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심 좋은 동네의
    환대하는 신앙공동체
    [그림 한국교회] 부여의 규암교회
        2019년 07월 10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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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부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서울로 돌아오는 데, 따뜻한 기운이 여전히 저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게 헨리 나웬 신부가 저서 『상처입은 치유자』(분도출판사, 1997)에서 말한 환대가 주는 힘인가 봅니다.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리스도교 사목자의 치유의 사명에 대해서 배려, 동정, 이해, 용서, 우정 그리고 공동체 등 많은 말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환대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대-그리스도적 전통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고독이라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응답의 본질에 관하여 보다 깊은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환대는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편협성을 타파하고, 구원이 우리에게 지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올지도 모른다는 직감에서 낯선 사람에게 우리 집의 문을 열어주도록 하는 미덕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불안한 제자들을 힘 있는 증인으로 만든다. 의심이 많은 소유자를 관대한 시혜자로 만들며, 폐쇄적이고 종파심이 강한 사람을 새로운 생각과 통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인 사람으로 만든다.”(100-101쪽)

    6월 초 토요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규암교회에서 환대를 받았습니다. 카메라로 교회 전경을 찍느라 애쓸 때 한 분이 다가왔습니다. 박희준 권사님(83세)인데 교회 청소를 하러 나온 길이었습니다. 권사님의 소개로 만난 이상덕 담임목사님은 목양실로 안내하여 ‘규암교회 100년사’를 주더니 세 번째 예배당에 마련한 교회역사기념관으로 안내하여 성경, 오르간, 교적부 등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주일예배 준비에 여유가 없는 토요일인데도 환대해주었습니다. 기념관 아래에 작은 가옥인 두 번째 교회도 남아 있었습니다.

    옛 예배당과 종탑이 보이는 사진을 찍으려고 앞동산의 규암중앙감리교회로 갔습니다. 다시 내려왔을 때 여전히 정돈하시는 박 권사님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집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 “냄새를 얼마만큼 허락하느냐는 그 사람과의 친밀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신을 벗고 올라간다는 것은 발에서 나는 냄새까지 허락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원리에서 신을 벗은 방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라는 생각을 더 갖게 한다.”(『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을유문화사, 2019, 337쪽)는 유현준 교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식사를 잘 하고 과일을 먹는데, 새콤한 산딸기는 40여 년간 농사짓던 작물이었다고 합니다. 산딸기를 서울 백화점에 납품하게 되어, 세 딸을 키워 출가시키고 신앙생활하며 사신 것입니다.

    부여가 고향인 친구 임규일 목사(만성교회)가 수북정, 궁남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꼭 보라고 권유한 대로 ‘수북정’에 올랐습니다. 부여에선 백마강으로 불리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보니, 부여가 고향인 신동엽 시인의 장편 서사시 <금강>을 대학시절 조심하며 읽던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로 시작하는 <금강>은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을 내용으로 민중을 역사의 주인으로 그렸기에 불온한 시였습니다. 또 “껍데기는 가라”는 시는 역사의식을 자극하였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자에서 넉넉한 강물을 바라보다가, 고향이 이 근처라는 중년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인 ‘궁남지’로 가는 길을 물으니, 자기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환대의 연속이었습니다. 궁남지는 꽃이 아직 피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정자에 앉아 연꽃으로 가득 찬 연못을 감상하였습니다. 거기서 슬슬 걸어서 간 정림사지의 소박한 오층석탑에서 백제인들의 담백한 신앙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림=이근복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장로교나 감리교와는 달리 성결교는 한국인이 세운 독특한 역사입니다. 류대영 교수의 『한국기독교의 역사』(한국기독교연구소, 2018)를 보면, 1907년 미국 성결운동 계열의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가 도쿄에서 운영하던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이 귀국하여 전도를 시작하였고, 중생(重生)을 최고가치로 여기는 교리를 따라 거리전도를 하였습니다. 1921년부터 성결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1911년 경성성서학원을 개교하여 본격적으로 목회자들을 교육하였습니다. 1948년 창립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가입을 둘러싸고 한국교회는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반에큐메니컬파는 WCC가 자유주의신학이고 공산주의를 용납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성결교도 에큐메니컬파와 복음주의파로 나뉘어 갈등하다가 두 기구에서 동시탈퇴하자는 안이 나왔지만 총회에서 부결되자, 1961년 복음주의파는 독자적인 총회를 구성하였고, 이듬해 교단 이름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으로 바꾸었습니다.

    “100년의 은혜를 감사와 영광으로! 2세기의 비전을 섬김과 나눔으로!” 『규암교회 100년사』(2014년 발간)에 나온 표어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규암교회는 경성성서학원 수양생인 박제원이 규암에 내려와 전도하고, 1912년 7월 26일, 김성기씨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1월에 복음전도관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존 토마스 초대감독이 방문하였습니다. 1913년 10월 12일 김상준 전도사가 담임교역자로, 박제원 전도사가 부교역자로 부임함으로 한강 이남지역의 첫 번째 복음전도관이 되었고, 충청, 호남지역 성결운동의 거점교회가 되었습니다.

    뜻밖의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942년 6월, 일본의 ‘성결파교회’ 교역자 150여 명이 ‘설교할 때 예수재림 등 불경적인 언사를 한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예비검속당하고 예배중지, 교회해산 그리고 전재산을 몰수당하였습니다. 일제도 1943년 5월, 치안유지법을 발동하여 성결교회 교역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극심히 탄압하더니, 12월 29일 성결교회를 해산시켰습니다. 규암교회도 폐쇄조치되었고, 교인들은 이웃 감리교회에 교적을 옮겨서 신앙생활을 은밀히 예배드리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1945년 9월 첫 주일에 ‘성결교회 재흥 감사예배’를 드렸고, 11월 9일, 제1회 재흥총회로 모여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였습니다. 규암교회도 잃었던 예배당을 되찾아 감격스럽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불굴의 믿음으로 신사참배 반대로 구속, 투옥되었던 김의용 목사를 제12대 담임목사로 청빙하였습니다.

    이후 한때 교회가 분열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박종만 목사의 부임 이후 도약하고 안정을 찾아갑니다. 규암교회는 1970년 제15대 박상규 담임목사(1970-2002년)의 부임으로 여러모로 성장을 하였고 충남지방에서 지도력을 행사하였으며, 1985년 네 번째 예배당을 신축하고 입당하였습니다. 2002년 5월, 9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32년간 사역한 박상규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이상덕 담임목사의 위임식을 가졌습니다. 2012년에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예식을 거행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규암교회 박희준 권사님의 따뜻한 환대는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하다가 사람을 만드는 건축을 이야기한 유한준 교수의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우리는 돌, 나무, 흙 같은 자연 속의 재료를 가지고 건축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건축물이 부산물로 만들어 내는 빈 공간 안에서 생활한다. 그 공간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그 공간은 또 다시 우리를 만든다. 이처럼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공간을 통해서 다른 시대의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건축물은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건축물과 사람은 떼어낼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건축물은 삶의 일부가 된다.” (위의 책, 17쪽)

    공간과 인간은 교감한다는데, 환대하는 교인을 낳은 규암교회 예배당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것이 아쉬웠습니다. 앞으로 규암교회가 부여에 비해 낙후된 규암면에서 환대하는 공동체로 지역사회를 잘 섬기며 주민들의 안식처가 되길 바랍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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