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 사회주의 꿈꾼 정신분석학자
        2006년 07월 18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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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아직도 대체로 내면의 해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진보주의자들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정당들은 외부의 해방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유일하게 현실적인 목표는 총체적 해방인데, 이러한 목적을 근본적(혹은 혁명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존재의 기술> 중에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는…최대 이윤의 욕구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장과 자본의 비인간적 힘의 법칙에 따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스스로 계획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는 사회 체제이다."(<불복종에 관하여> 중에서)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의 책으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우리에게 심리학자 혹은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신프로이드 학파의 거장이었던 프롬이 마르크스의 초기사상과 프로이드의 이론을 융합해 인간주의적인 사회주의를 꿈꾼 인물이었고 미국 사회당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롬은 1900년 3월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보모는 독실한 유태교 신자였다. 아버지인 나프탈리 프롬은 와인상을 하는 중산계급이었다.

    프롬은 1918년 프랑크프루트 대학에 입학해 2학기 동안 법학을 공부한 뒤 하이델베르크대로 옮겨 사회학을 공부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은 "유태교의 두 종파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였다. 그때까지 유태교가 프롬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1926년에 그는 유태교와 작별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융합 시도

       
     

    그후 베를린정신분석학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연구하던 그는 1931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활동근거지이던 프랑크푸르트사회조사연구소에 참여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예상치 못했던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지였던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퇴조하면서 독일의 좌파지식인들은 곤경에 빠졌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돌파구 중의 하나는 "과거의 오류를 규명하고 새로운 행동을 강구하기 위해 마르크스 이론의 근본적인 토대를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좌파지식인 서클이었다.

    1923년에 정식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사회조사연구소’는 초기에는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으로 노동계급을 상정했지만 "산업사회의 기술적 합리화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거세했다"고 판단하고 현대사회의 문화적 상부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 연구활동의 초점을 옮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의 도입이 요구됐다.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1년, 3명의 정신분석학자를 맞아들였는데 그들은 칼 란트아우어, 하인리히 멩,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었다.

    프롬이 합류함으로써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의 융합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다. 1932년 ‘프랑크푸르트사회조사연구소’의 기관지 <사회연구>지에 ‘정신분석학적 사회심리학의 방법과 과제’를 발표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프롬은 1933년부터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미, 사회당 강령 초안 작성도

    이 무렵 독일에서는 나치가 득세를 하기 시작했고 독일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처럼 프롬도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먼저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가 1934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콜럼비아대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교류를 지속했던 그는 1939년 프로이드 해석과 평가에 관한 연구소와의 의견차이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결별했다. 프롬은 이후 정통프로이드주의와도 멀어져 갔다.

    서구의 자본주의도 소비에트의 공산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프롬은 이때부터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주목하며 인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955년 펴낸 <건전한 사회>는 이러한 그의 사회변혁의 이론과 사상이 제시된 책이다.

    프롬은 자본주의도 소비에트식의 공산주의도 인간성을 짓밟고 관료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소외’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데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담겨 있는 사상을 더욱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었다.

       
     

    프롬의 사회변혁방법론은 ‘개인의 내적 변화를 통한 자기 해방과 사회변혁이 동시에 추진돼야한다’는 것과 ‘사회변혁운동이 정치적 영역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영역에서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런 생각은 <마르크스의 인간개념>,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로 이어졌고, 이론뿐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그는 그가 발딛고 있는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에 몸담으면서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프롬은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 중반 미국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을 했고 베트남전 시기에는 평화운동, 반전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반전을 기치로 내걸고 민주당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의 예비후보 경선을 도왔던 프롬은 닉슨의 당선 이후 정치적 활동을 접었다.

    1965년 멕시코국립자치대학(UNAM)에서 정년 퇴직한 뒤에도 <소유냐 존재냐>, <희망의 혁명>등 7권의 책과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프롬은 1980년 3월18일 스위스에서 사망한다.

    그가 사망한 뒤 1981년 <불복종에 관하여>가 출간됐는데 이 책에 실려있는 미국 사회당의 강령 초안은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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