행 사기매각을 조율한 주체로 지목되는 국내최대 로펌 ‘김&장’의 고문 리스트에는 이헌재 전부총리 뿐 아니라, 한덕수 현부총리, 한승수 전 외교통상부 장관등의 이름도 보인다.

고위급 경제관료 혹은 대미관련 외교라인에 있는 인사들이 소위 ‘회전문’을 타고, 금감원, 재경부, 로펌 김&장을 수시로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버젓이 장∙ 차관 등의 무거운 관직들을 하나씩 차고 있을 뿐, 이 투기금융 시대를 유유히 살아가는 대도들일 뿐이다.

연이은 개혁정책 실패로 무력감과 조급증에 빠진 대통령에게 한미FTA라는 빅카드를 내밀어, 실적주의로 매진하게 한 것도,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곳에서 조차 일관되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반대이론들을 무시하고 당당히 협상체결을 향해 돌진하게 하는 것도 신자유주의로 대통령의 뇌를 성공적으로 마비시키고 있는 이들의 공적이다.

파탄에 이르다 못해 분노에 사로잡힌 민심은 선거를 통해 노무현 정권을 심판했을지언정, 이 난공불락의 회전문에 갇힌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사회를 좌우하는 이 고급 갱스터들의 털끝은 건드리지 못했다.

고액연봉 공공기관장 직은 모두 경제부처 산하

지난 7월 11일에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가 발표되었다. 공공기관장들의 연봉 중 7억이 넘는 산업은행장을 비롯해 최상위 층을 이루는 기관들은 모두 금융기관들이었다. 반면 예술단체의 기관장들은 산업은행장 연봉의 10분의 1수준인 7천만원에 그쳤다.

   
▲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7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제2차 한미FTA 협상 반대시위 관련 정부 공동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각각의 공기업은 그것이 은행이든 발레단이든 한 사회가 시민들에게 필요한 다른 영역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곳. 그 공공기관의 수장에 대한 대우가 자본이라는 이 사회의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차용한 자들에게 훨씬 더 높게 책정된다는 것은 이 나라에서 공공성의 의미가 얼마나 천박한 물신주의에 뒤틀려 있는지를 보여준다.

더욱이 이들의 연봉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자인 기획예산처, 재경부 관료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갈 곳이기 때문에 후한 연봉이 공공연히 허락되고 있다는 점에 이르면, 자본이라는 권력을 차용한 자들의 합법적 횡포가 이미 제도화된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는 것이다.

산업은행장이 수여한 7억의 연봉에는 그가 전년도 경영에서 많은 흑자를 냈기에 성과급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공공기관의 사명은 분야를 막론하고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다수의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립오페라단의 사명은 뛰어난 예술성이 담긴 작품들을 창작해내고, 그러한 작품들이 가능한 한 많은 관객들에게, 특히 기존의 관객들을 넘어서, 오페라 관람이 낯설었던 이들을 찾아 공연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 폭 넓은 관객 층을 확보해내는 일이 소위 민주사회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문화민주주의의 실천인 것이다.

이들이 입장권을 더 높은 가격으로 책정하여, 극장문턱을 높이고, 사회 최상층만이 계속해서 오페라하우스의 문턱을 넘나든다 해도 결국 오페라단이 커다란 흑자를 냈다면, 기획예산처의 관리들은 오페라단의 경영성과에 호의적인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가치를 경제가치 하나가 흡수하고 있는 현 상황. 그것은 편협한 세계인식과 무지에 가까운 인문학적 수준을 가진 일단의 경제관료들의 돌고 도는 회전문 독재가 멈추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다.

경제독재의 결정판 : 기획예산처의 공공기관 지배구조 일원화 플랜

이 상황에서 한 술 더 떠, 기획예산처는 내년 1월 시행을 목표로 지난 3월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기본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그 골자는 모든 정부 산하기관에 대한 지배구조를 기획예산처 산하로 일원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기관들은 각 부처에 속해있으며, 나름대로 부처별 특성과 이해가 공유되어, 기획예산처의 섣부른 예단을 중간에서 막는 역할을 소소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획예산처는 인사권과 예산권을 그들의 직속 권한으로 개편할 뿐 아니라, 각 기관들에 대한 평가기준과 경영원칙을 철저하게 경제가치에 입각하여 개편하겠다는 메가톤급 신자유주의화 플랜을 입법화하고 있다.

국립극장 시절 김명곤 대표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경제부처가 아니거나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노선에 서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입 벙긋 못하는 분위기임을 개탄한 바 있다. 그런데 장관이 된 그는 지금, 그 입 벙긋 못하는 치욕스러운 시간을 조용히 견디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24개의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권과 예산권이 송두리째 기획예산처의 손아귀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는 스크린쿼터에 대해 그랬듯이,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아니면 그마저도 신자유주의라는 20세기말에 나타난 신흥종교에 빠진 것일까.

죽임에서 살림으로의 로드맵 전환 : 문화다양성 협약은 그 시작

한미FTA 인터넷 토론방에는 요즘 찬성론자들 사이에서 “반대하는 놈들, 다른 대안 있으면 내놔봐” 하는 투의 논리가 자주 등장한다. 사실 그렇다. 한국사회는 점점 더 시장문을 여는 방향으로, 대외무역의 비중을 높여가는 방향으로만 치달아 왔다.

WTO가 그렇게 결정했고, 미국이 그렇게 요구했다면, 우린 결국 따라갈 수 밖에 없는 듯 했다. 따라서 지금도 자유무역은 결국은 확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나 속도조절과 순서만이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 논리가 우세하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서서히 죽느냐 빨리 죽느냐의 논의밖에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제3세계의 시민들은 1세계를 위해 노예처럼 죽도록 일한다. 자연은 산업 폐기물을 버리는 곳 정도로 인식되고 문화는 소위 산업을 통해 확대재생산이 가능할 때에만 가치를 가진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모델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윤의 확대재생산을 위해 개발을 자행하고,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임금을 최소화한다.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키기 위해, 무수한 쓰레기를 양산하고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개인적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쓸데없는 취미활동은 가질 필요도 없는 이것은 유기체인 지구와 그 위를 사는 인류와 또 다른 생명체를 모두 소모될 물질자원으로 여기는 체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문화는 존재할 권리가 있듯이

왜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세계 147개국이 지난 2005년 10월 유네스코에 모여 미국의 외교∙국방력을 동원한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문화다양성 협약에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의 표를 던졌을까?

이는 자본의 힘에 이끌려 온 자본을 위한 잔치였던 현재의 세계질서를 거부하고 생태적이고, 문화적인 삶,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 소수자의 문화가 차별 받지 않는 삶의 질서를 창출하고 이러한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모두가 갈망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문화다양성’은 ‘생물다양성’에서 유추된 개념이다. 지구상에 오랫동안 살아 남기 위해서는 생물다양성이 불가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다양성은 인류의 장기적 생존에 필수적일 것이라고 하는 판단에서 온 논리이다. 문화다양성 협약 채택의 의미는 드디어 참을 수 없는 세계의 깡패 미국을 향해 전 세계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응징할 것을 결의했다는데 있다.

문화다양성 쇠퇴의 중요한 원인은 세계화에 있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부국과 빈국의 불균형으로 인해 빈국의 문화는 사멸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세계화가 진행될 수록, 각국에서 생산해 내는 다양한 농산품들도 각국의 다양한 미감이 투영된 의상들도 마찬가지로 사멸한다.

영화배우 최민식은 깐느영화제에서 “모든 문화는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전세계에 외쳤다. 모든 문화, 모든 언어, 모든 욕망, 모든 인종, 모든 생명체는 공히 존재할 권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살림의 로드맵을 지금부터 그려야 한다.

PD수첩을 보며 대통령을 원망하는 댓글만 달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반대담론을 그려가야 할 때이다. 죽임이 아닌 살림의, 즉 생태와 문화가 삶의 중심에 서는 새로운 대안 사회로 가는 로드맵을 그리며 함께 첫발을 내딛어야 할 때이다. 길은 사람들이 그 쪽을 향해 가는 순간 나기 시작하는 법이며 이미 지구 저편의 많은 친구들은 그 길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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