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수, 잠든 백제를 깨우다
    [역사의 한 페이지] 1925·1971년, 홍수의 추억(1)
        2019년 07월 09일 11: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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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無爲) 무수확(無收穫)의 4,5년이 흘러서 을축년 대홍수를 만났다. 말 하니 하여도 기억하는 분은 기억하려니와, 비라 하기로니 그때의 것 같은 줄기차고 기승스런 비는 드물었을 것이다. 기십일(幾十日)을 연이어 주야의 별(別)없이 온다든지 나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이 뒤집힌 듯 그냥 퍼붓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개벽을 생각하고 노아의 홍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각 교통은 두절 상태로 그야말로 물난리는 도처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내가 살기는 혜화동이었던 바, 이런 경황없는데 술 먹으라고 나오라고 부르는 친구도 지각없음은 물론, 그 모진 비를 무릅쓰고 나간 나도 어지간한 숙맥이나 철부지가 아니었다.

    -변영로, ‘을축년표류기(乙丑年漂流記)’ 중에서

    수주 변영로(卞榮魯)가 쓴 [명정 40년]의 한 대목이다. 변영로가 ‘개벽’ 혹은 ‘노아의 홍수’로 비유한 을축년 대홍수는 지금으로부터 94년 전인 1925년 일제 강점기 때의 일로, 우리 역사상 최악의 홍수로 기록되어 있다. 술꾼으로 이름 날렸던 천재 영문학자 변영로의 이 경험담은 을축년 대홍수 때 술에 취한 채 급류에 휩쓸려 죽을 뻔한 표류기를 쓴 것이지만, 술꾼들의 필독서로 알려진 이 책의 주제가 주제인지라 그런 폭우 속에서도 술을 마셨노라는 술에 대한 자신의 애호를 호기롭게 자랑하는 글로 읽히기도 한다.

    한국에서 장마는 해마다 6월 중순에서 7월 하순의 여름에 전선을 형성하여 남북으로 오르내리면서 많은 비를 내리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말이라 따로 한자어는 없고, 오래도록 비가 내린다하여 구우(久雨)라고도 하고, 또는 임우(霖雨), 매우(梅雨)라고도 한다. 장마철에는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흔히 ‘큰물’이 지기도 하는데, 이를 홍수(洪水)라고 한다. 가끔 이 시기에 태풍까지 겹쳐 피해를 키우기도 한다.

    [사진] 을축년 대홍수 당시 물에 잠긴 용산 일대의 모습

    을축년 대홍수 때 장마는 1925년 7월 7일부터 9월 초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태풍도 네 개나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큰물이 졌다. 이 때 넘쳐흐른 한강물이 광화문 앞까지 들이닥치고, 용산 철도청 관사 1층 천정까지 물이 찼다고 하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홍수로 전국적으로 사망자가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붕괴 1만 7045호, 침수 6813호의 피해가 발행하였다. 그리고 논 3만2183단보(1단보는 300평), 밭 6만7554단보 등이 유실되어 피해액은 1억 300만 원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전체 예산의 약 58%에 해당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을축년 대홍수가 남긴 흔적들

    이렇게 큰 규모의 홍수인지라 그냥 ‘홍수’가 아니라 ‘대홍수(大洪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을축년 대홍수는 이곳저곳에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지금도 서울과 그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다만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사람들이 모르거나 주목하지 않을 뿐이다. 그 엄청난 홍수도 이미 먼 옛날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지금 서울 송파구 여성문화회관 옆 근린공원에는 두 개의 비석이 대로변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오른쪽은 암행어사 이건창의 영세불망비이고, 그 왼쪽으로 1.7m 높이의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이 비석 표면에는 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의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이 비석이 바로 ‘을축년대홍수기념비’다. 이 비석이 이곳에 서 있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사진] 서울 송파구 여성여성문화회관 옆 근린공원에 세워져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1925년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서울에 300mm 이상의 비가 내렸다. 이 비로 한강이 범람했는데, 당시 한강 수위는 12.74m에 이르렀다. 이것이 네 번에 걸친 을축년 대홍수 중 가장 큰 규모의 홍수로, 이 때 특히 뚝섬, 송파, 잠실리, 풍납리 일대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당시 [조선일보]는 송파 일대의 수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뚝섬 상부에 있는 신천리, 잠실리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전부 물속에 들어서 모두 절명 상태에 있다는데 그곳은 무인고도(無人孤島)와 같이 되어 배도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구조할 도리가 전연 없으며 17일 밤 10시경부터 살려 달라는 애호성(哀號聲)이 차마 들을 수 없이 울려왔는바 그동안 모두 사망하였는지도 알 수 없더라.

    -[조선일보], 1925년 7월 17일 호외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는 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잠실 일대의 주민들이 홍수 이듬해인 1926년 7월 15일 세운 것이었다. 자연 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잃지 말고, 이 일을 오래오래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원래 이 비석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사무소에 세워졌는데, 이후 몇 차례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그때마다 몇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2009년 현재의 장소에 자리 잡게 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을축년 7월 18일 대홍수 기념(乙丑年七月十八日大洪水紀念)’ 옆면에는 ‘증수사십팔척’(增水四十八尺; 물높이가 48척에 이르렀음) ‘유실이칠삼호’(流失二七三戶; 273호가 유실되었음)라는 문구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약 100년 전 그 시절의 대홍수를 이 비석 하나만이 외롭게 그 자리에 서서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사찰 봉은사에도 그 날의 홍수를 증언하고 있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수해구제공덕비’이다. 이 비석은 을축년 대홍수 당시 봉은사 주지 청호(晴湖) 스님이 절의 재물을 털어 수해민 708명을 구호했던 공덕을 기리고자 그 때 도움을 입은 수재민들이 십시일반 비용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건립 시기는 홍수 4년 뒤인 1929년 5월 27일로 다음의 1929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청호 스님의 수해 구제 활동과 비석 건립의 내력을 엿볼 수 있다. 기사 속의 ‘나청호’는 청호스님의 속성(俗姓)이 나(羅)씨여서 당시 그렇게 불렸다는 점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나씨 기념비 건립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본산 봉은사 주지 나청호씨는 을축년 대홍수 때에 자신이 홍수 상에 출장하여 뱃사공에게 명하여 배 한번 나가서 인명을 구조해오는 자마다 돈 10원씩을 주기로 하야 그때 구제된 자가 708인에 달했음으로, 그 구제를 당한 자 중 동부면 신장리 사는 리준식씨와 수씨(數氏)의 발기로 2개월 전부터 ‘나청호을축홍수구제기념비’를 기공하야 오던 중 수일 전에 준공되었음으로 지난 27일에 제막식 겸 피로연을 대본산 봉은사 내에서 거행했다더라.

    -동아일보, 1929년 5월 31일자

    [사진] 을축년 대홍수 당시 708명의 수재민을 구제하여 살아있는 부처로 칭송받은 봉은사 청호스님(왼쪽)과 서울 봉은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수해 구제 공덕비(오른쪽)이다. 이 공덕비에는 청호스님의 공덕을 기리는 한시가 적혀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을축년 7월 홍수로 선리·부리·잠실의 뽕나무 밭이 큰물에 잠기고, 708인 다급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목숨을 구해 달라 외쳤다. 나청호 대선사가 자비로움으로 이를 구제하니, 그 덕을 잊을 수가 없구나.’

    구리 인창동에 ‘배탈고개’도 을축년 대홍수 때 만들어진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배가 탈났다는 뜻의 ‘배탈’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을축년 대홍수 때 왕숙천이 범람해 구리 지역도 큰 피해를 보았다. 그때 저지대들은 다 침수되고 약간 높은 언덕에서 배를 타고 서울 방면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당시 배를 타고 내렸던 이 언덕바지를 ‘배탈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을축년 대홍수는 곳곳에 강한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을축년 대홍수가 남긴 흔적이 비석 몇 개나 지명 정도에 그친 것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영향은 새롭게 문화유산을 발견했다는 점일 것이다.

    먼저 홍수의 결과 암사동 선사유적지의 존재가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큰물이 휩쓸고 간 후 암사동에서는 신석기 시대 토기들과 유물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그 유물들은 일본 학자들이 수습해 가 버렸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신석기 시대라는 용어를 쓰지도 않았을 뿐더러, 선사시대에 대한 관심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고고학의 주된 관심은 역사시대 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존재가 알려진 이곳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8년 고려대, 숭실대, 경희대, 전남대 등의 합동 발굴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이곳은 사적 267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수가 신석기 시대 유적지를 발견한 셈이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이 홍수로 인해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홍수 직후인 1925년 8월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는 풍납동 일대 한강변에서 큰 항아리 한 점과 그 안에 보관된 청동 초두(鐎斗)를 거두어 정리하였다. 이 풍납토성에서 백제 유물이 최초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어 총독부는 추가 조사를 벌이게 되고, 약 10년 뒤인 1936년 이곳을 조선 고적 27호로 지정하였다. 이 풍납토성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으로 공식 인정되는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지만, 을축년 대홍수는 백제 왕성의 실체에 대한 논란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71년 폭우와 무령왕릉

    몇 년 전 홍수와 관련된 자료 한 점을 수집하였다. 을축년 대홍수에 대한 자료도 아니며, 아주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는 자료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자료는 을축년 대홍수보다 훨씬 뒤인 1971년 7월 28일 금천국민학교 교장이 학부형에게 보내는 가정 통신문 1점이었다. 제목은 ‘수해지구 교직원 및 학생구호 긴급 연락’이다. 내용인즉 1971년 7월 혹심한 폭우로 인해 수해를 입은 교직원과 학생들을 돕기 위해 구호 물품을 모으자는 것이다.

    필자가 이 가정 통신문을 수집한 이유는 이 1971년 7월 폭우가 내렸던 그 당시에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무령왕릉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의 백제 유물들이 발견되었듯이, 1971년 폭우 당시에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이다. 백제 역사에 관한 한 우리는 폭우와 홍수에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통신문의 내용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1971년 7월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먼저 살펴보자. 그러면 이 가정 통신문의 내용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1971년은 대선의 해였다. 1969년 9월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은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971년 박정희는 7대 대선에 출마하였는데, 이는 1963년, 1967년에 이은 세 번째 출마였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는 “이번 출마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울먹이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고, 야당인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박정희와의 대결에서 “이번에 박정희씨가 승리하면 앞으로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임을 경고했다.

    [사진] 1971년 7대 대선에서 맞붙었던 박정희 후보(왼쪽)와 김대중 후보(오른쪽)

    4월 27일 대선 결과 박정희 634만 2828표, 김대중 539만 5900표!

    94만 표 차로 김대중이 패배했다. 김대중은 경상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승리했다. 경상도에서만 150여만 표 차이로 참패했다. 이 선거에서 ‘지역감정’이 처음으로 이슈화되었고, 역사는 이 선거판를 계기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갈라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1년 7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청 광장에서 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취임식 날인 7월 1일만 잠시 비가 그쳤을 뿐, 당시는 장마철이라 6월 하순부터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비는 7월 들어서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던 7월 5일 한국 고고학계의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공주 시내로부터 북북서 방향으로 1km 떨어진 송산리 고분군에는 모두 6개의 고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장마철이 되면 산 능선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무덤 안으로 침투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문화재관리국은 6월 29일부터 송산리 고분군 5호와 6호분에 대한 배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5일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벌이던 중 한 인부가 단순한 돌이 아니라 무덤에 쓰이는 벽돌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7월 7일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돌입, 몇 시간 뒤 무덤의 문을 막고 있던 벽돌들을 걷어냈다. 무덤 입구에는 무덤을 지키는 돌짐승이 있었고, 그 옆 묘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무덤의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는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령왕 사망 후 1천400여년 만에 무덤의 내부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다음날인 7월 8일 한국일보는 새로운 백제 왕릉을 발견했다는 특종 기사를 실었다. 왕릉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발굴 현장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특히 떼로 몰려든 취재진은 현장을 공개하라고 압박했고, 하는 수 없이 각 언론사마다 순서를 정해 사진을 세 장씩만 찍기로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왕릉에 들어가자 취재진은 사진을 찍는데 집중하느라 청동숟가락을 발로 밟아 부러뜨리기도 했고, 이를 통제해야 하는 경찰조차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발굴단은 긴급회의를 열었고, 최대한 신속하게 발굴 작업을 끝마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정교한 실측과 섬세한 유물 수습이 이뤄져야 하는 발굴 작업이 제대로 된 실측은커녕 유물을 쓸어 담기에 급급했다. 그러다보니 발굴 작업이 보통 수개월 이상 걸리는데 무령왕릉의 경우 고작 12시간 만에 졸속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진] 1971년 공주 무령왕릉 발굴 장면. 쓸어 담다시피 발굴을 진행하여 뼈아픈 오점을 남긴 발굴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 김영배에게 걸려온 청와대의 전화 한 통!

    “각하께서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김영배는 금제관식, 금목걸이 등 20여점의 유물을 보따리에 싸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국립박물관장 김원룡과 함께 청와대를 찾는다. 7대 대통령으로 갓 취임한 박정희대통령은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하며 두 손으로 팔찌를 쥐고 가운데를 휘어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거칠고 폭력적인 발굴 전후 풍경은 당시 우리의 문화와 역사 인식 수준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발굴이 진행된 지 며칠 후 중부지방에 다시 폭우가 내렸다. 7월 17일 동아일보 기사다.

    폭우 피해 막심

    중부 일대. 사망 31, 실종 10여명, 침수 8백 채, 네 시간에 180mm

    17일 새벽 서울 경기 등 중부 지역 일원에 집중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 벼락 등으로 30일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실종하는 등 모두 40여명의 인명 피해를 나타냈다…….

    – [동아일보], 1971년 7월 17일

    그로부터 일주일 뒤 또다시 호남과 충청 지역에 집중 폭우가 내렸다. 다시 동아일보 보도.

    지난 25일 밤 10시부터 27일 오전 6시까지 충청 호남 지방에 내린 집중 폭우로 금강 유역인 충남 부여, 공주, 논산 등지에 극심한 물난리를 몰고 와 부여군에서만 37명이 죽고(실종 4명 포함),공주 보령 청양에서 각 3명, 논산 예산에서 각 2명, 금산에서 1명 등 충남에서만 모두 51명의 사망자를 냈는데…….충남 수해대책본부는 26일 오후 금강 범람에 대비 공주 부여군 내 금강 유역의 낮은 지대 주민들에게 긴급 대피령을 내리고 재민 구호와 복구 등에 나섰는데 피해가 가장 심한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일대는 교통 두절로 인해 식량과 의약품 등 구호물품의 수송이 어려워 이재민들은 국민학교 교실 등에 집단 수용된 채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동아일보], 1971년 7월 27일

    우연히도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가 폭우의 중심지였다. 위에서 소개한 금천국민학교 교장 이름으로 작성된 가정 통신문은 이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내린 폭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정통신문이 7월 28일 작성된 것임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가정통신문을 보낸 금천국민학교는 부여군 남면 금천리에 소재한 학교였다. 같은 이름의 학교가 전국적으로 5군데 이상 있었지만, 가정 통신문 내용에 나오는 ‘본군(本郡) 은산지구의 참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 학교가 부여군에 있던 금천국민학교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금천국민학교는 같은 남면에 있는 남성국민학교의 분교로 1963년 설치되었다. 신문 기사에 나오듯 이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부여군 은산면이었기에 남면 금천리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금천국민학교 교장은 가정통신문을 작성해 학생들을 통해 학부형에게 전달하게 된다. 은산면의 폭우 피해를 돕기 위해 구호물품을 학생들을 통해 모으니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는 호소였다. 이 수해 구호품 수집 활동은 금천국민학교 단독의 사업이 아니라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공문에 의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이날 학생들에게 배부된 가정통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1971년 7월 28일 부여 금천국민학교장 이름으로 각 가정에 전달된 가정통신문.(박건호 소장)

    수해 지구 교직원 및 학생 구호 긴급 연락

    이번 폭우로 인하여 각 지방에 혹심한 수해를 입은 바 그 중 본군 은산지구의 참상은 교직원 10여명이 집을 잃고 학생이 10여명 사망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실정이며 그 외 지역에서도 사고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가정 다소의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긴급 구호사업으로 된장, 간장, 고추장, 식량 및 위문품(학용품) 등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참상을 참작하시어 구호 사업에 동조하시는 부형께서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71년 7월 28일 금천국민학교장 올림

    1971년 7월의 홍수는 무령왕릉의 발견이라는 고고학적 대사건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즐기기에는 피해가 너무 컸다. 그건 생존권의 문제였다. 백제의 옛 도읍지에 살았던 사람들은 가련하게도 자신들의 터전 위에서 오래 전 이룩된 문화유산의 발견과 발굴에 흥분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정통신문에서 다소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호물품을 직접 지역주민들로부터 수집한다는 점도 그러하거니와, 수집대상 물품이 요즘의 수해 구호물품과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그렇다. 요즘의 구호물품은 담요, 생수, 라면 같은 것이 대표적인데, 그런 것들에 대한 언급은 없고 우리 전통 음식의 기본의 되는 된장, 간장, 고추장 같은 것을 모으고 있다는 점이 무척 생소하다. 구호물품 중에 생수가 따로 없는 것은 1970년대 초반이라 ‘생수’라는 개념이 없던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은 그냥 마시면 되는 것이지 따로 돈 주고 사먹는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생수는 그렇다 치고 라면은 왜 없는 것일까? 라면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에서 안도 모모후쿠라는 인물이 발명한 것으로, 이것이 한국에 들어와 대중화되기 시작한 연도는 1965년부터였다. 그러니 1971년 홍수 당시 농촌 마을에서 먹기에는 아직은 귀한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는 라면보다는 오히려 국수가 더 일상적인 간식이었다.

    또 하나 수집 대상 물품에 있는 ‘학용품’도 인상적이다.

    수해를 당한 아이들에게 담요나 옷가지가 더 중요할 터인데 학용품을 보내달라는 것도 특이하다. 역시 한국인의 교육열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 대목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지에서도 천막학교, 피난학교를 운영했던 민족 아니던가? 이 구호물품 하나에도 이런 교육열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정통신문을 발송한 금천국민학교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학교는 1993년 폐교되었고, 폐교 건물은 현재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금천국민학교를 분교로 거느린 남성국민학교 역시 2000년대 초반 폐교되어 지금은 한옥학교로 쓰이고 있다. 당시의 대통령 박정희도, 그와 대선에서 격돌했던 김대중도 벌써 불귀의 객이 되었다. 심지어 7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20살의 앳된 나이로 서 있던 대통령의 딸도 환갑 나이를 넘긴 지 오래이고, 지금 구치소에 수감되어있다. 당시 수해를 당하고도 먹지 못했던 귀한 음식 라면은 지금 지천에 널려있고, 누구도 이 인스턴트 식품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했다. 대략 50년이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한 셈이니 그도 그럴 만하다.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1971년 대선이 남겨놓은 ‘지역감정’ 정도랄까. 지역감정은 이전과는 덜하지만 여전히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에 의해 계속 이용되면서 지금까지 그 흔적을 강고히 남기고 있다.

    [사진] 1971년 7대 대통령 취임식에 대통령 박정희가 선서를 하고 있다. 왼쪽 옆으로 영부인 육영수와 큰 딸 근혜가 보인다. 당시 박근혜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1971년 7대 대선도, 대통령 취임도, 홍수도, 무령왕릉 발굴도 모두 50년 전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다시 7월 장마철이다.

    언론에서는 올해 장마가 ‘마른장마’라고 난리들이다. 6월 26일 시작된 올해 장마가 벌써 열흘 이상이 지나도록 비가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가 안 오니 덥고 가뭄도 심한 편이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역대 가장 적은 장맛비가 내린 1999년의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을 것이라고들 예측하고 있다. 폭우가 더 큰 문제가 될지, 더위나 가뭄이 더 큰 문제가 될지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봐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장마철에 유예된 큰 비가 또 쏟아질지도 모른다. 7월 한국은 늘 큰비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또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기도 하였다. 올해 장마는 조용히 무고하게 또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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