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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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18일 07: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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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레디앙>에서 제일 열심히 읽는 칼럼은 우석훈님의 글이다. 특히 지난 서울시장 선거 때 양쪽의 공약을 검토하면서 아파트의 정치-도시-공학적 맥락을 해설하는 대목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진보적 글쓰기, ‘패배 아니면 하나마나’가 안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납득할 수 없었던 서울시의 아파트 건축 계획들의 음모(!)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가 되었으며,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파트와 얼마나 가깝게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결국 이건 매우 구체적으로 2006년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적으로 거주한다는 문제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해결되어야 할 세 가지 가장 기본적인 문제 중(衣, 食, 住)의 하나.

나는 진보에 관한 글이 뜬금없이 과격할 때 이미 패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글은 이미 얻을 수 없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혹은 진보에 관한 글이 원론만 되풀이할 때 하나마나한 글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고민은 이미 피와 살을 가진 현실에 대해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우석훈은 내 이웃처럼 고민한 다음 힘겹게 전세금을 걱정하는 나에게 그 걱정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게 만든다. 나는 우석훈의 글이 훨씬 많이 읽혀야 하며, 더 자주 인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석훈 글 많이 읽히고 자주 인용돼야 하는 이유

나는 올해 상반기에 본 영화 중 세 편의 영화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류승완의 <짝패>와 유하의 <비열한 거리>, 그리고 안병기의 <아파트>이다. 세 편 모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영화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편의 영화를 곧 잊었다. 당연하지!

   
 ▲ 영화 <비열한 거리> 포스터
 
 

그런데 김소영이 <비열한 거리>에 관한 평을 쓰면서(씨네21, 제 560호, “호스티스에서 호스트로, <강적>과 <비열한 거리>가 몸에 의지하는 이유) <짝패>에 이어 이 영화를 ‘부동산 활극’이라고 불렀다. 그 순간 문득 두 편의 영화가 부동산에 집착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평을 읽으면서 그날 우연히도 <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환기. 먼저 <짝패>. 서울 형사 태수(정두홍)은 친구가 ‘칼에 맞아’ 죽었다는 말에 고향에 내려간다. 범인을 찾던 끝에 부동산 개발을 둘러싸고 옛 친구인 필호(이범수)가 벌임 음모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수는 후배 석환(류승완)과 함께 쳐들어가 결투를 벌인다. 결말은 당신의 예상대로 끝난다.

그 다음 <비열한 거리>. 똘마니 조폭 두목 병두(조인성)은 스폰서를 잡기 위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른다. 그에게는 철거 직전에 갈데없는 노모와 여동생이 있고, 자기만 바라보는 조폭 동생들이 있다. 병두는 스폰서‘께서’ 아파트 분양사업을 위해 검사 한 명이 문제라고 하자 그마저 해치운다.

그런데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옛 고등학교 동창 민호가 그를 찾아와 조폭 영화를 준비 중이라서 취재차 만나러 왔다고 말한다. 병두는 어느 날 민호에게 술김에 검사를 해치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민호는 그걸 영화로 찍고, 병두는 이제 민호를 없애지 않으면 문제가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엔딩은 나쁜 놈들만 살아남는다.

못 만들어서 재미없는 세편의 영화

   
 ▲ 영화 <아파트> 포스터
 

마지막으로 <아파트>. 디자이너인 세진(고소영)은 아파트에 혼자 산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9시 53분만 되면 아파트 전체의 불이 꺼지고 한 명이 죽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다음 그 시간이 되면 아파트가 불이 꺼지고 한명씩 죽는다. 세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 비밀을 자기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는 (누구라도 이미 눈치 챈)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 세 편의 영화 중 어느 영화도 아파트, 혹은 부동산 문제를 다루려고 만든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그저 소재이거나 무대이거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이건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일종의 핑계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 세 편의 영화는 내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자기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가장 설득력 있는 무대는, 배경은, 소재는, 핑계는, 그들이 서로 만나서 의논한 적도 없는데 거의 동시에 부동산이라는 견해에 ‘엉겁결에’ 동의했다. 여기서 방점은 ‘거의 동시에’라는 말에 있다.

지난 봄 오세훈도, 강금실도,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서울의 약한 고리가 아파트라는 것을 알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년 내내 강남 아파트를 붙잡기 위해 악전고투하였지만 이제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우리가 아파트 주인인가, 아파트가 우리 주인인가

강남 아파트는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요지부동의 철통같은 자본주의의 요새, 부동산. 혹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우리 모두의 주인 담론으로서의 아파트. 그런데 아파트는 진정 우리들의 주인인가? 사실 아파트는 사이비 주인이다. 그 진정한 주인은 물론 자본이다.

그러나 내가 우석훈의 글을 읽고 깨달은 점은 아파트가 자본의 대상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주인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우리 시대의) 집행자라는 사실이다. 그때 이 아파트는 사이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으스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이비 주인을 그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연합뉴스
 

이 그림자는 자본의 중복이지만, 일단 현실의 순환 안에 들어오면 아파트와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관계로 전도되면서 아파트 전체의 자본의 구조 관계를 은폐하기 시작한다.

그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거기 초대받은 손님들에 불과해진다. 법칙은 간단하지만 잔인하다. 가난한 손님들은 쫓겨나고, 부자 손님들은 초대받는다. 그때 이 세 편의 영화는 초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우선 이 세 편의 공통점. 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신기하게 그들 중 누구도 아파트를 결국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파트를 둘러싼 현실 속의 싸움의 목표는 간단하다. 그걸 소유하는 것이다. 이걸 둘러싸고 전세금과 재산세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 한다

영화에서도 싸움이 반복된다. 친구까지 죽여가면서 필호는 고향의 개발 사업에 끼어들려고 한다. (<짝패>) 병두는 철거민이 되어 떠도는 가족에게 근사한 아파트 안겨주고 멋진 연애의 꿈을 꾸지만 결국 그가 찔렀던 수많은 희생자들처럼 그도 칼에 찔려 죽는다. (<비열한 거리>) 그 방에 가서 그 소녀를 구하려고 하지만 세진은 결국 그 아파트에서 그녀가 본 수 많은 희생자들처럼 뛰어내려 죽는다. (<아파트>)

영화 속의 누구도 그걸 끝내 소유하지 못한다. 이 세 편의 서로 다른 영화에서 아파트를 둘러싼 갈등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집이 없는 자(homeless)’로서의 자리에 갈 때에만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은 같은 자리에 도착할 때에야 끝난다. 그때 이 자리는 아파트가 집(house)일 수는 있지만 집(home)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다음 차이점. 그런데 이게 남자들이 주인공인 장르로 들어오면 (조폭들의) 액션 활극이 되고(<짝패>와 <비열한 거리>), 여자들이 주인공인 장르로 들어오면 공포영화가 된다. (<아파트>) 장르는 현실의 질서를 이야기의 컨벤션으로 바꿔치는 것이다.

“집을 소유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이걸 단순히 남자들의 폭력과 여자들의 비명이라는 식으로 단순화시키면 안 된다. 그건 영화가 현실을 마치 거울처럼 복제한다고 성급하게 착각하는 것이다. 반영은 그렇게 단순하게 옮겨오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는 메타-예언이라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 세 편의 영화의 공통점을 말하면서 내가 놓친 것은 이 세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건 아니건) 집을 소유하려는 이들은 결국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자신이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고, 이미 죽은 여자는 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승인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왜 부동산은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운명의 순환에 넣었을 때만 이야기로서 성립되는 것일까? 생각해야 할 점. 그 순환이 한 번은 원인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고, 다른 한 번은 죽음이라는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향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된다.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영화 안에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파트를 중심에 놓은 다음 이야기를 거꾸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때 아파트를 둘러싼 폭력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죽지 않으면 이 폭력이 끝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미 죽은 사람이 자기의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들어가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 그러니까 그 둘은 사실상 하나의 순환이다.

아파트, 들어가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들의 싸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폭력이고, 나가지 않으려는 것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이것이 반복이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 둘은 하나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악순환이다. (내 생각에) 비밀은 여기에 있다.

   
 ▲ 철거된 청계천 삼일아파트 ⓒ연합뉴스
 

아파트는 존재론적인 일관성을 상실했을 때에만 비로소 순환으로서 성립된다. 들어오려는 것과 나가는 것 사이의 불일치. 폭력과 공포. 폭력이 끝날 때 공포가 시작되고, 공포를 떨칠 때 폭력이 시작된다.

그때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환상을 끝내기만 하면, 욕망을 멈추기만 하면, 아파트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건 (이미 아파트에 안전하게 살고계신 교수님들의) 기만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부지불식간에 진실을 이야기한다. 환상을 멈출 때에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릴 때, 환상을 끝낼 수 있을 때, 욕망을 멈추려면, 더 이상 주거의 필요성이 사라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건 물론 내가 죽는 것이다. 그때 폐기되는 것은 아파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가공할만한 집값 앞에서 날아가 버리는 우리들의 바람

말하자면 산다는 문제. 내가 발을 뻗고 잠들 수 있는 작은 방. 내가 힘겹게 모은 책과 음반, DVD들을 쌓아놓을 수 있는 집. 그건 내가 소망하는 유일한 바람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사실상 저 가공할만한 집값 앞에서 그저 바람결에 간단하게 날아가 버릴 주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집을 가진 자들에게 증오심을 매일 키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작은 집에서 매년 전세 값에 전전긍긍하면서 그저 쫓겨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므로 나는 매년 두려움에 하여튼 버티고 있다. 폭력적인 전복에의 유혹과 공포에 차서 일 년에 한 번씩 내게 찾아오는 계약일. 그 사이의 줄타기. 우리 일부의 삶. 그런데 너무 많은 일부.

덧붙여진 약간의 잡담. 나는 얼마 전 강남의 유명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들이 그렇듯이 들으러 오는 수강생들은 그 동네 아줌마, 혹은 소녀들이다.(수강생 중에 단 한 명의 남자도 없었다)

휴식시간에 그냥 무심코 여기 주민들께서는 자녀들의 학군 문제 때문에 이 지역을 고집한다고 신문에 실려 있는데 정말 자녀문제인가요, 라고 묻자 앉아계신 아줌마들이 모두 웃었다. (정말 모두 웃었다. 진짜 웃기는 농담을 들었을 때처럼 격의 없이 웃었다)

다 유학 갔는데 학군이 뭐 중요하겠어요?

그러더니 한 아줌마가 대답했다. “이 동네 애들은 다 유학 갔는데 학군이 무슨 문제겠어요, 저희는 이 동네에 무슨 학교가 있는 지도 잘 몰라요. 그냥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 살잖아요.” 물론 이 대답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남는다.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 살잖아요.” 이 대답은 어느 동네에 대입해도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 함께 살면서 서로 잘 알고 있는 모두는 누구일까? 도대체 그들이 누구 길래 그 모두가 힘을 합치면 정말 대통령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일까? 말하자면 정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제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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